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삼국지를 소설로 쓴 것은 <천년영웅 칭기즈칸(전8권, 1998년)>을 발표한 이후다.
삼국지는 원래 내가 쓰고싶은 소재가 아니었는데 칭기즈칸을 발표하고 나니 "쓸 소재가 그렇게 없어 오랑캐를 주인공으로 삼았느냐."는 허접한 인간들의 평이 있어 이런 무지한 사람들이 대여섯 번씩 읽으며 애지중지하는 삼국지를 한번 파헤쳐보기로 결심했다.
나관중의 삼국지를 중학교 1학년 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다시 보니 웃음이 나왔다. 무협지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무협지라는 표현은, 죽은 놈도 알약 하나 먹으면 도로 살아나고, 급하면 날아가는 식의 황당무계한 스토리로 이뤄진 장르란 점에서 쓰는 것이다. 실제로 유비는 불리한 전쟁에서 단 한 번 이겨본 적이 없으며, 스스로 난관을 극복해본 적도 없는 나약하고 징징거리는 지도자일 뿐이었고, 촉나라는 위나라와 <나라國>라는 명칭을 같이 쓸 수 없을만큼 보잘 것 없는 궁벽한 시골 지방일 뿐이었다.
나는 소설을 쓸 때 가장 먼저 연표를 정리한다. 그렇게 하여 시대상을 정리하고, 이 시대 속에서 주인공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이해한다. 삼국지의 경우 이 작업이 끝난 다음 <삼국지연의>를 창작한 나관중의 연보를 정리한다. 나관중은 어떤 시대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살았는가, 왜 이 글을 지었는가 이해하는 것이다. 이때 답이 풀렸다. 나관중은 식민지 백성이었다. 원나라 치하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으로 취급받는 사람이었으며, 이들 속에서 이야기꾼으로 먹고사는 하층민이었다. 난 <천년영웅 칭기즈칸>을 쓰면서 원나라 때 한족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매우 상세히 공부했기 때문에 <삼국지연의> 저자 나관중이 어떤 삶을 살면서 이 글을 완성했을지 추정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관중은 원나라 치하의 한족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삼국지연의>를 과장하여 썼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역사 사실과 상관없이 멋대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말하자면 고대에 우리가 중국과 일본까지 지배했으며, 백제가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고, 고구려가 황하 이북을 다 지배했다는 식의 일부 극우세력들의 주장만큼이나 나관중의 주장은 절대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관중에 맞서는 또다른 이야기꾼 태사룡이란 주인공을 만들어냈고, 이 사람을 통해 진짜 삼국지를 이야기하도록 플롯을 만들어내어 전혀 다른 삼국지를 써낸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 삼국지야말로 가장 진실한 팩트를 다룬 유일한 소설이라고 자부한다.
이따금 내 삼국지를 제대로 봐주는 신문기사와 응원 글이 여럿 있었지만 나관중에 쇠뇌당한(대부분은 나관중 소설을 윤문한 이문열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이지만) 사람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천년영웅 칭기즈칸>의 경우에는 12세기 중앙아시아와 동유러 관련 역사지식이 딸려 비판을 못하던 사람들이 내 삼국지는 나관중, 이문열이란 명성에 힘입어 매우 용기있게 도발해온 것이다. 나는 나관중의 삼국지를 단순 윤문하거나 다듬어 작가 이름을 달아 내놓은 작품들을 <사대모화소설>이라고 인식한다.
그런 중에 전에 <내 시각과 일치하는 글 - 삼국지가 중국을 망쳤다>는 보도로 알려진 중국인 류짜이푸의 저서가 있었고, 요즘 <유비가 난세의 영웅? 평범하고 교활한 인간>이라는 중국인 저자의 저술이 다시 소개되었다.
난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살아 생전에 단 한 점 밖에 팔아보지 못하고(그나마 싸구려에) 죽은 빈센트 반 고흐의 유작들을 떠올린다. 유작 중 한 작품만 제값에 팔았어도 고흐는 평생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지만 세상은 그런 행복을 주지 않는다. 이중섭도 마찬가지다. 요즘 거래되는 가격대로 단 한 작품만 팔 수 있었더라면 그가 가족과 생이별한 뒤 그 고통스런 가난에서 허덕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분수 넘치는 작가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위안 삼으며 내 삼국지를 바라본다.
-------------------
한겨레신문 / 유비가 난세의 영웅? 평범하고 교활한 인간!
장쭤야오 지음, 남종진 옮김
민음사·3만5000원
많은 사람들은 유비를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 하는 등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고 백성을 버리지 않고 정의롭고 의리있는 행동으로 시종일관한 인물로, 교활한 조조와는 정반대의 위인으로 생각한다. 이런 인식은 유비, 관우, 장비 세 호걸이 “도원에서 연 연회에서 의형제를 맺는” 장면에서 시작해 “아우의 한을 설욕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정벌하다 일생을 마친 것처럼 유비의 삶을 그려낸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를 통해 대중들 사이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84살의 중국 역사학자 장쭤야오가 쓴 <유비평전>은 정통론과 대의명분으로 미화된 소설 속 유비가 아닌 방대한 역사서와 고증을 통해 인간 유비를 추적했다.
위·촉·오 삼국의 정사인 <삼국지>를 비롯해 <촉서> <위서> 등을 토대로 한나라 황실의 먼 후손인 유비가 일곱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잇던 소년에서 시작해, 스물네살 때인 184년 황건의 대규모 농민봉기를 진압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이고, 촉한의 황제가 되고, 죽음에 이르는 험난하고 위태로웠던 인생역정을 풀어냈다. 지은이는 이를 통해 <삼국지>를 지은 진수의 평가, 즉 “좌절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는 말로 유비의 성품과 그의 역정을 가름한다.
하지만 장쭤야오는 동시에 평범하고 때로는 교활한 인간 유비에 대한 꼼꼼한 검증을 시도한다. 자신을 아꼈던 조조를 먼저 배신하고, 촉을 손에 넣고 정권의 기틀을 다지는 데 협조한 유장을 습격해 제거한 기록 등을 근거로 “유비는 무척 교활하며 신의를 돌보지 않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조조보다 인자하지 않고 의리 없는 경우도 있었다”고 적었다.
또 유비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를 누비며 살았고, 병법서를 공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용병술 등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다는 사실도 적시한다. 역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젊은 시절 남에게 지휘받은 전투에서 몇차례 공을 세웠지만, 서주목을 맡고 봉강대리가 된 이후로 직접 이끈 전투에서는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았다”며 “만약 그가 중국의 군사사에 기여한 점이 있다면 몇번 되지 않는 승리가 아니라 실패를 거듭한 ‘교훈’을 통해 사람들을 일깨운다는 점”이라고 혹평했다. 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두 해 동안 촉한의 황제였던 그는 원수를 갚기 위한 전쟁에 매달려 정치·경제 등에서도 내세울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귀순한 장수들을 기용하는 데 지역 차별을 하는 등 인재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고 결론냈다. 결국 유비의 죽음 뒤 위·촉·오 삼국 가운데 촉한이 가장 먼저 멸망한 것도 유비 탓이라고 결론낸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동아일보 / 나관중의 민족주의 시각에 편승한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유비 무능하다고 써서 인기 못얻은 내 삼국지, 중국인이 위로해주네>
'이재운 작품 > 삼국지 - 태사룡의 거꾸로 보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아일보 / 나관중의 민족주의 시각에 편승한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0) | 2016.12.11 |
---|---|
연합뉴스 / 상식을 깬 '삼국지'가 나왔다 (0) | 2016.11.21 |
십상시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글 (0) | 2014.11.30 |
중앙일보 / 다른 어떤 삼국지보다 파격적이다 (0) | 2014.01.19 |
내 시각과 일치하는 글 - 삼국지가 중국인 망쳤다 (0) | 2012.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