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뛰어난'이란 이름을 가진 천안 사람 박문수(朴文秀)는 이름과는 달리 서른두 살이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간절한 마음에 경기도 안성 칠장사까지 가서 합격 기원 기도를 드리는데 나한전 나한이 꿈에 나타나 시 일곱 행을 불러주었다. 그러면서 마지막 행은 알아서 지으라고 하고는 나한은 사라지고,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백일장을 열어 시 잘 지으면 관리로 뽑는 픙습이 있었는데,(시책 등 다른 문제도 있지만 문장 짓는 건 주요 과목이었다.) 박문수가 과장에 가 시제를 보니 딱 나한이 알려준 그대로였다. 말하자면 석양, 기러기, 나그네, 스님이란 글자를 넣어 시를 지어라, 이런 식의 문제가 난 것이다. 박문수는 꿈에 본 시 7행에 1행을 덧붙여 제출했다. 그게 바로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요, 박문수를 장원으로 뽑히게 만든 시다. 감상해보자. 다른 번역이 마음에 안들어 내가 한문시보며 다듬었다.
붉은빛 토하는 석양은 푸른 산에 걸리고
차디찬 흰 구름 사이로 갈까마귀 줄지어 날아간다.
나루 찾는 나그네 목소리 다급해지고
산사로 돌아가는 동냥승도 부지런히 지팡이 놀린다.
풀 뜯는 소 그림자 길게 눕고
남편 기다리는 아낙은 댓돌에 서서 쪽진 머리 떨군다.
저녁 연기 파랗게 남쪽마을로 피어오르고
나뭇짐 진 총각은 풀피리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落照吐紅掛碧山
寒鴉尺盡白雲間
問津行客鞭應急
尋寺歸僧杖不閒
放牧園中牛帶影
望夫臺上妾低鬟
蒼煙古木溪南里
短髮樵童弄苖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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