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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사람들/만해 제자 춘성 일화

춘성 스님은 누구?

춘성 스님 얘기는 칠장사 주지로 있던 도광 스님한테서 처음 들었다. 그러다 도피안사 송암이 또 얘기를 해주길래 그간 잊고 있던 기억을 더듬고, 인터넷 자료를 뒤져 한 자리에 모아보기로 했다. 그런즉 마음껏 읽으시고, 마음껏 퍼가시길. - 주

 

춘성(春城)스님 (1891∼1977)

 

춘성스님은 1891년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태어났다. 속명 창림(昌林), 본관은 평창(平昌), 성(姓)은 이(李)씨, 법명은 춘성(春城), 법호 또한 춘성(春性) 이다. 태몽에 하늘에서 동자가 오색구름을 타고 어머니 품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영민함이 유난히 남달랐다고 한다.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신흥사에 가서 대웅전 부처님을 뵙고 난 후 출가의 뚯을 부모님께 고하니 불허하였다. 이후 13세에 백담사로 출가하여 만해 한용운스님 휘하로 들어가 머리를 깍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해동안 백담사에서 만해스님에게서 수학하였다. 스님은 만해 스님의 유일한 제자이기도 하다.

 

20세에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 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5세에 평안도 안변 석왕사에서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이어 강학(講學)을 전공하고 강백(講白)으로서 전국의 운수납자를 들끓게 했다.

 

30세에 신흥사 주지를 맡았으며, 재임시 불전답(佛田畓)을 많이 확보하셨다.

* 이 불전답 때문에 신흥사 주지 서로 차지하려고 훗날 스님들끼리 칼부림을 했다.

 

35 세에 석왕사 주지를 맡아 불사(佛事)에 심혈을 기울이고, 이후 서울 삼청동에 많은 신도들의 힘으로 칠보사를 창건하시고 도봉산 원통사를 중창하였다.

 

40세에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스님 휘하에서 법사로 전법수행했다. 만공 스님께서 '별전일구(別傳一句)가 재기처(在基處)요'하며, 춘성스님은 우렁찬 목소리로 일갈(一喝)하며 되받으나, 만공 선사께서 이를 수긍치 않았다.

 

이에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에서 겨울에 불도 지피지 않고 장좌불와를 거듭하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간 수행하다 마지막 동안거 결제일에 '이제 잠은 항복 받았다'고 하니 드디어 무애한 대자유인으로 탈바꿈하였다.

 

45세에 25하안거를 마치고, 60세인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북한산의 망월사를 떠나지 않았다.

*25하안거란 하안거를 25회 치렀다는 뜻이니 25년간 참선 수련한 것이다.

 

60세 이후 망월사 주지, 강화 보문사 주지 등을 지냈다.

* 보문사 주지 때 육영수 여사가 마애불까지 오르는 길을 닦아주었다고 한다.

 

80세까지 망월사 조실로 있다가 81세 홀연 만행을 떠나고, 87세에 스님은 화계사에서 문도를 모아두고 임종 법어를 내렸다.

 

- 팔십칠년사(八十七年事) 여든 일곱 생을 살았던 일이

칠전팔도기(七轉八倒起)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는 것과 같네

횡설여견설(橫說與堅說) 횡설수설했던 그 모든 것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붉은 난로 속의 한 점 눈이네

   

스님의 뜻대로 성남시 봉국사에 탑과 비가 세워졌다.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스님으로도 통했으나 평생을 옷 한 벌 바리때(수행자용 나무 밥그릇) 하나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극락이 마음을 떠나 따로 없고, 종교도 본래 없는 것으로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어 사람을 버리게 된다며 종교의 참뜻을 깨우친 선승이기도 하다.

1977년 화계사에서 세수 87세, 법랍 74세로 입적하였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