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깬 '삼국지'가 나왔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가 한(漢) 왕조에 대한향수와 민중들의 약자 동정심리에 편승, 지나치게 조조를 깎아내리고 유비를 추켜세웠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됐다.
정사인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위(魏)나라로부터 법통을 이은 진(晉)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았다는 항변도 있지만 위나라가 중국의 중심인 중원을 지배했고 천자 자리도 후한의 헌제에게 선양받았다는 것은 뒤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조조가 적에게 쫓기면 박수를 치고 유비가 패하면 눈물을 글썽인다.
박종화, 김구용, 이문열, 황석영 등 우리 시대의 쟁쟁한 문사들도 나름대로 주관적 해석을 가미하기는 했지만 기본 뼈대는 나관중이 붓을 놀린 대로 조조를 악인으로, 유비를 선인으로 묘사했다.
다른 등장인물은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유독 유비와 제갈양에게는 현덕과 공명이란 자(字)로 호칭하는 예우를 보인 것도이러한 독자의 심리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정비결」과 「당취」의 작가 이재운이 쓴 「소설 삼국지」(동방미디어ㆍ전5권)는 원(元)나라 때 원작자의 초간본이 등장한 이래 1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선보인 수천종의 이본 가운데 가장 파격적이다.
그는 중국이란 허구의 개념이며 다만 중원이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위가 정통이냐, 유비의 촉(蜀)이 정통이냐 하는 논쟁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셈이 된다.
역사 이래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간에 각축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대결이 가장 극적으로 펼쳐졌던 때가 바로 후한 말기에서 진나라 건국에 이르는 삼국시대라는 것이다.
이 시각에 따르자면 후한이 황건적의 난으로 뚜렷한 노쇠 기미를 보이자 동이, 북적, 서융 등 유목민족들이 중원을 넘보기 시작했고 한족들이 이에 대항하며 군웅들의 대회전이 벌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한족들이 오랑캐로 부르는 군웅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동이족인 조조, 서융의 강족인 동탁과 마초, 북적 흉노 출신의 여포와 장료 등이라고 상정한다.
조조가 원래 하후씨였다가 아버지 조숭이 환관인 조등에게 입양돼 조(曹)씨가 됐다는 사실은 사서와 소설에 함께 등장하지만 하후씨의 뿌리가 동이족임은 분명치 않고 조조가 동이족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거병한다는 설정도 지나치다.
또한 동탁이 자신의 외가가 강족이라고 해서 노골적인 반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과장의 혐의가 짙을 뿐더러 정원의 부하였던 여포가 동탁에게 귀순하는 배경에 흉노족의 설움이 깔려 있다는 설명도 무리한 해석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가 북방 기마민족과 한족의 대결사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 만큼 이재운의 시각도 충분히 근거가 있고 문헌 연구와 상상력을 동원한 소설의 얼개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제갈양의 신출귀몰한 지략 때문에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풍토병 때문에 스스로 물러간 것이라는 해석은 사서에도 등장하는 이야기다.
제갈양이유비를 택한 것도 삼고초려(三顧草廬) 덕분이라기보다는 수하에 인재가 많은 조조와손권에 비해 유비가 훨씬 만만했기 때문이라는 설정도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소설의 첫머리는 역사적으로나 소설상으로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조조가 어떻게 하후씨에서 조씨가 됐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으로 장식한다.
조조의 할아버지인하후력의 임종 직전, 그의 친구인 환관 조등이 막내아들 하후숭을 양자로 줄 것을부탁하고 하후력은 장차 조숭이 될 아들에게 동이족의 뿌리를 되새기게 한다.
이후의 전개과정도 나관중의 「삼국지」와는 판이하다.
유비, 관우, 장비는 제후들의 식객 노릇이나 하며 떠돌고 동탁은 무용과 지략을 갖춘 걸출한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위-오(吳)-촉의 삼국정립(三國鼎立) 전까지 유목민족과 한족이 각축을 벌이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돼 있어 「삼국지」의 하이라이트인 적벽대 전도4권에 가서야 등장한다.
원나라 때 한족 이야기꾼이 촉(蜀)의 수도였던 쓰촨성 청뚜의 허름한 집 마당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한문식 어투를 현대식 표현으로 모두 바꾸었다.
(서울/연합뉴스)
<동아일보 / 나관중의 민족주의 시각에 편승한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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