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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이기는 백과사전

강하면 부러지고 부드러우면 끊어진다

강하면 부러지고 부드러우면 끊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이기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근육을 기르고 주먹을 단련한다. 과연 그럴까. 
이 말이 옳다면 로마가 왜 망하고 진나라가 왜 망하고, 몽골이 세운 세계제국 원나라가 왜 망했겠는가.
강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들 세계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너무 강해서 망했다.


지나치게 강하면 반드시 부러진다. 강한 것은 그 강함 때문에 부러진다. 변화에 대응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고, 변화의 물결을 보고도 몸이 무겁고 걸음이 느려 대응 기회를 놓친다.


코끼리는 육식성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뜀박질 대신 덩치를 키워나갔다. 어떤 포식자도 다 자란 코끼리를 잡아먹지 못한다. 하지만 이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풀을 쉬지 않고 먹어야 하며, 정말 빨리 달려야 할 때도 느리게 걷다가 동물원으로 잡혀가거나 공원에 갇혀 지내거나 인간의 노예로 살아간다. 사자는 발톱을 기르고 이빨을 날카롭게 갈아 백수의 왕이 되었다. 초원의 어떤 동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사자 역시 동물원으로 끌려가거나 공원에 갇혀버렸다. 더러 사냥에 실패한 사자는 싱싱한 풀과 풍성한 과일이 있는 곳에서 굶어죽기도 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이기붕, 차지철이 비명에 간 이유도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총탄이 살을 찢으며 뚫고 들어올 때가 돼서야 겨우 알아차린다. 밥을 먹어도 좀 더 먹고 싶다는 마음이 날 때 숟가락을 놓아야 하는 법인데, 이들은 체하도록 권력을 독점하다 그 권력에 죽었다. 거의 모든 정권의 실세들이 임기 끝나는대로 교도소를 단골 방문하는 것도 이런 이치다.

정치나 역사를 공부하지 않다가 우연한 기회를 만나 어느 날 갑자기 입신한 정치인 중에는 태생이 그러한 것처럼 강철뼈다귀라도 되는 양 뻣뻣하게 굴다가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인자란 이들이 대개 그렇게 인생을 마감한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된 것처럼 대기업 2세들도 이런 착각에서 잘 벗어나지 못한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훌륭한 유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만, 태어나자마자 세자였던 왕들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자(天子)인 줄 착각하여 국정을 그르치기 일쑤다.

 

한편 이길 자신이 없을 때 차선책은 무엇인가. 두 말 할 것없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야 싸울 기회를 한번이라도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강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드러워지고, 순응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 말이 옳다면 순순히 왕위에서 물러난 단종은 왜 죽임을 당하고 항복한 군사들은 노예로 팔려갔을까.


그렇다. 가치가 없을 때는 도태된다. 항복하더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어야 살아남는다.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이익 가치가 위험 가치보다 높아야 살아남는다. 한신이 바짓가랭이 사이를 기어가도 살아남은 것은 그에게 능력이 남아 있기 때문이며, 간첩이 자수해도 살아남는 것은 그에게 정보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사(戰史)에 나오는, 전쟁터에서 귀순하거나 항복하고도 사살된 사람들은 최소한의 목숨을 보장받을 가치를 쥐고 있지 못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에 너무 순응한 선인장은 정작 물이 넉넉한 환경에서는 이 물 때문에 죽는다. 추운 데서 살아남기 위해 바늘잎을 가진 침엽수는 더위에 지치고, 더운 데서 살아남기 위해 넓은 잎을 가진 활엽수는 추운 데서 힘겨워한다. 자연에서 이렇게 정체성을 송두리째 내버리고 진화한 동식물은 작은 환경변화에도 멸종 위험에 겪게 된다.


강하지도 못하면서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거나, 부드럽지 않으면서 오직 강하기만 한 것은 나쁘다. 강한 사람에게는 부드러움이 또다른 무기이며,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강한 것이 또다른 무기이다. 인류는 태양이 작렬하는 저 적도에서 동토의 북극에 이르기까지, 섬에서 고산까지, 메마른 사막에서 몬순의 열대우림까지 어떤 환경에도 무릅쓰고 살아남았다. 강하면서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 강한 것, 이것이 바로 인류가 역경을 극복하거나 위기에서 살아남은 지혜다.


- 청와대 사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