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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고은 선생이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하는 이유

2008/10/26 (일) 00:40

고은 선생은 뛰어난 시인이다. 정치 견해가 달라 싫어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문학적으로만 보자.

안타깝다. 고은 선생은 내 소설 <천년영웅 칭기즈칸> 추천사를 써주신 분이고,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시기 때문에 찾아가서 두어 번 인사를 올린 분이라 개인적으로 노벨상을 꼭 타시기를 소원했다.

결과적으로 안됐다. 올해는 기대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던 것같다.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다. 고은 선생의 능력과 아무 상관없는 이유가 있다.
 
일본같은 경우 일본어로 문학 활동이 이루어진 역사가 길다. 하이쿠의 역사도 대단하지만, 이후 근대문학이 자리를 잡은 것만 이미 백오십여 년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 그만두고 어떤 언어든지 백년은 두고 시로 읊어지고, 소설로 씌어지고, 연극 대사로 말해질 때 비로소 '문학 언어'가 된다.
영어도 섹스피어같은 대문호가 출현하고, 이어서 걸출한 시인들이 나와 다투어 시를 써댔기 때문에 자리가 잡혔다.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가 대개 그러하다. 심지어 이웃 중국의 백화문도 그 역사가 노신부터 따져 백년을 넘는다.
 
하지만 우리말은 그렇지 못하다. 한글이 우리 문학 언어가 된 지 불과 백여 년 간신히 넘었는데, 그것도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줄기차게 써준 덕분에, 또 선각자 몇 분이 간난신고의 운동 끝에 우리 문학 언어가 되었지, 안그랬다면 어쩌면 지금도 한문으로 소설 쓰고 블로그하고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멀리 볼 것도 없다. 1919년의 기미독립선언문을 읽어보면 우리 한글이 문학언어가 되기에 얼마나 투박하고, 어지럽고, 체계가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인직이니 최남선이니 하는 이들의 글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다. 하물며 한글소설이라고 하여 홍길동전이나 박씨부인전 같은 걸 읽어보려면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우리 말에 일본어 몇 개 들어 있다고 거품 무는 국어학자들이 있는데, 그건 애교를 너무 과하게 야단치는 것이다. 우리말의 80퍼센트 이상이 한자어 아닌가. 심해도 한참 심하다. 이걸 우리말이라고 감히 할 수나 있는지 모르겠다. 판사들이 즐겨쓰는 판결문 보면 아마도 99퍼센트는 한자어일 것이다. 아마 조사만 우리말일걸.
 
여하튼 우리 한글은 1930년대가 지나서야 가까스로 문학언어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해방 후에 비로소 교과서나 공문서 등에 활발하게 쓰이기 시작한 듯하다. 그러니 해방 시기부터 따지고 보면 겨우 반백년이 된 것이다. 그 이후지만 박정희 대통령도 한문 섞어 쓰기를 좋아하여 한문 사이에 들어간 조사나 한글을 보면 수없이 틀리고, 청문회 때 드러난 전두환 대통령 메모지를 봐도 무지하기 이를 데 없고, 심지어 현직 이명박 대통령도 한글을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뭐 영어는 잘하는 모양이지만, 하여튼 우리말엔 서툰 것같다.
 
이런 언어로 우리 문학이 이만큼의 성과를 낸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멀었다. 아직 우리말은 시제도 정확하지 않고, 비과학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한글이 비과학적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의식 체계가 그리 합리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한글이 무조건 좋다, 우리말이 최고라고 소리지를 게 아니라 갈고 다듬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내가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시리즈에 매달리는 것도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나더러 소설가는 소설이나 쓰지 왜 국어학자나 국어교수들이 해야 할 일을 건드리는가 따진다면, 그이들이 안하니까 하는 것뿐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낸 <~ 우리말 숙어 1000가지> 같은 경우는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숙어사전일 것이다. 중학생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게 영어숙어사전인데, 제 나라말 숙어사전이 아예 없었다는 건 누구 책임이라고 할 것없이 우리 모두가 다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요즘 우리말에 일본 문법, 영어 문법이 많이 들어와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말이 그만큼 표현 기능이 약하다는 뜻이다. 당장이야 낯설어 귀가 아프지만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고치고 다듬고, 없는 말은 자꾸 만들어 써야 한다. 안되면 외래어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은 선생이 만일 일본에 태어나거나, 중국에 태어나 일본어로 시를 쓰고, 중국어로 시를 썼다면 아마도 노벨문학상을 타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른 나라 수상자들 보면 작품이 그리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은 선생이 노벨상을 타지 못한 이유는 한글이 아직 문학언어로 정제되지 못한 탓이다. 더 좋은 작가, 시인이 나와 우리말로 주옥같은 작품을 자꾸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문학은 죽어가고, 저질스럽고, 거칠고, 문법이고 작법이고 다 무시되는 언어가 인터넷에 횡행하고, 또 금연광고하면서 정부에서조차 '세이노'라고 영어로 지껄이고, 대통령까지 '비지니스 프렌들리'니 무슨 '어린쥐'니 하고 떠드니 이런 나의 기대는 요원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인터넷 시대가 오기 전에는 검증받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전파하고, 방송에서도 훈련받은 사람들이 말했는데, 지금은 연예인들이 떼를 지어 나와 방송언어를 어지럽히고, 초등학생 수준의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인터넷을 점령해버렸다. 인해전술로 나오니 어쩔 수는 없지만, 그 피해는 결국 우리들이 다같이 나눠갖게 된다. 아마 이런 식으로 나가면 한글로 쓴 논문은 국제 기준의 학술논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지금은 영어로 써야 된다), 국제회의에서 사용하는 공식언어로 승격되지도 못하고, 한글로 쓴 작품은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간이 앞으로 쭈욱, 한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우리말 시리즈> 작업을 쉬지 않고 해나갈 것이고, 작품도 지치지 않고 쓸 것이다.
고은 선생에게 위로를 드린다. 고은 선생 뿐만 아니라 한글로 문학하느라고 국제적인 위상을 얻지 못한 여러 작가, 시인들에게도 위로를 드린다. 누구누구 거명할 수도 있지만, 내가 아는 한 열 명 정도의 작가, 시인은 작품성이 국제적인 수준에 이르렀지만, 한글에 갇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블로거들 중에서도 이런 내 주장에 동감하신다면, 타이핑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웬만하면 오자 내지 말고, 이상한 기호 적지 말고, 문법이고 작법에 맞게 정확하게 써준다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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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나라 문인이 노벨상을 타는 시기는 언제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거같다.
우리 돈 원화가 국제결제수단으로 인정받는 날이 아닐까 싶다. 세계 12위의 경제대국 한국의 화폐와 언어가 국제무대에 당당하게 서는 날이 바로 우리 문학이 세계화되는 날이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 문학 나무라지 말고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분발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