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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가던 길 멈추고 2013-4

버려진 분꽃 모종 주워다 심으며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길가 화단에 새싹이 올랐길래 반가운 마음에 들여다보니 분꽃이었다.

싹 튼 지 사나흘 된 듯했다. 떡잎 포함해 잎은 넉 장, 뿌리 길이 4센티미터.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 한 포기가 뽑힌 채 누워 있었다.

어쩌나 생각하다 무작정 집어들었다. 화단을 보니 분꽃 새싹이 너무 빽빽히 올라와 멀쩡히 뿌리 내린 놈도 자리 잡기 어려워 보였다.

유기된 분꽃 모종을 손에 들고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뒤적거려 보니 조수석 바닥에 요구르트 빈 병이 보이고, 어제 먹다 남긴 생수병이 뒹굴었다.

요구르트 빈 병을 생수로 씻은 다음 바닥이 차도록 물을 더 붓고, 거기에 거의 말라버린 분꽃 모종을 담갔다.

 

그 길로 사무실에 들렀다. 사무실이긴 하되 거의 버려진 사무실, 주인인 나조차 일주일에 두어 번 겨우 드나드는 곳이다. 그것도 화분 물 주러 가는 것뿐이다. 책장이고 책상이고 컴퓨터고 전화기고 다 논다.

지난 겨울 혹한에 죽은 나무(기어이 싹이 나오겠지 하며 기다리는 중이다) 대신 수년 전부터 길러온 구근 세 덩이를 각각 묻었는데, 하난 올라오고 두 개는 침묵 중이다.

그 중 싹이 날 것같지 않은 구근을 묻은 화분에 물을 넉넉히 붓고 길에서 주워온 분꽃 모종을 심었다.

제발이지 잘 살아나 여름철에 분홍색 분꽃을 사무실에서 가득 피워주길 바란다.

 

- 2012년 8월

 

잠을 자다 보면, 간 지 오래된 우리 아이들이 천연덕스럽게 내 옆에 누워 있거나 꼬리 치며 반기는 경우가 있다.

깜짝 놀라서 너희들 밥은 먹었니, 물은 마셨니 하며 허둥대다보면 꿈이 끊어진다.

낮이면 항상 빈 집에 남아 있는 리키와 바니는 사실상 원수나 다름없다. 반신불수 할머니 바니의 말동무라도 하라고 입양한 리키는, 그것도 바니 할머니와 성을 달리하여 수컷이건만, 아빠의 사랑이 한 가닥이라도 바니 할머니에게 가는 걸 결코 용서치 않는다.

 

- 2010년 5월

 

- 2012년 7월

 

밖에 나가 일 보다 예정과 다르게 만남이 길어지면 난 정신이 아뜩해진다. 바니 할머니 소변을 짜줘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급해지고, 만나는 사람에게 차마 늙은 개 오줌 뉘러 가야 한다며 말 끊고 일어나기가 어렵다. 겨우겨우 핑계를 대어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 바니 소변을 짜줘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결심하기로는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만에 한번씩 소변을 짜주는 게 목표인데 그게 안될 때가 많다. 그래서 기저귀를 채워 놓지만 그런들 신경이 마비되어 홀로 싸지를 못한다.

 

언젠가, 내 동네 친구가 늦가을에 멀쩡히 살아 있는 화초 몇 개를 서리가 하얗게 내린 밭에 버리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입양한 적이 있다. 몇 년 잘 기르다 누군가에게 재입양시켰는데, 아직까지 잘 살고 있는지 걱정된다.

전원주택에 살면서 기르던 닭과 병아리들을 이웃에게 입양시켜 놓고 아파트로 이사한 적이 있는데, 그뒤로 몰래 우리 닭들이 잘 사는지 보러 옛 동네에 가보곤 했다.

 

오래 전에는 우리집 출신 강아지들을 분양해 놓고, 몰래 그 집 담장 안을 들여다보다가 주인과 다툰 적이 있다. 강아지가 날 알아보고 대문까지 쪼르르 달려와 꼬리치는데, 그럴 거면 왜 분양했냐고 하여 마음 굳게 먹고 다시 가지는 못했다.

하기사 오래 타던 차를 팔고 나서도 사고 나지 않고 잘 굴러다닐까 걱정하는데, 그래서 내가 타던 차 번호 다 기억하는데, 살아 있는 생명이며 내 곁을 떠난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야 오죽 하랴.

 

나이가 찬다는 느낌이 드는 중년에 접어드니 하늘과 땅 사이에 슬픔만 가득 차 있어 보인다.

뉴스를 보다가도 한숨을 쉬고, 길을 걷다가 쓰레기더미에서 종이박스 고르는 할머니를 보고도 한숨을 쉰다. 나 자신을 돌아봐도 헛웃음이 나고. 이 세상에 신나는 건 리키와 아이돌 뿐인 것같다.

 

- 2011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