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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사도세자, 나는 그들의 비밀을

소설 속 화자 5인의 무덤을 가다

'책있는마을' 강영길 대표 부부가 <사도세자,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에 등장하는 다섯 화자를 각각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다섯 화자란 자의대비 조씨, 대빈 장옥정, 선의왕후 어씨, 사도세자 이선, 정조 이산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와 효의왕후가 계신 두 곳을 다녀오고, 서울 이북과 구리에 있는 나머지 세 곳은 강영길 대표 부부가 찾아가 출간 인사를 올렸다.

 

1992년 2월에 처음으로 <소설 토정비결>의 주인공 토정 이지함의 묘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해냄출판사 송영길 사장이 떡, 과일 등 제물을 마련하여 둘이서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주인공에 대한 예를 그렇게 차린 것이다. 1991년 11월말에 1권이 나오고 1월말인가 2월초에 3권 1질이 완간된 기념으로 간 것인데, 이 날 갑자기 주문이 5천 부가 들어왔다고 하여 놀란 적이 있다. 그뒤로도 2년여 거의 매일 5천여 부씩 끊이지 않고 주문이 들어와 시름거리던 해냄출판사는 벌떡 일어났다. 이지함의 제자 서기의 경우에도 그의 후손들과 함께 찾아가 참배를 하고, 출신 문제에 대해 깊이 배려하지 못한 점을 망인에게 사과드린 적도 있다.

 

그뒤로도 나는 역사인물 관련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꼭 능이나 무덤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곤 했다. 이순신은 고향 길에 계시니 여러 번 들렀고, 정도전은 무덤이 없어 사당으로 찾아갔다. 그의 아드님 정진의 사당이 마침 나란히 있어서 같이 인사를 올렸다. 정진을 주인공으로 했기 때문에 제물도 따로 올렸다. 여기도 강 대표가 제물을 마련했다.

 

<천년영웅 칭기즈칸>을 발간할 때도 자동차로 사흘을 달려 동몽골 그의 탄생지로 가서 책을 올리며 인사를 올렸다. 또 주요 격전지를 찾아다니며 칭기즈칸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싸웠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가 금나라 정벌길에 둔영한 고비사막에서 일부러 야영을 하면서 그가 느꼈을 두려움을 느껴보려 애썼다. 칭기즈칸의 아들 주치가 갔던 타이가를 보기 위해 시베리아로 들어가 그의 말이 마셨을 강물을 만져보고, 그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던 노을을 나도 바라보았다. 우즈벡 국경의 한 강에서 만난 칭기즈칸 호위 부족 후예인 한 처녀와 거닐던 기억은 아직도 꿈처럼 아스라하다.

 

또 <여불위>를 낼 때도 중국 서안으로 가서 진시황릉을 참배하고, 등장인물들이 힘차게 역사를 이끌던 함양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들이 혹시 남겼을지 모를 체취를 느껴보려 애썼다. 그의 아버지라는 여불위 묘소는 따로 없어 낙양 북망산에 가 대신 참배했다.(낙양이 그의 봉읍이었고, 거기서 죽었기 때문에) 마침 <태사룡 삼국지>도  냈기 때문에 조조와 그 일족의 무덤과 조조의 고향에도 가서 인사를 드렸다.

 

<왕의 눈물(원제 연암 박지원)> 때는 박지원의 원행길을 따라 압록강에서 열하까지 밟아간 적이 있다. 그때는 자동차로 수천 리 길을 달리며 만주 일대를 다 돌아보았다.

 

이처럼 내가 굳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 발자취나 고향, 혹은 무덤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것은, 내가 다루는 인물들이 대개 잘못 알려졌거나 한이 많은 분들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어쨌든 그분들에 의지해 쓴 글로 먹고사는 것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또 그래야만 역사 왜곡 없이 그분들의 실제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아래 사진은 <사도세자,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의 화자인 자의대비 조씨, 대빈 장옥정, 선의왕후 어씨, 사도세자 이선, 정조 이산의 능묘다. 대빈 장옥정묘, 경종과 선의왕후가 계신 의릉, 자의대비가 계산 휘릉은 강영길 대표가 찍은 사진이다.

 

사도세자 이선과 헌경왕후인 혜경궁 홍씨가 잠자고 있는 융릉이다. 오른쪽 방향에 사도세자를 기리는 용주사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 더 올라갈 수가 없어 사진이 이렇게 나왔다.

 

정조 이산과 효의왕후 김씨가 묻혀 있는 건릉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왼쪽 골짜기에 있다. 원래 이산의 유언에 따라 융릉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나중에 김조순이 효의왕후를 장례지내면서 여기로 옮겼다. 여기도 세계문화유산이라 더 올라가지 못했다.

 

대빈 장옥정의 아들 경종 이윤과 선의왕후 어씨가 묻혀 있다. 경종은 영조 이금 세력에 의해 독살되고, 선의왕후는 영조에 의해 유폐되었다가 식음을 전폐하여 자진하였다. 가장 한이 맺힌 능이다. 영조 이금은 종종 이 릉에 찾아와 울다가곤 하는 쇼를 벌였다. 사진은 나란히 있는 것같지만 왼쪽 경종이 위에 있고, 오른쪽 선의왕후는 아래에 있다.

 

경종의 어머니인 대빈 장옥정의 무덤이다. 왕후였다가 빈으로 다시 낮아져 능이 아닌 묘가 되었다. 아들 경종을 왕으로 삼기 위해 자진했다. 경종은 어머니 대빈 장씨를 왕후로 추존하려 애썼으나 그러지 못했고, 묘마저 원으로 승격시키지도 못한 채 의문사했다. 그에 비해 영조 이금은 무수리 어머니 묘를 원으로 승격시켰다.

 

 

자의대비가 계신 구리 동구릉 중 휘릉이다. 본의 아니게 예송 논쟁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산 왕실의 산 증인이다.

대빈 장옥정의 후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