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 이제야 당신의 존재를 깨닫겠습니다.
귀의합니다. 진실로 온 마음을 다하여 귀의합니다.
계기가 뭔지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는 워낙 벼라별 것들이 늘 시냅스를 타고 우왕좌왕 B급 영화처럼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 순간 딱 찍어 기억해두지 않으면 그냥 휩쓸려버리고 만다.
오늘 우리집 장애견 바니를 미용실에 맡기고 그 사이 목욕하러 갔는데, 따뜻한 온탕에 몸을 담고 있다가 불현듯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생각났다.
탕에 들어오기 전 이발실에 가 머리를 다듬었다. 때밀이(목욕관리사라고 하던데 입에 붙지 않어서)는 소파에 어깨를 기대고 자고 있었다. 머리를 다듬고 나오면서 이발사에게 곧 때를 밀어야 하니 10분쯤 있다가 저 사람 좀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샤워를 하고 온탕에 들어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온탕에 들어갈 때는 요즘 아랫도리가 자꾸 춥다는 느낌이 들어 오래도록 앉아 있어 볼 요량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부력으로 잘 유지되지 못해 그냥 다리를 쭉 뻗고 벽에 머리를 두고 기대앉았다. 그때 불현듯 낮에 읽은 박문수의 시가 생각났다. 번역이 시원치 않아 30분쯤 내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듬었다.
- 붉은빛 토하는 석양은 푸른 산에 걸리고
기러기는 차디찬 흰 구름 사이로 줄지어 날아간다.
나루가 어디냐고 묻는 나그네의 목소리가 급해지고
산사로 돌아가는 동냥승도 부지런히 지팡이를 놀린다.
풀을 뜯던 소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남편 기다리는 아낙은 댓돌에 서서 쪽진 머리를 떨군다.
저녁 연기는 파랗게 남쪽마을로 피어오르고
나뭇짐을 진 총각은 풀피리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落照吐紅掛碧山 寒鴉尺盡白雲間
問津行客鞭應急 尋寺歸僧杖不閒
放牧園中牛帶影 望夫臺上妾低鬟
蒼煙古木溪南里 短髮樵童弄苖還)
여기서 기러기가 날아가는 걸 원문에서 尺을 썼는데, 내가 보기에는 각자로 보는 게 맞을 것같다. 한자는 대충 추정해서 서로 의미를 통해야 하므로 해석의 오류가 많은데 이 경우도 그렇다. 기러기는 그냥 줄지어 가는 게 아니라 안형(雁形)이라고 하여 역 V 자로, 즉 두 줄을 지어 날아간다. 공기저항을 덜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말하는 자는 이 각자를 말한다. 그냥 자라고 하면 길이만 재는 일(一) 자자를 말한다.
이 생각을 하던 중에 300년 전의 기러기도 V 자 형태로 날았으니, 천년 전에도 그렇게 날았을 것이고, 이천년 전에도 그렇게 날았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기러기라는 집체(集體)는 하나일 뿐이고, 그 기러기가 수천 살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하늘을 V 자로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나니 갑자기 저 이발사, 저 때밀이, 그리고 나는 어디를 향해 줄지어 날아갈까 생각했다. 내가 비록 요금을 낸다지만, 어쨌든 저이들은 나를 위해 이발 봉사를 하고, 때밀이 봉사를 한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고 생각하니 손으로 발톱 깎아주고, 발은 걸어서 몸 전체를 움직여 주고, 저마다 저 할 일을 함으로써 다른 부분을 돕는다. 귀는 소리를 들어 이를 전체에 알리고, 눈은 빛을 감지해 형체를 분별해 이를 알리고, 저마다 다른 일을 하지만 결국 전체를 위해 일한다.
내 몸이야 그렇다치고 저이들과 나는 서로 다른 일을 하면서 왜 같은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아차 하고 생각했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목적이 숨어 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신이여, 하고 나는 속으로 말해보았다. 인간 유전자를 보면 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부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나 한 개체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공통 유전자가 볼 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서 기러기는 기러기일 뿐 기러기'들'이 아니고, 기러기 하나도 아닌 것이다. 수만 마리의 기러기가 있어도 저마다 천수천안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장치일 뿐 기러기라는 큰 이름은 결국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기러기들은 기러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게 목표다.
사람 또한 무슨 일을 하든, 전쟁을 하러 나가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가든 호모 사피인스 사피엔스의 다양한 몸짓에 불과하다. 결국 세월이 지나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귀결될 정보를 수집하러 저 60억 인구가 저마다 다른 데를 바라보고, 다른 소리를 듣고,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싸우고, 칭기즈칸이 대륙을 달리고, 공자가 천하를 유순하고, 고흐가 귀를 자르고, 히틀러가 수백만 명을 죽이는 이 모든 것이 오늘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와 있는 것이다. 확실히 닿아 있다.
마치 한 인간의 신체가 60조 개의 세포가 연합해 움직이는 것처럼 60억 인류도 결국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거대한 한 생명체, 한 집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개체는 죽을 수 있어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지금 10만 년째 살고 있다.
그러니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란 60억개의 눈과 귀와 손을 쌍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정보는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귀결된다. 그러고보니 더욱 더 사람에게 귀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람 미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똑같다. 몸도 구석구석 스트레스 없이 건강해야 하는 것처럼 인류 역시 전 인류가 다 평화로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따뜻한 탕에 앉아 잠시 이런 기도를 했다.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나는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내가 당신임을 잊지 않고, 당신이 나임을 잊지 않고 잠시도 방일하지 않겠습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살겠습니다. 저를 채찍하소서.
* 그렇다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신(神)이라는 뜻은 아님. 비유 이상으로 비약하지 마시길.
'파란태양 > *파란태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애인 화장실이 남녀공용이었다구? (0) | 2009.11.03 |
---|---|
아이폰, 왜 아직도 말이 없나? (0) | 2009.11.03 |
대하소설을 읽자 (0) | 2009.10.27 |
고은 선생을 뵙고 (0) | 2009.10.10 |
볍씨 태우는 농민, 자식 태우는 심정일 거라구? (0) | 2009.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