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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스크랩] 사이버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사이버 세계의 탄생과 무아

- 허신행 박사(전농림수산부 장관, 한몸사회 포럼 대표)

 

컴퓨터가 계속해서 진화되고, 이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생긴 전자공간을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윌리암 깁슨William Gibson(1948∼ )의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서 컴퓨터의 세계와 이들을 둘러싼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추상적인 공간의 의미로 사용한 말이었는데, 오늘날 실제 이런 가상공간이 세계적인 규모로 생겨난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이 확산되던 초기에 사이버­스페이스란 생소한 용어가 쓰이기 시작할 때, 필자는 직감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사이버­월드Cyber-World 내지 사이버­소사이어티Cyber­Society가 열리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앞에서도 진화의 긴 여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디지털 인터넷 신경망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상은 완전한 하나의 다른 세계, 즉 월드인 셈이다. 이것은 가상의 공간 정도가 아니다. 현상세계가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하다 하더라도, 인터넷의 가상공간만큼 다양하고 많은 정보와 볼거리가 제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상공간 또는 인공공간이라고 불리는 사이버-스페이스는 ‘클릭’ 한번이면 세상 모든 것이 실제처럼 나타나 전개되는 곳이다. 고로, 여기에서는 ‘사이버 세계’로 일반화시키고자 한다.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등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다 향유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사이버 세계인 셈이다. 홈 쇼핑, 홈 뱅킹, 재택수업, 재택근무, 안방극장, 가정 오락실 등 인간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이 이루어지는 재미있는 세상이 안방에 도래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대부분 획득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들을 대부분 수행할 수 있으며, 원하는 것들을 대부분 이룰 수 있는 꿈의 세계가 바로 사이버 세계의 진화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안방의 컴퓨터나 휴대용 소형 PC 또는 휴대폰 등을 통해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일간신문(동아일보, 1997년 11월 8일자)에서는 벌써 ‘디지털 문화’를 논의하고 ‘실재는 없고, 광속만이 흐른다’는 제목 아래 기술한 내용들은 매우 흥미롭다. 디지털, 0과 1의 조화만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빚어내는 이 시대의 주술呪術, 디지털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상의 공간,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컴퓨터, 꿈의 속도였던 광속光速이 안방까지 연결된 광케이블로 실현되면서 디지털 인터넷 신경망은 광속 만큼이나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메가(초당 1백만 회)에서 기가(초당 10억 회)로 확장된 컴퓨터의 연산처리 능력은 이제 테라(초당 1천억 회)의 시대로 진화된다. 그리고 더 빠른 진화는 끝없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분간할 수 없는 무한에 가까운 전자 음계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환상적인 시뮬레이션은 인간의 정교한 미술감각보다 앞서고, 영화 ‘쥐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동물들의 컴퓨터 그래픽은 인간의 눈감각을 앞지르고 있다. 사진이란 예술행위도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 재생산되는 파일의 형태로 변해간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선비들의 육필肉筆 원고가 컴퓨터의 키보드에 밀려났고, 금속활자는 디스켓으로 대체되었으며, 작가와 출판인의 만남은 파일전송으로 이루어지고, 출판부수는 네티즌들의 조회횟수로 바뀌어간다.


수만 군중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포효하던 정치인들은 덩그러니 놓인 컴퓨터 앞에서 디지털 카메라와 음성입력 장치를 통해 보이지 않는 차안此岸의 네티즌들에게 정책적인 비전과 자신들의 실천방안을 제시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청강생들에게 멀티미디어를 통해 생생한 강의를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 대학교수들의 활동공간 역시 무한대로 넓어진다.


가상 공간상에서 갖는 오랜 동창 간의 모임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채팅, 실전實戰을 방불케 하는 비디오 게임 등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가 바로 디지털 문화요, 사이버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이버 세계는 어떤 세상인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사이버’란 용어 자체는 인공人工이요, 가상假想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사이버-스페이스’를 가리켜 ‘가상 공간’이라 번역하여 쓰는 데 누구도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어느 신문 지상에서는 ‘사이버 속의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논제를 놓고 찬·반토론까지 벌이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우리 모두 다 함께 생각해보자.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는 현상계를 실재라고 생각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쌍안경을 눈에 대고 보는 현상계는 실재가 아닐까?


우리들의 눈으로 직접 보는 달이나 태양은 실재이고, 망원경으로 보는 달이나 태양은 실재가 아닌가? 모두가 실재라면, 쌍안경이나 망원경 대신에 컴퓨터를 통해 보는 달이나 태양 또는 현상계는 실재가 아닌가?


우리 자신들이 직접 부른 노래나 그린 그림은 모두가 실재이고, 멀티미디어 공간상에서 부른 노래나 그린 그림은 실재가 아니고 가상인 것인가? 백화점의 진열장 안에 들어 있는 상품을 유리로 통해 보는 것은 실재이고, 사이버 마켓을 통해 보는 상품은 가상적인 것인가? 사람들의 입과 서류를 통해 획득한 정보는 실재이고, 인터넷으로부터 얻은 정보는 가상인가?


한걸음 더 나아가, 사이버 인간은 가짜이고, 나는 진짜인가? 진짜와 가짜, 실재와 가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들 간에 정말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들에 대해 확답을 얻기 위해서는 불교의 반야심경般若心經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충분히 설명하였듯이 오온개공五蘊皆空이요, 제법공상諸法空相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하였다. 인간의 몸과 마음이 비었고, 이 세상 모든 법法이 비었으며, 물질이 곧 빈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금강경金剛經이나 벽암록碧巖錄에 보면, 함이 있는 모든 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즉 꿈이나 허깨비 같으며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란 말인가.
우리의 의식과 말로만 진짜이고 가짜일 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든 것이 비었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물질을 불변의 실체인 양 진짜로 믿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사이버 세계는 큰 법문과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진실의 세계를 알고 보면, 우리가 진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파도나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사이버 세계에 나타난 모든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나타난 모습의 차이뿐, 그것들 모두 실재가 아니라 허망하여 마치 물거품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불교철학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모든 것이 항상하지 않고 수시로 변하며, 변하는 것은 겉모습일 뿐 실재가 아니라 하였다. 그러기에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현상세계나 사이버 세계를 통해 보고 느끼는 가상세계나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이버 세계를 포함한 모든 세상 만사와 물질의 모습은 허망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바다에서 출렁이는 파도와 같고, 금방 녹아버릴 눈이나 눈사람 같은 것이며, 서서히 흩어질 안개나 구름과 같은 것이다.
물(H2O)은 있으되 파도나 눈사람 그리고 안개나 구름의 실체가 없듯이, 이 세상에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근본 이외의 다른 어떤 실체도 갖지 않는다. 하물며 물도 실체가 아니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림자가 어떤 형태,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림자가 눈앞의 물질처럼 나타나느냐 아니면 인터넷 속의 가상 그림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허상이요, 가상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참이요 절대적인 것처럼 믿고 있는 시간과 공간마저도 허망한 것이다. 모든 사물과 현상의 변화를 보고 인간들이 의식적으로 만든 하나의 관념이 시간이요, 공간이다. 모든 사물과 현상이 본래 허망한 것이라면, 무엇을 보고 시간을 정하며 어디를 두고 공간이라 말할 것인가.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란 어려운 개념을 생각해낸 그 대상 자체가 본래 비었으므로 시간과 공간도 빈 것이다.


진실의 세계에는 본래 무시무공無時無空이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불변불천不變不遷이다. 즉, 진실의 세계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변하는 것도 옮기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현상세계가 되었건 사이버 세계가 되었건, 우리의 오감五感에 포착된 모든 것은 진실면에서 허망한 물거품과 같은 것이므로, 사이버 세계 역시 무아無我일 수밖에 없다.

출처 : 용인타임스
글쓴이 : 개마고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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