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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사람들/선시(禪詩) 감상실

[스크랩] 승조(僧肇)가 유유민(劉遺民)에게

편지 서늘한 바람이 부는 계절입니다. 요즘 일상은 어떠하신지요.

 

서로 있는 곳이 아득히 멀어도 마음이 하나면 바로 이웃입니다. 혜원 법사께서 건강하시다는 말씀 들으니 큰 위로가 됩니다. 비록 곁에서 모시지는 못했지만 높으신 뜻과 가르침 마음속에 간직한지 오래입니다.

 

이곳 대중들도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구마라집 법사께서도 여여하십니다. 스승께서는 요즘 근본율장의 번역에 힘쓰고 계십니다. 소승은 외람되게도 이런 아름다운 운수에 참예하고 성대한 교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대와 함께 이 법회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여산으로) 가는 편에 『유마경』 주해 한 본 보냅니다. 스승의 말씀을 제가 기록한 것입니다. 비록 표현은 매끄럽지 못할지라도 그 의미는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말과 자취가 끊긴 지극한 이치는 텅 비고 현묘하여 이를 헤아리면 벌써 그 이치와 어긋납니다. 만남을 기약하지 못하오나 길을 왕래하는 사람이 있거든 소식이나 받들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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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초선왕의 후예로 현령의 자리를 버리고 여산혜원의 제자가 된 유유민(劉遺民). 제자백가의 사상에 능통하고 시(詩)와 문(文)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스승 혜원을 도와 백련결사를 실제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유유민이 승조(僧肇, 384~414)의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알게 된 것은 막역한 벗 도생에 의해서다. 구마라집의 제자이기도 했던 도생이 이 책을 가지고 여산으로 온 것이다. 유유민은 이를 보고 탄복했다. 스승 혜원도 “이런 책은 일찍이 없었다”며 탄성을 자아냈다. 대승의 공(空) 사상을 탁월하게 설명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이 책을 몇 번이나 탐독한 유유민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제자의 예로써 승조에게 물었고, 당시 장안에 머물고 있던 승조도 이에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평소 혜원법사를 존경하고 있었으며 유유민의 얘기도 많이 들었다는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대승의 공사상에 대한 심오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무지론」을 비롯한 승조의 사상은 수많은 선어록에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노장의 언어로 불교를 설명했던 격의불교를 종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에도 큰 영향을 줘 원효는 승조의 사상에 근거해 『대승육정참회문』을 저술하기도 한다.

 

희대의 천재 승조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책을 필사하는 일로 직업을 삼았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고전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특히 노장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구역 『유마힐경』을 읽고 “내 이제야 비로소 갈 길을 찾았다”며 출가자의 길을 선택했다. 구마라집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된 승조는 곧 경율론 삼장에 통달했다고 『고승전』은 전한다.

 

그러나 승조는 불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황제가 젊은 나이에 반야에 통달한 그를 등용하고자 수차례 불렀으나 승조는 한사코 벼슬길을 거부했다. 이에 황제의 명을 어긴 죄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 승조는 일주일의 시간을 얻어 『보장론(寶藏論)』을 완성한 후 짧은 임종게를 남긴 채 하얀 칼날 앞에 스러져갔다.

 

‘사대(四大)란 애초 주인이 없는 것이요, 오음은 본디 공한데
하얀 칼날로 목을 치는 것쯤이야 한낱 봄바람을 베는 것 같지 않으리오.’

 

짧지만 활화산 같은 삶을 살았던 비운의 천재 승조. 그는 갔지만 그의 저작들은 아직도 수많은 지식인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출처 : 忍土에서 淨土로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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