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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유행어 '루저'를 보는 다른 시각

요즘 루저란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한동안 엣지녀란 말이 떠돌더니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 자리를 루저가 차지한 듯하다. 설명을 들으니 한 여대생이 180센티미터는 되는 남자라야 한다면서 그 아래를 루저란 영어로 말한 모양이다. 영어가 짧아 나는 처음 듣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실패자라는 뜻이다.

 

난 사실 성격이 까칠해 으레 쓰던 말도 유행어가 돼버리면 절대로 안쓰는 사람이다. 내 귀에서 유행어는 천박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기 때문에 저절로 통제가 된다.(나이 먹으니까 대책없이 솔직해지는 것같다. 그래야 편하니까.) 전에 신문소설 연재할 때 조선시대 대화법의 하나로 '뭐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데 그뒤 보니 사극마다 이 어휘를 쓴다. '뭐라고?'를 좀 건방지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을까 찾다가 한번 써본 건데 죄다 따라쓰길래 난 그뒤로 절대 안쓴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그 여대생은 그날 뭘 잘못 먹고 실수한 듯하다. 할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하는데, 루저란 영어 어휘까지 끌어온 것은 좀 괘씸하다. 구성작가가 어린애 꾀어 재미있으라고, 튀라고 시켰는지도 모른다. 요즘 연예인 잔소리 프로그램에 그런 '의도적인 실수'가 자꾸 나오고, 그 실수를 재생산해 되파는 꼼수가 빈번하잖은가.

그래도 결국 어린애 실수인데 어른들까지 나서서 나무라긴 좀 그렇고, 다른 방향에서 해석해보자.

 

이 글을 쓸 마음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늘 잠시 쉬는데 집사람이 틀어놓은 문화방송에서 그 발언을 한 여대생의 대학에 찾아가 "아느냐, 봤느냐?" 수소문하고, 친구들한테 소감 묻고, 이런저런 잡스런 인터뷰를 해서 내보내는 걸 보았다. 프로그램 뒤에는 광고가 붙었다. 불쌍한 여대생이 저 상업주의 하이에나들에게 물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뉴스거리가 없으면 드라마 줄거리 요약해 기사쓰는 기자들이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드라마 하나 인기 있는 게 생기면 끝날 때까지 줄거리 따라가며 기사를 써댄다. 기자 굴종의 시대다. 이런 탓에 얼마 전 김혜수라는 여배우가 드라마에서 한 말을 흉내내 '엣지있게'라는 유행어를 이 기자들이 작당을 하고 퍼뜨려 온갖 데서 다 들려왔다.

 

아마도 이번 루저 발언도 방송 보며 기사쓰고, 인터넷 보며 기사 쓰는 한가한 기자(이런 기자놈들을 가리키는 말을 새로 지어냈으면 좋겠는데...)들이 만들어낸 보도용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라고 나는 보는데 기자들이 물어뜯어 상처를 내고, 거기 소금을 더  뿌려 그야말로 광고 끼워 팔 수 있는 기사로 그럴 듯하게 요리해낸 것이다.

 

방송이나 언론에 노출되는 사람은 자나깨나 이런 기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기자들은 도둑놈처럼 남의 집에 들어가 기삿거리 없나 기웃거리고, 사기꾼처럼 헤헤거리며 호의로 다가와 가지고는 서너 시간 떠들게 해놓고 거기서 제 입맛에 맞는 것만 발라내 보도하는 소인배들이다.

 

그런데 이런 소인배 기자들이 활개를 치도록 도와주는 게 인터넷을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유행어라는 게 우리나라만 있는 게 아니고 나라마다 다 있는 현상인데, 우리나라는 좀 별나다. 쓰는 놈도 일년 지나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해괴한 말을 지어내 조금 있다 핸드폰 바꾸듯이 쓰다 버린다. 인터넷 자료 찾다가 가끔 이런 쓰레기 글을 접할 때가 있는데 몇 달만 지나도 생명력이 시들해서 글 읽자면 마른 낙엽더미를 밟는 것같다.

 

아다시피 조선시대 후기에 적은 한글 문학 작품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그 시대 말로 또박또박 적은 것도 훗날 보면 이렇게 난해해진다. 더 가까이 와도 마찬가지다. 일제 때 작품을 봐도 어색하다. 30년 전 작품을 읽어봐도 어딘지 모르게 낯선 게 많다. '대한뉘우스'나 전두환 합수부장이 텔레비전에 나와 말하던 걸 요즘 자료 화면으로 보면 정말 웃음이 나와 못견딘다. 굳이 유행어 쓸 것도 없다.

 

얼마 전 중국동포가 번역한 중국 명저 한 권을 읽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나름대로 한국어 표준말을 잘 구사한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번역한 글인데, 출판사에서 손질까지 한 건데도 도무지 신경이 쓰여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동시대에 살아도 공간이 다르면 이렇게 어렵다.

 

우리가 표준말을 써야 하는 것은, 서로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고, 문화유산을 먼 후손들에게 똑바로 전하기 위해서다. 표준말로 또박또박 쓴 글이어야 천년의 생명을 얻는다. 말과 글은 약속대로 써야 한다. 혼잣말할 거면 일기에 쓰면 된다

이상한 유행어 쓰고 속어 쓰는 것은 간첩들끼리 쓰는 난수표나 암호같은 것이다. 향가처럼 후손들더러 해독하라고 시킬 것인가?

 

루저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언론, 방송에서 무차별적으로 쓰이는 것은, 마치 정부에서 새로운 개념을 발표할 때마다 그 용어를 영어로 짓는 행태하고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빼빼로데이를 우리 식으로 바꾼답시고 농수산부인가 하는 데서 '가래떡데이'라고 하잔단 보도를 보고 한참 웃었다. 그런 것들이 나랏말 쥐고 행정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금연광고하면서 누가 옆에서 담배 피우면 '세이노'라고 말하라고 대대적으로 떠드는 걸 보았다. 이런 수준에서 사실 누굴 특정해 나무라기가 어렵다. 다 같이 반성할 일이다. 어린 여학생 잡으러 다니는 짓 안하면 밥 못먹고 사는가. 여학생 찾아 대학이나 헤매는 기자놈들이며 카메라 들도 뒤따라다니는 피디놈들이나, 그거 잘 찍었느냐고 묻는 그 방송 책임자나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을 텐데 부끄러운 줄을 좀 알아야 한다.

 

요즘 글을 쓸 때 잔소리가 자꾸 느는 것같은데, 이거 나이 먹어가는 현상 아닌가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 방송에서 어떤 여자 탤런트가 '자장면보다 짬뽕 좋아하면 나이 든 증거'라고 하는 말에서 화들짝 놀랐는데, 나 짬뽕 좋아하는데, 그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