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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스크랩] 100년 전, 조선은 왜 망했나?

100년전 나라 빼앗긴 근본원인은?

행 박사(한몸사회포럼 대표, 전 농림부장관)

 

  두 팔을 뒤로 묶어 무릎을 꿇려놓고 날카로운 일본도로 목을 치는 잔인무도한 처형, 총검으로 순진한 아낙네의 가슴을 찌르고, 어린아이마저 던져놓고 칼로 찔러대며, 작두로 목을 잘라내고, 수장으로 화장으로 처형하는 것도 모자라 집단 생매장까지 시키는 천인공노할 일제 만행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뛰고 분노가 치밀어 이성을 잃게 된다. 100년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 선조가 겪은 비극이었다.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삶의 터전을 잃게 되면 그것은 곧 죽음과 직결된다. 그런 삶의 터전인 국토를, 나라를 왜 일본에게 빼앗겼는가?

  일본이 서구의 새로운 산업사회를 우리보다 먼저 받아들여 강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청나라나 러시아, 미국이나 영국 등 주변국과 세계 강대국들이 우리나라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것도 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못한다.

  이유는 우리나라가 약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정세에 무지한 나머지 새로운 문명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지배층의 분열과 갈등, 외침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화근이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 네 척을 이끌고 일본을 강제로 개국시키려 들어갔을 때 일본 지도자들은 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협상을 지연시키면서 154명의 시찰단을 구성하여 압력을 가하는 서구로 보내 발전된 그들의 문명사회를 속속들이 파악하는 치밀함을 보일 때,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1866년 7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과 배를 모두 불태우게 했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군함 7대와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온 프랑스 군대마저 이야기도 들어보기 전에 무력으로 몰아냈다.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1871년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로 재차 들어온 미군에 대해 조선 조정은 ‘화의를 말하면 매국의 죄로 다스리겠다.’는 강한 자세로 백성들의 단합을 외치면서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세를 더욱 굳게 하자, 미군도 할 수 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이를 신미년에 있었던 서양 오랑캐의 난리라고 하여 신미양요(辛未洋擾)라 부른다. 우리나라에 개방의 기회가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일본이 1867년 명치유신을 내세워 40여년의 산업화를 통해 부국강병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가까운 우리나라에선 일본의 급속한 발전에는 눈과 귀를 막고 무감각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은 내부 분열과 파쟁으로 날 새는 줄을 모르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1895년 3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청나라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황장(李鴻章)과 일본측 강화회담의 주역인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조선의 독립, 랴오둥 반도∙타이완∙펑후 열도 할양, 배상금 2억냥’ 등의 요구를 관철시킬 때 우리 지도자들은 ‘조선의 독립’이 청국의 세력권에서 떼어내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수순이라는 음모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1902년 1월 영국의 외무장관 사저였던 보우드 하우스에서 찰스 랜스다운 장관과 일본의 하야시 주영공사가 동맹을 체결하고 ‘영국은 청나라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이익을 침해당하면 필요불가결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상의 영토분할을 밀약, 영국과 손을 잡고 조선을 압박하는 일본의 행보를 우리 지도자들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1905년 7월 27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국무장관 대리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가쓰라 총리와 맺은 밀약을 승인하였다. 그해 9월엔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열린 러시아와 일본 대표단의 평화협상에서 두 나라의 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와 군사 및 경제상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지도 보호할 수 있는 권리까지 허용하고 말았는데도 우리 지도자들은 미국을 짝사랑하며 조∙미수호통상조약만 안이하게 믿고 있었다.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기사의 집’에서 44개국 대표 256명이 참석한 제2차 헤이그만국평화회의가 열렸는데, 고종의 밀사 3명(이상설∙이준∙이위종)은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란 이유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밀려났다. “을사늑약은 무효다”라고 위치면서 ‘길거리 외교’를 하다가 이준은 분함을 참지 못해 스스로 자결하고 만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본에 의해 불법으로 강제병합을 당하고 국권을 잃었다.

   이처럼 조선은 하루아침에 망한 것이 아니다. 서구 열강들의 개항노크로부터 두 세대 이후 멸망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외부 세계변화에 대한 무지와 통찰력 부재,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아무런 준비조차 없이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열강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우리 주변에서 패권싸움을 벌이며 우리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 및 러시아의 연합된 대륙세력과 미국 및 일본의 연합된 해양세력이 한반도에서 충돌할 수도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우리는 남북으로 갈린 것도 모자라 떠오르는 중국의 힘을 등에 업은 북한은 연평해전을 연거푸 일으키고 천안함을 폭침시키는 등 긴장을 고조시킨다.  

 

  남한 내부의 우리 지도자들은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서로 반목하며 외부세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내부의 단결과 준비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과연 100년전의 뼈아픈 국치(國恥)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출처 : 용인타임스
글쓴이 : 개마고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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