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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대하소설을 읽자

인터넷이 널리 확산되면서 대하소설을 읽는 독자가 급격히 줄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4년 교육을 마치도록 장편소설을 써보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여 대학에 들어온 사람이 장편소설 하나 써보지도 못하고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데 그뒤 대학원이 생겨 2년을 더 배우는 학생들조차 장편소설을 써내지 못하는 걸 보았다. 졸업논문 대신 장편소설을 쓰면 된다고 규정을 만들어 주어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논문을 쓸지언정 정작 장편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의 플롯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단편도 쓸 수 있고, 콩트도 쓸 수 있고, 짧은 시도 쓸 수 있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부분은 가치가 없다. 전체를 알아야 어느 부분이 더 소중한지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장편소설을 많이 써왔다. 적으면 두 권, 세 권 짜리에 많으면 다섯권, 열권 짜리가 여러 종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200매 짜리 중편을 처음 써보고, 대학 3학년이 되어 가까스로 800매 짜리 장편을 썼는데, 머릿속에서 플롯을 움직이는데 굉장히 어려웠다. 그 무렵 수십 권에 이르는 일본 대하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전체를 통찰하는 작가의 플롯이 치밀하다는 데 깜짝 놀라곤 했다. 플롯이 잘 되면 수십 권 짜리 대하라도 짧게 느껴지고 1권 짜리 장편이라도 플롯이 어지러우면 10권짜리 대하를 읽은 것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수다스럽기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약 5천 매의 <소설 토정비결>을 쓴 나이가 서른두 살인데, 이때는 이미 서너 권의 장편소설 습작이 있었기 때문에 플롯을 잡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역사 공부가 깊지 않아 사실관계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과정이 좀 힘들었을 뿐이다.

 

이 소설은 플롯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사실 뻔한 인물 이야기를 세 권으로 늘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단편소설 열세 편 정도를 적당히 배열하는 창작집이라면 문제가 안되지만 한 편 한 편을 제대로 이어붙이려면 나름대로 꾀를 내야 한다. 출판사에서는 무조건 3권 이상으로 써달라고 주문하기 때문에, 그래야 한 번 광고하는 것으로 세 권을 팔 수 있다니까 그에 부응해야만 했다. 그래서 2권에서 독자들이 지루해할 것같아 죽은 서경덕이 귀신으로 현신하여 제자들과 함께 천하주유를 하는 장면을 그렸다. 서경덕이 귀신이냐 아니냐로 독자들을 끌고가니까 따로따로 놀던 삽화들이 촘촘하게 연결되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잇따라 나오는데도 독자들은 딴 데 정신이 팔려 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열 권 짜리 대하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뭔가 강렬한 주제 하나를 깊숙이 깔아놓고 들어가야만 인물 소설을 살릴 수 있다. 우리들 개인사를 돌이켜보아도 인생사가 저마다 독립되어 있어 서로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5년 전에 만나던 인물 중 지금까지 만나는 인물이 몇 안되는 것처럼 누구나 다 그렇다. 이걸 플롯으로 짜주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렇게 모든 인물 소설을 플롯 관점에서 설계하고 집 짓듯이 쓰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사실은 현실 정치라든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뭔지 잘 보인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내가 요즘 재미붙인 게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어떨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여 행동을 예측하는 기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선거나 사업, 인생에서 본인들은 미처 알지 못하는 '정해진 플롯'을 미리 읽어낼 수가 있다. 소설이든 인생이든 사업이든 플롯이라는 건 몇 가지 규칙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별스런 소설, 별스런 인생이라도 사실 몇 개 정해진 플롯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우리 재단을 통해 독서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독서를 하면 좌뇌 우뇌가 골고루 활성되고, 긴 소설을 읽을 때는 거의 전뇌가 활성된다. 작가만큼이야 복잡하지 않지만 그래도 수많은 등장인물을 두뇌 곳곳에 배치해놓고, 인물과 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꿰고 있으려면 두뇌가 강력히 활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청각, 시각, 촉각까지 활성되어 전두엽, 측두엽, 후두엽, 두정엽 등이 마구 춤을 춘다. 이렇게 두뇌가 골고루 자극이 되면 현실 생활에서도 아이디어가 풍부해지고, 사고가 유연하며 넓고 깊어진다.

 

그런데 요즘 대하소설을 읽는 독자는 날로 줄어들고, 한 권 짜리 장편소설조차 내가 한창 쓸 때의 1300매 기준에서 요즘은 800매로 내려왔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600매까지 내리잡아 중편인지 장편인지 헷갈리는 소설도 있다. 그나마도 안읽어 문제라고 한다.

 

그런 대신 드라마나 영화에 몰두하는데, 영화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드라마는 두뇌 활성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소리 또 하고 또 해서 굳이 머리쓰며 볼 필요가 없다. 죽은 놈이 다시 나와도 그런가 보다 하지 의심하지 않는다. 소설 읽을 때처럼 이게 누구더라 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할 필요가 없이 한 말 또하고 또해서 잊지 않게 해준다.

 

게다가 인터넷이 널리 이용되면서 짧은 정보가 난무한다. 분명 10매 정도의 글로는 설명이 안되는 개념인데도 용케들 줄여서 잘 쓴다. 그러니 다 박사는 박산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밑천이 드러나고, 토론을 해보면 궤변이나 늘어놓기 일쑤다. 신문 사설 길이의 글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대하소설은 사라지고, 인생의 대하도 사라지고 낱장으로 기록된 일기책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실록은 사라지고 사초만 남는 것처럼 인생의 대하는 사라지고 장면 장면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생은 대하다. 50년 겨우 살았는데도 뒤돌아보면 황하 장강처럼 길고 긴데, 백년 인생을 조망하려면 말할 것도 없다. 하물며 한 나라나 민족의 이야기를 할라치면 5백년 천년을 꿰뚫어야 한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인류를 말할 것이며, 우주를 바라다볼 것인가. 그런데도 세계화, 글로벌만 외쳐대는 건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수사일 뿐이다. 난 오래 전 김영삼 전대통령의 세계화 구호에서 참 많이 웃었다.

 

난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을 보면서 역사 공부가 짧아 한 시대에 점이나 찍고 가는 분이 많구나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천년, 오천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제대로 짚어야 하는데, 그래야 작은 일도 크게 할 수 있고,  큰 일도 작게 할 수 있는데 그냥 야당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용쓰다 헛발질하고, 인기 좀 얻어보려다 망신살이나 받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우리 현대정치사에 등장했다 이슬처럼 말라버린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 공부가 덜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공부에 대해 내가 할 말은 없다. 내 전공이 아닌 분야는 나도 아직 배우는 학생이다. 다만 내 일을 하다보니 대하소설을 가끔 읽어두는 게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한 방편이 되더라는 걸 알 뿐이다. 1년에 대하 하나씩만 읽는다면 누구나 긴 안목, 멀리보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일년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는 서울시민이 무려 36%라는데, 지방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런 나라에서 이런 말이 먹힐런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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