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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영화 <국제시장>과 역사 서술의 오류

영화 <국제시장>은 육이오전쟁 이후 먹고 살기 위해 독일로 떠난 광부, 간호사, 그리고 이후 베트남전쟁 수송업무에 투입된 민간인 등 굵직한 현대사의 하이라이트를 조명하고 있다.

육이오전쟁-박정희의 파독 광부, 간호사 파견-박정희의 월남전 참전 명령, 이 3가지가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마음에 안든다.

 

마치 박정희를 찬양하면서 그의 일본군 장교 복무 전력이나 일왕에게 충성하겠다는 혈서를 쓴 사실을 쏙 빼놓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니 근대화니 하는 딴 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것과 같다.

 

 

육이오전쟁이 왜 일어났느냐 따지지는 않더라도 주인공이 살아간 세월 중에 일어난 매우 중요한 사건들마저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생략돼 버렸다. 4.19도 없고 5.16도 없으며 따라서 10.26도 없고 부마사태나 광주항쟁도,1997년의 외환위기도 없다. 군대를 다녀왔다는데도 아무 말이 없다. 동생이 대학생인데도 역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 그 동생이면 내 형 또래인데, 내 청춘을 할퀴어버린 그 모진 유신의 역사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나 아픔이 단 한 점도 없다.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그 시대의 모든 사건을 다 겪을 필요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조차 언급되지 않는 건 이상하다.

마치 1980년 5월 18일, 한 쌍의 남녀가 광주 시내를 걸어가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영화를 보는 듯하다. 잠시 뒤면 총알이 빗발치고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갈 그 현장에서 단지 몇 시간 차이로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볼 수 있는 그런 한가롭고 평화로운 장면을 연출하기로 작정하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그래놓고 영원한 사랑이니 그때 그 사람이니 하는 한가한 제목을 붙일 수도 있으리라.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걸 곡학아세한다고 말한다. 지록위마하고는 다르다. 곡학아세는 작은 근거에 의지해 큰 진실을 감추는 것을 말한다. 국제시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견 다 사실이다. 하지만 더 큰 것을 숨긴다. 숨겨진 것들은 우리 현대사를 질식시킬 정도로 아프고 중요한 사건들이건만 여기서는 없던 일이 된다.

 

<국제시장> 기법이라면 이완용은 뛰어난 서예가가 되고,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의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학교 석사, 프린스턴대 정치학박사가 되며, 전두환은 나라 위해 싸운 월남전 참전 용사가 된다. 박정희는 효자가 되고, 서정주는 위대한 서정시인이 되며, 조선일보는 반공에 앞장선 신문이 된다. 지록위마는 다 알면서 당하는 속임수이기 때문에 역사가 그것을 교정할 수 있지만, 곡학아세는 상당히 오랜 동안 진실처럼 호도될 가능성이 크다. 마치 태평양전쟁 한 복판에서 마구잡이 공출로 쌀도 밀도 없이 콩깨묵으로 목숨을 부지하던 시절,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고 읊은 박목월의 시 <나그네> 한 편이 이 시대 대표적인 서정시로 통하는 것처럼. 술을 담글 쌀은 커녕 마을마다 징용으로, 징병으로, 위안부로 끌려가 한숨이 강물처럼 흐르던 시대를 이 시 한 편이 역사를 뒤집어버린 것이다.

 

물론 국제시장을 놓고 거짓을 그렸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것도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거짓말은 더 나쁘다.  나는 주인공과 겹치는 시대를 꽤 살았다. 아마도 내 숙부 정도가 주인공 또래일 것이다. 

우리 숙부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미화하지 않는다.

<국제시장> 카메라 밖에서 일어난 동시대 사건 관련 사진을 보시라.

 

<영화 택시운전사, 그저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