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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스크랩] 지식과 깨달음의 차이

지식과 깨달음의 차이

- 허신행 박사(한몸사회 포럼 대표, 전농림수산부장관)

 

사람들은 산업사회 이후를 지식사회라 규정지어놓고, 필요로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닌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력’이라 부르짖는다. 만일 우리가 지식사회에 진입하였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지식’을 갈구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산업이나 서비스업의 현장에서는 대부분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요구하는 것일까?

 

경제분야에서도 산업사회를 대표하는 기존의 굴뚝산업 내지 제조업들은 점차 사양화되는 반면, 벤처기업들이 비온 뒤 죽순 나는 것처럼 성행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인터넷을 둘러싼 기술업종들이 급성장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기술산업을 뭉뚱그려 ‘신경제’라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미래의 경제적인 운명을 걸고 있다. 신경제 가운데에서도 IT(Information Technology) 업종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우리가 지식사회에 산다면, 왜 지식산업이 아닌 기술산업이고 그 가운데서도 IT 업종들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일까?

 

사회적·경제적 분위기가 이처럼 변하다보니 대학교육에서도 지식보다는 창의력과 새로운 아이디어 등을 강조하게 된다. 지식이 많은 학생이나 교수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을 독창적으로 개발한 학생과 교수가 벤처 기업인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또 높은 몸값을 받는 귀한 인재로 대접 받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만일 산업사회 이후가 지식사회라면,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증권시장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기업들의 주식값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거나 저평가되는 데 반하여, 새로운 기술업종들의 주식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를 좋아한다. 산업사회 이후가 지식사회라면, 지식을 많이 가진 기업들의 주식값이 더 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 반대이다. 새로운 것, 창조적인 것이 대접받고 각광을 받는 사회, 그것이 과연 지식사회인가?

 

그러면 지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력은 어디서 샘솟는 것인가 등에 대한 물음에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개념의 혼란과 함께 방향감각을 상실할 수 있다. 또 제대로의 사회발전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지식이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사전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물에 관한 명료한 의식’,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한편, 지식의 지식 또는 지식의 과학이라 불리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말하면, 지식이란 ‘인식에 의해 얻어진 성과’, 넓은 의미에서는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이고도 사실적·경험적 인식’이요, 엄밀한 의미에서는 ‘원리적·통일적으로 조직되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의 체계’로 정의되어 있다. 따라서 지식은 철학·논리학·수학·과학 등 모든 학문활동에 의해 얻어낸 앎의 내용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개의 경우, 학자들은 지식을 발견해내는 사람들이요, 지식인이란 이들 지식을 습득하여 간직하거나 활용하는 사람들로 보면,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학자들이 생산해낸 지식을 가지고 산업활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다름 아닌 기업인들이다. 그래서 지식과 산업사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동전의 앞뒤와 같고, 상생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식사회와 산업사회가 상생의 관계라 말했던 것이다.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를 비롯하여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는 물론 대다수 천재적인 학자들을 모두 포함한다.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물론 창의적이어야 한다. 한번 생산된 지식은 모두에게 알려지고,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지식을 창출해내는 사람들은 항상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기존의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해내는 학자나 선각자들이 지닌 것과 같은 창의력이라는 사실이다. 한번 생산되거나 밝혀진 지식은 인터넷 속에 모두 저장되어, 필요로 할 때 클릭만 하면 언제나 활용 가능해지기 때문에, 더 이상 희귀한 자원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산업사회에서는 대부분 지식 생산자와 기업인이 서로 달랐는데, 새로운 사회에서는 지식 생산자가 바로 벤처 기업인으로 탈바꿈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물론 우수한 학자나 선각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많이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의 발전이나 변화가 이들 소수 집단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실정이고, 또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력이 이들 소수의 전유물이 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산업사회를 일으킨 주역들 가운데도 에디슨이나 라이트 형제와 같은 발명가들은 학자나 선각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기존의 상식이나 지식을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상상의 나래를 자유자재로 펼쳤던 사람들이다. 새 시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빌 게이츠 역시 위대한 학자나 선각자도 아니다. 그는 다만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진 열린 마음의 창조자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 3천5백여 년 전의 자유인들이 지식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던가에 대하여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지식은 한자로 ‘知識’, 즉 知와 識은 둘 다 ‘알다’라는 뜻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知’자는 ‘말하다’, ‘알다’, ‘깨닫다’, ‘기억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識’자는 ‘떳떳하다’, ‘깨닫다’, ‘기억하다’, ‘사귀다’, ‘교유하다’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知’자는 안다는 쪽에, ‘識’자는 확산 쪽에 무게가 더 실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知’자 하나에 대해서만 해부학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知’자는 큰 옥편玉篇에 보면, 회의會意로서 마음 속에 인식된 것을 화살처럼 입으로 말한다 하여 화살 시矢와 입 구口를 합성하여 표기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그야말로 지식적이고 표피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화살’과 ‘입’이 어찌하여 ‘앎’과 연결되어 있을까? 중국의 상형문자象形文字가 생긴 것은 3천5백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문자도 학문도 없었던 시기였다. 하물며 오늘날의 옥편과 같은 책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음 속에 인식되어 있는 앎을 입으로 화살처럼 내뱉는다는 것은 앎에 대한 표현방식이지, 그것이 앎이란 무엇이냐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상상의 세계를 넓혀서 ‘知’에 대하여 날아가는 화살을 입으로 물었다고 생각해보면, 이는 엄청난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금방 감지할 수 있다. 왜 날아가는 화살인가? 당시에는 화살을 많이 이용하여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날아가는 화살의 궤적은 포물선 모양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날아가는 화살의 포물선 모양은 모든 생명체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같고, 모든 무생물의 성주괴공成住壞空과 같으며, 마음의 생주이멸生住異滅과도 같은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였다. 이 세상의 만유萬有는 변하고, 변하는 모습은 날아가는 화살처럼 포물선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살은 제행무상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이 알고자 하는 대상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이며, 그 모든 대상은 날아가는 화살처럼 변한다. 그러기에 알고자 하는 모든 대상을 날아가는 화살에 비유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철학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날아가는 화살을 어떻게 입으로 물 수 있는가?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이 세상의 모든 대상도 순간순간 변하여 날아가는 화살처럼 잠시도 붙들 수가 없다. 찰나 전의 나는 찰나 후의 나가 아니다. 그 사이에 많은 세포가 죽고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기에 세상 만사 어떤 것도 알기 위해 붙들 수도 없고, 또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은 마치 날아가는 화살을 상상으로 입에 물고 추리해보듯이 피상적으로 탐지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앎에 대한 탐구가 아무리 과학적이고 정밀한 도구와 방법을 동원했다고 하더라도, 앎이란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이요, 생물처럼 변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다. 과학적인 지식이라 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믿거나 숭상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은 것 같으나, 지식은 물론 이 세상 만유가 본래 허망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앎에 대한 옛날사람들의 인식이나 자세가 오히려 더 소박하고 정직하며, 겸손해 보이는 것 같다. 사실 지식이란 겉으로 대단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별 것도 아닌 것이다.

 

인간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무상하게 변하는 그들에 대하여 순간 포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스냅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만유가 변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은 순간포착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적으로 포착된 사물이나 현상은 곧 변하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구름의 순간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옛날사람들이 앎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초·중·고등학교로부터 대학 4학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익히는 앎 또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순간포착적인 정지된 스냅 사진과도 같은 것이다. 교과서에 실린 대부분의 지식내용이란 어떤 단면의 이치나 인과관계의 단순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거니와 정지되어 있지도 않다. 현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부단히 변한다. 날아가는 화살을 어떻게 입에 물겠는가. 마찬가지로 순간순간 변하는 현실을 어떻게 포착하여 알 수 있겠는가. 그저 날아가는 화살을 입에 물어보려고 하듯이, 현실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 그저 그렇게 추리해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깨달음의 지혜는 더욱 어두워지게 마련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의 수행자들은 이들 모든 지식마저 번뇌망상煩惱忘想으로 여긴다. 지식 또한 깨달음의 장애로 보기 때문이다. 머릿속을 비우고, 온 몸의 마음을 다 비워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므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지식은, 그것이 무엇이었건 간에, 깨달음을 방해한다. 마음을 비우는 공부, 지식을 씻어내는 공부,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깨달음에 대해 앞에서 많이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에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식은 쌓는 것이고 깨달음은 비우는 것이요,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력은 깨달음과 비움으로부터 샘솟듯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의 밑천이나 자원은 비움으로부터, 또 깨달음으로부터 생기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최고 인기 소설가가 한국의 불교 선원을 찾아 몇 개월씩 참선을 하고 간 다음에 신선하고 창조적인 이야기 줄거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나, 이스라엘의 어느 유명한 연극·영화배우는 화계사 등을 찾아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선禪 수행을 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 출신 철학도가 한국의 사찰寺刹을 두루 돌며 수행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다고 하는 사례들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고 본다.

문학과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미술·종교·정치·경제·사회·교육 등 모든 분야의 새로운 학문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이제 마음을 비우는 수행이나 깨달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한몸-정각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출처 : 용인타임스
글쓴이 : 개마고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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