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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어머니의 두 얼굴

태풍 곤파스가 지나가면서 고추밭에 탄저병이 번졌다.

81세 노구로 농약을 치진 못하고, 모처럼 자식들이 모였지만 벌초하고 나서는 다들 지쳐 떨어지니 발만 동동 구르신다.

- 고춘 사먹읍시다.

이러곤 발랑 누워 낮잠을 잔다.

 

이날은 기온이 33도가 넘고 습도가 높아 예초기 지고 벌초하는데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힘좋은 동생도 혀를 내밀고, 형도 지쳐 말이 없다.

노동이라곤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지라 더욱 헉헉거리며 일을 끝냈으니 다른 덴 돌아볼 여유가 없다. 형제들은 샤워하자마자 쓰러지기 바쁘다.

 

겨우 기력을 차린 뒤 밭에 나가 봄에 심어둔 감초, 산수유, 호두 같은 묘목을 보니 잡초에 밀려 잘 자라지 못했다. 꾸지뽕나무만은 홀로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역시 야생성이 강한 놈들은 칡넝쿨이 기어올라와도 맞서 싸울 줄 안다.

은행나무를 살펴보니 주렁주렁 잘도 열렸다. 태풍이 지나가도 끄떡 없다. 지구가 망해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나무가 은행나무일 거라고, 감동받은 막내가 말한다.

은행 열린 걸 보니 기분 굿이다. 어머니는 아무도 농약 안쳐주니 고추 썩는다고 야단이다. 그래도 자식들 주겠다고 호박순 따고 오이 따신다. 모른 척하고 카메라메고 둘러본다. 

- 어머니 집 담장에 열린 으름. 지난 봄에 꽃을 찍어 올린 게 있다. 

- 기분 좋아, 정말 좋아. 우리 조카 동규 명원이 먹일 생각하니 흐뭇하다. 열매가 참 굵기도 하지. 

- 꾸지뽕나무, 참 무성하게 자란다. 늦가을에 잎을 따 차를 마셔야지. 잎을 뜯어보니 하얀 진액이 흘러나온다.

- 아침이면 우리 형제들 세수하던 자리. 육촌형 '홍'이 다슬기를 잡고 있다. 삿갓 위 약간 왼쪽으로 보이는 나무가 은행나무인데, 여기도 열매가 장관이다.

- 곤파스 때문에 길 쪽으로 누워버린 맨드라미. 쉬었다 가세요, 이러는 거 같다. 

- 가을을 알리는 과꽃이 피었네. 

- 뒷집 재청이네 돌절구에 뿌리내린 검은 연꽃이 살짝 잎을 벌렸다. 너도 속살은 붉구나.

- 아버지가 20년 전쯤 심은 은행나무가 이렇게 자랐다. 수컷이라 열매를 맺지 못한다. 

- 어머니가 기르는 붉은 팥이 노란꽃을 피웠다. 예쁘기도 하지. 누가 보는 이도 없는데 너는 어쩌면 그렇게 예쁘게 피어 있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