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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풍년이라 큰일난 세상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 형제는 아들만 다섯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딸을 못낳으셨다. 딸이 있었으면 하는 아버지 바람에 따라 평소 아버지 일터인 정미소에 찾아와 즐겨 놀아주던 어린 계집아이를 수양딸로 삼아 아주 외롭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 딸이 자식들 생기고 나이를 먹어가다보니 명절이나 돼야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성묘 다녀오는 길에 우리 막내가 옛날에 손바닥만한 다락논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지나간 얘기를 했다. 답(沓)으로 등록된 땅이 아니라 대충 개울물을 받아 만든 자그마한 것으로 열 평 남짓할 것이다. 이 말고도 우리집에 내가 개간한 논이 있었으니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새앙골이라는 앞산 골짜기에 다섯 평 정도 되는 '미니' 논을 일궈 거기 벼를 심은 적이 있다. 아마 초등학교 때 논 한 마지기 없는 집안 살림이 부끄러워, 혹은 남들 모내기하는 게 부러워 동생들 동원해 땅을 파고 물을 끌어댄 것같다. 모종은 남들이 심다 개울에 버린 걸 얻어다 심었으니 몇 포기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확을 해보았는지조차 기억이 안난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막내동생이 초등학교 가정환경조사 때 '논 두 마지기'라고 적어냈다고 해서 형제들이 모두 웃었다. 내가 우리집 가정 형편을 중간이라고 적어낸 것과 같은 에피소드다.

 

이런 처지이다보니 '먹성' 좋은 다섯 형제가 먹어치우는 게 적지 않았다. 이런 입 다섯 개를 먹이느라 어머니 아버지는 말할 수없는 고통을 겪으셨다. 심지어 이만때면 먹을거리가 모자라 한창 자라는 배추잎을 몇 장씩 따다가 된장을 풀어 국을 끓여먹이곤 했단다. 보릿고개 때 어머니가 청보리 이삭을 칼로 끊어 앞치마에 담아다 돌절구에 찧는 걸 보고 자란 나는 희미하게나마 부모님의 어려움을 짐작해본다.

 

아버지는 돈 되는 농사는 생각조차 못하고 먹는 대책만 가까스로 세우는 농사꾼이었다. 그러니 형제들이 중학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논없이 밭만 약간 있다보니 아버지가 머리를 쓴다고 한 게 고구마와 콩을 심는 일이었다. 고구마나 콩은 아무 데나 심어도, 심지어 거름을 내지 않아도 잘 자라기 때문에 경사가 심한 산전에는 대개 고구마와 콩을 심었다. 산전에 고구마순을 심을 때는 꼭 비오는 날을 골라 나갔는데, 지금도 비를 맞으면서 고구마 순을 묻던 생각이 난다.

 

그때 콩 심고 고구마 심던 밭은 지금 거의 밭구실을 하지 않고 수목이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150여평 될 듯한 골짜기 평지를 우리는 '평자락'이라고 부를만큼 나머지 밭은 경사가 심해서 김을 매거나 씨를 뿌릴 때 허리를 조금만 굽혀도 되는 정도였다.

이런 산전에서 가을이면 고구마를 몇 가마씩 캐다 작은방에 저장해놓고, 콩은 스무 가마 정도 수확해서 보리와 함께 밥을 지어먹거나 된장을 만들어 국거리 등으로 다양하게 썼다. 특히 반찬이 마땅치 않을 때는 된장만 물에 풀어 끓여 먹는 일이 많았다는데, 나는 모르지만 아버지나 형들은 건더기라곤 아무것도 없는 된장국만 마시고 점심을 건너 뛴 적도 있던 모양이다. 된장을 많이 넣는 것도 아까워 두어 숟갈 넣고 물은 몇 사발 퍼다 넣어 끓이는 모양인데, 그냥 먹기 어려울 때는 질경이나 쑥, 앞서 적은 배추 겉잎, 산나물 같은 걸 데쳐 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된장국이 아니라 질경이국이나 쑥국이 되는데, 나도 많이 먹어본 음식이다.

 

된장만 풀어 국을 끓이는 건 몇년 전 단식을 할 때 먹어보았는데 꿀맛이 따로 없었다. 된장만 넣어 끓인 국이 그렇게 달콤한 줄 그제야 알았다. 아마 맛있어서 맛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옛날 입맛이라 뇌가 반갑다고 그렇게 반응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콩 20가마로 일년을 버티곤 했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그래서 그 솜씨로 '약선장'이라는 된장을 만드시는데, 어머니 연세가 팔순이고, 시골에는 혼자만 사셔서 사실상 영업이 불가능해 제대로 하고 있지는 못하다. 약간의 단골, 지나가는 손님, 그리고 형제들이 친구들이나 사업상 파트너들에게 선물 돌릴 일이 있으면 가져가곤 하는 게 전부다.

 

이렇게 살아온 우리 형제인만큼 사철 내내 먹을거리를 현장에서 조달하는 일이 많았다. 봄철이면 먹을거리가 지천인 줄 알았다. 쑥, 싱아, 찔레순, 맹가, 떡갈같은 주전부리부터 취, 고사리 같은 나물은 거의 주식 수준이었다. 형들이 잔대, 산도라지, 더덕 같은 걸 캐다 된장에 박아 먹거나 된장을 찍어 먹었다. 여름이면 농삿일이 바빠 고생을 하는데 가장 배고픈 계절이었던 듯하다. 너무 배 고프면 제대로 실을 리 없는 고구마 이랑을 더듬어 몇 개씩 빼다 쪄먹거나 미국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를 아껴 빵을 찌어먹었던 것같다. 가을이면 아침마다 이웃집 친구들보다 더 먼저 일어나 감나무를 찾아다니며 홍시가 떨어진 걸 주워다 식구들이 함께 나눠먹었다. 그러면 아침밥을 덜 먹으니 보리쌀을 아낄 수 있다. 이 무렵 어머니는 무릇 뿌리를 캐다 고아 먹었다. 어머니를 따라 밭둑에서 하루 종일 무릇을 캔 기억도 있다. 단맛이 나는 무릇은 구황식품의 하나다.<무릇이란?>

 

우리 감나무는 울안에 작은 게 몇 그루가 있고, 새앙골이라는 곳에 한 그루, 원두골이라는 곳에 두 그루가 있었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사나운 뒷골할머니네 감나무 밭에 몰래 들어가 홍시를 주워야 하는데, 거긴 거기대로 아침마다 감시를 나오곤 해서 그보다 먼저 가서 얼른 줍고 튀어야만 했다.

 

이즈음이면 산밤을 따러 이 골 저 골 돌아다녔다. 집밤나무가 없으니 산밤이라도 따야 보리밥에 넣어먹고, 차례도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너나없이 가난할 때라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우리 동네 산에 와서 산밤을 해가곤 했다. 그러면 나는 선생님들한테 징발당해 하루 종일 산을 헤매고 다녔다. 당시 당숙네 밤나무 한 그루가 앞산 중턱에 있었는데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쩌다 당숙 몰래 그 밤을줍기라도 하면 하늘을 나는 것처럼 행복했다. 잡초 속에 떨어져 있는 그 윤기나는 밤빛깔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가을철이면 발빠르고 부지런한 형들 덕분에 버섯국을 많이 먹었는데, 그중 하도 자주 먹어 늘 생각나는 게 싸리버섯이다. 형들이 배낭 짊어지고 가 주워오는 도토리 덕분에 묵도 실컷 먹었다. 감 대신 산에 가서 고욤을 따다 재워뒀다가 겨울에 먹었다.

 

무릇, 홍시, 버섯, 고욤, 도토리묵, 보리밥, 된장, 고구마 많이 먹으면 요즘은 웰빙이라고 부러워하겠지만 그 때 그 시절에는 가난의 상징이었다.

 

적다보니 한이 없다. 이미 다른 제목으로 적은 게 있으니 그걸로 떠넘기고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당진 가는 길에' 보기>

 

이번 추석 성묘길에는 제철을 맞아 땅에 떨어진 밤이 어찌나 많은지 도저히 주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 묘소가 있는 산에는 집안 형이 심은 밤나무 농장이 있는데, 거긴 밤을 가마니째 뿌려 놓은 듯이 많았다. 그 형 가족이 나서서 밤을 줍는데 다들 허리 아프다면서 힘들어했다. 옛날 같았으면 우리 형제들이 와르르 달려들어 허리가 끊어질망정 알뜰하게 주울 텐데 지금은 다들 시큰둥하다. 밤 줍는 인건비가 밤값보다 더 비싸다고 한다. 하지만 밤에 대한 안타까운 추억이 있는 우리 형제들은 밤을 보면 "아이고, 저거, 저거." 이렇게 감탄이라도 하면서 지나가는데 철모르는 조카들은 완전히 '생까면서' 지나간다. 알밤이라고 주워 건네봐야 한두 개 받으면 그만, 욕심이 없다. 까먹기도 귀찮고, 별로 맛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모양이다. 옛날에는 낮에 산밤을 주우면 밤새 밤줍는 꿈을 꾸곤 했는데, 요즘에는 산에 지천으로 널린 밤을 보아도 꿈에 나오지 않는다.

 

10여년 전부터는, 우리 형제들이 늦여름, 초가을 간식으로 매일같이 먹어대던 감조차 인기가 시들해져 따가는 이들이 없어 거의 까치밥으로 내던져지곤한다. 이맘 때면 머루, 다래, 으름을 서로 먼저 따먹으려고 부지런떨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아무 골짜기고 들어가기만 하면 지천이다. 추석날 오후 온가족이 깊은 골짜기 하나를 골라 들이닥쳤는데, 으름이 어찌나 많은지 놀랐다. 집집마다 노인 한 분씩 밖에 살지 않는 마을이니 산과일을 따갈 경쟁자가 없다. 이번 추석은 철이 약간 늦어서 그렇지 제때 갔더라면 으름이 너무 많아 아마 지쳤을지도 모르겠다. 나무그늘마다 떨어진 으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무슨 복을 누리는지 벼가 풍년이어도 쌀값 폭락으로 걱정이고, 감이 풍년이어도 딸 사람이 없어 동지섣달 눈이 내리도록 내버려두고, 배추고, 무고 다 풍년이건만 기뻐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옛날 추석이란 풍년을 자축하고, 추수를 감사하고, 이웃과 수확을 나눈다고들 했는데 지금 '추수감사'의 의미는 거의 사라진 듯하다. 어려서는 남의 집, 특히 부잣집에 가 음식 얻어먹는 게 추석의 기쁨이었는데, 이젠 남의 집 송편, 술 한 모금조차 얻어먹는 일이 없다. 우리집은 추석 전날 저녁 마당에서 목삼겹살을 사다 가족들이 함께 구워먹었다. 애들이 전이나 송편 같은 시절 음식은 쳐다보지 않고 고기 구워먹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옛날 같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길가 집인 우리 마당에서 우리끼리만 삼겹살을 구워먹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누가 지나가도 음식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 좋은 세상'에 살면서, 풍년이란 어휘가 무슨 재난 용어가 되어가는 듯한 시대를 맞으니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 아득하다.

형제들과 이웃 친구들이 마당 잔디밭에 모여 앉아 진로 참이슬 소주를 먹으면서, 벼가 익어가는 논을 갈아엎는 농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다들 어려운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라 목소리만 비분강개지 막상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논 갈아엎는 건 죽일놈이라고 하지만, 막상 쌀 20킬로그램에 3만원받기도 벅차다는 말에는 다들 입을 열지 못한다. 쌀이 얼마나 귀한지, 얼마나 우리 형제를 주눅들게 하고 가난하게 만든 물건인지, 쌀 앞에 고개 숙이고 무릎 꿇으며 어린 시절을 살아온 우리 형제는 특히 그렇다. 오래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는 표현이 이런 때 쓰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철수니 반미니 하는 정치 얘기로 옮겨가면서 어려서 미국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나 우유, 분유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한탄하기도 했다. 전후 세대인 우리 형제가 그나마 키가 172센티에서 180센티까지 되는 것은 그때 줄서서 얻어먹은 우유죽이나 빵, 밀가루 덕분이다. 그걸 생각하면 미국인들에게 감사해도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감사해야만 할 것같은 우리 세대는 참으로 할 말이 없다. 북녘의 조선 청년들은 하도 못먹어서 키가 160센티가 안되는 이들이 부지기수라는데, 풍년이라고 해서 화내고 짜증내고 논밭 갈아엎는 이 시대 풍속이 뒷날 어떻게 논의가 될지 두렵다.

 

풍년, 그래도 벼가 잘 익어가는 논배미를 보면, 곡식이 잘 여무는 밭을 보면 아직도 내 유년의 기억은 부러움에 흐느낀다.


- 나 어릴 적에는 나락이 이렇게 잘 익으면 농부들이 풍물 치며 기뻐했는데, 요즘에는 이마에 붉은띠 질끈 동여매고 꽹과리치며 거리로 나선다. 풍년이 재안인 세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