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법식(法識) 스님이 와서 당신께서 본국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전에 당신께서 여러 경전을 번역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곧바로 자문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니 한스럽고 슬플 따름입니다. 갑작스럽지만 수십 개의 질문을 드리오니 바라옵건대 시간이 난다면 하나하나 해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질문들은 비록 경전에 나오는 큰 논란거리는 아니지만 스님께서 판가름해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세월이 유유히 흘러갑니다. 연말 쯤 한번 뵙기를 간절히 기약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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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혜원(慧遠, 334~416)은 중국 정토종의 개조이며 결사운동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여산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장본인이다. 또 ‘사문은 지배자인 왕에게 예경을 올릴 필요가 없다’는 그 유명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천명함으로써 국가권력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주창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반야심경』를 접한 후 유생의 길을 접고 출가자의 길은 선택한 혜원은 스승 도안이 “중국불교의 앞날은 저 사람 혜원에게 있을 뿐”이라고 예언했듯 중국불교의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전란을 피해 여산에 자리 잡은 후 입적할 때까지 33년 간 단 한 번도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지만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 일컬어지는 도연명이나 유유민 등이 제자로 귀의할 정도로 중국 사상계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이런 그가 구마라집(Kumarajiva, 344~413)에게 대승불교의 본질을 묻는 서신을 띄운다. 불세출의 선지식이라는 구마라집이 그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인 쿠차(Kucha) 출신으로 인도 대승불교를 중국에 이식한 불교사상가이며, 『반야경』, 『유마경』, 『아미타경』, 『대지도론』, 『중론』 등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기본경전 300여 권을 한문으로 옮긴 대역경가이기도 하다.
혜원의 편지를 받았을 때 구마라집은 장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숱한 인간의 탐욕과 어둠을 지켜봐야 했던 구마라집은 그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후진의 왕 요흥의 지원으로 경전 번역에 혼신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 구마라집은 이렇듯 바쁜 가운데 편지를 받았지만 혜원이 묻고 있는 중관, 유식, 정토, 염불 등과 관련된 수십 가지 질문에 대해 몇 차례의 서신으로 상세하고 완전한 답변을 하고 있다.
어쩌면 구마라집은 혜원에게서 중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에서 입적한 비운의 거장 구마라집. 또 만년까지 “굳센 뜻을 세우고 잠을 줄이며 도를 탐구하던 옛일을 생각하니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이제 입정하여 밤을 새우며 불법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겠다”고 다짐하며 죽는 날까지 수행과 계율을 엄수했던 혜원.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던 구마라집은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자신의 절망을 경전불교의 완성을 통해 극복한 천재였다면, 혜원은 일생 동안 긴 호흡의 수행력과 교육 정신으로 우수한 교단을 육성함으로써 중국불교의 거대한 전통을 만들어간 대승불교의 사표라 할 수 있다.
삶의 이력은 비록 크게 달랐지만 한 시대를 참으로 치열하게 살다 간 두 사람.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는 현재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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