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파란태양/*파란태양*

아버지 가시는 길

파란태양 | 2007/05/10 (목) 23:55

 

아버지 가시는 길

 

“자고 있었니?”

수화기 너머 막내가 졸린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대답하길래 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새벽 두 시 반, 전화 걸기에는 참으로 미안한 시각이다.

“응.”

그 단음절 속에서 나는 막내의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한밤중에 웬일이냐, 혹시 하는 두려움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물론 네가 옳다. 같은 아버지를 둔 동기(同氣)니까 마땅히 그럴 것이다.

“자식이라면 언젠가는 이런 전화를 받게 되어 있다. 두 번쯤은.”

“말해.”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수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보나마나 막내도 울고 있을 것이다.

“나 지금 용인에서 출발한다. 1시간 뒤 천안에 도착할 거니까 준비하고 기다려라.”

“응.”

그러고는 전화를 끊고, 자동차 열쇠를 찾았다. 지갑을 보니 오만원이 들어 있다. 카드가 있으니 필요하면 가다가라도 인출기에서 빼면 되겠지 하면서 점퍼를 걸쳤다. 신문사에 보낼 연재소설 원고가 마무리되지 않아 노트북째 들었다.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러야 할 텐데, 검정색 양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논문을 쓰다가 두 시에 잠든 아내도 깨었다.

“일단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내일 아침 기윤이 데리고 내려와.”

나는 경황 중에도 칫솔 하나를 챙겨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차를 몰았다. 내려가는 중에 둘째형한테서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쯤이냐, 더 밟아라, 급하다, 그래도 운전 조심해라. 나까지 사고나서 어머니를 더 슬프게 할 수는 없지 하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천안에 다다르니 막내가 손가방을 챙겨들고 마당에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보령병원까지 한 시간 반 길.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초조했다. 불안한 마음에 둘째형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피차 비장한 말이나 나눌 뿐 아버지의 상태를 알 길이 없다.

막내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었다. 새벽이 되다 보니 아침 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줍잖게 인생을 논하고, 어제 주식이 어쨌고, 그리고 노래 한 곡, 이런 식으로 방송은 흘러나왔다.

 

병원에 다다르니 5형제중 둘째와 넷째가 먼저 와 있었다. 셋째인 나하고 막내가 갔으니 이제 넷이 집결한 것이다. 장남인 큰형은 이런 일이 있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해 건설 현장에서 자고 있단다. 아주 급하면 모를까 그냥 두자고 결론을 내렸다.

손을 씻고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숨소리가 거칠다. 맥박 기록을 보니 위독하다는 새벽녘에는 60-15까지 떨어졌었다. 지금은 90-45까지 회복되었다. 약물 덕분이다.

 

그때부터는 교대로 잠을 자며 아버지를 살폈다. 위독하다는 구실로 면회 시간에 관계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몇 시간 지나니 형제들은 애들 아침이며 학교 문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고, 이따금 웃기도 했다. 신문도 사다보고, 과일도 나누어 먹었다. 나도 집에 전화를 걸어 일단 기윤이를 학교에 보내라고 했다. 오후가 되니 큰형, 당숙, 숙부 등 친척들이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역시 죽음을 많이 경험해 보았는지 아버지의 손과 발을 살펴보고는 대번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꿋꿋하게 하루를 또 넘겼다.

그렇지만 새벽 면회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보내드릴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서는 건 언제나 나였다. 먼저 병원 영안실을 둘러보고나서 그런 데서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없어 그보다는 평생 사신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기로 결심했다. 형수들에게 먼저 집으로 돌아가 소제를 하고, 집안 어른들에게 말씀드려 장례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숙부와 당숙들도 집으로 돌아가 장례 절차를 의논해달라고 청했다. 그때부터는 아버지를 어디서 임종시키느냔 문제로 형제들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그래도 끝까지 의술에 매달려보자는 내 의견과 평생 살아오신 집에서 맞게 하자는 형들 의견이 맞섰다. 그러나 병원을 나서면 곧 죽으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형들은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

 

정오가 되면서 나도 결심을 바꾸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의학적 수치가 계속 나왔다. 먼저 두 동생더러 집으로 가라고 시켰다. 그리고 둘째형더러 산소탱크를 하나 사서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런 다음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놓고 아버지 머리맡에 다가갔다.

“아버지, 이제 집으로 가겠습니다. 아버지 늘 주무시던 아랫목에 요를 깔아놓았으니 거기 편히 누우세요.”

대답이 없다. 앰뷸런스에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큰형이 탔다.

그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버지의 숨이 가늘어진다 싶어 손으로 입을 벌리고, 공기를 불어넣었다. 그래도 좋아지지 않았다. 한번 크게 입을 벌리더니 다시는 숨을 쉬지 않았다. 

2000년 4월 15일(음력 3월 11일) 오후, 시각을 보지 못했다.


그 이후는 나도 모른다. 내가 언제 그렇게 슬프게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일흔한 살이신 어머니는 거의 까무라칠 듯했다.

그사이 큰형은 휴대폰을 켜고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진작 집으로 모시자던 둘째형은 수화기 너머로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재운이 새끼 때문에 아버질 집에서 모시지 못했어!” 임종을 지키지 못한 설움 때문이다.

 

“아버지, 여긴 화성이네요. 둘째며느리 고향요. 그래도 청양땅에는 들어오셨네요. 여기서 삼십 분이면 집에 가요. 아버진 돌아가신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부턴 아프지 않으실 거라구요.”

눈물은 한번 쓰고나면 재충전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다.

저녁나절부터는 눈물이 나오지 않고 의례적인 곡만 했다.

 

숙부들은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지난 총선에 김종필이를 왜 물먹였느냔 얘기로 핏대를 올리기 시작하고, 사촌동생들은 심부름하는 중간중간 내일 아침에 박찬호 야구 중계하는데 어떻게 보느냐고 걱정한다. 아무리 시골이어도 인공위성 수신기를 달아놓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문제없지만 아버지를 모시면서 방안에 있던 텔레비전이며 수신 컨버터 따위를 다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누군 700을 눌러보면 안다, 스포츠신문사에 전화해보면 안다고 시끌벅적하다.

 

아버지 덕분에 온 친척이 다 모여들고, 안보이던 친구들이 보인다. 어려서 잠깐 보았던 정다운 얼굴이 몇십 년만에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장례식은 결혼식이나 회갑연처럼 활기가 넘친다. 아버지가 수를 누린 셈이고, 자식들 하나 다친 곳 없이 결혼하여 잘들 살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육촌누나는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 주정을 한다. 밤새 화투판이 벌어진 곳만 스무 군데가 넘었다. 사촌과 조카들은 새벽까지 그네들 심부름하기 바쁘다. 우린 상주가 아니라 하우스장이 된 기분이다.

 

아버지가 산으로 가시는 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게다가 진달래, 살구꽃, 앵두꽃이 만발하고, 산은 마치 연두빛 안개가 오르듯이 빛났다. 거길 꽃가마가 힘차게 나가는데,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튿날, 형제들은 아버지 49재 절차를 의논하러 대둔산 태고사에 가고, 난 어머니와 함께 사망진단서를 들고 면사무소에 갔다. 채 1분도 안돼서 아버지는 주민등본에서, 호적에서 각각 삭제되었다. 아버지가 빠지고 어머니 혼자 외로이 남은 등본을 받아드니 눈이 시큰했다.

 

그런 다음 나는 서류를 갖춰 노동부에 산업재해신청서를 접수시켰다. 아버지는 스물 몇 살 때부터인가 광산에서 일하다가 돌가루를 마셔 진폐증 환자가 되었다. 그러고도 수를 누린 것은 다행이지만 늘 기침을 해대고, 가래가 끓어서 보는 사람들이 더 괴로웠다.

서류를 접수시키고나자 어머니는 차창 밖으로 먼산을 바라보셨다.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어머니의 마음을 아들인들 어찌 알겠는가. 열아홉에 시집와서 52년을 함께 사셨다. 난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 품을 떠난 게 벌써 30년이니 감히 어머니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어머니는 무슨 얘긴가 끝에 보상비가 나오면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보상비 나오면 공부 못시킨 애들한테 나눠줄란다.”

“그래야 어머니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하세요. 어머니 쓸 돈은 제가 드릴께요.”

 

큰형은 초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를 사지 못해 공부 시간이면 복도에서 배회했다고 한다. 연필이나 칼 따위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점심 도시락도 가져가지 못했다. 집이 어렵기도 했지만 살림 주권을 가진 할머니가 애들은 가르칠 필요 없이 농사나 짓게 하라면서 돈을 내주지 않아서 그랬다. 둘째형은 구기자 농사와 고추 농사를 망쳐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검정고시를 친다고 강의록 공부를 했지만 워낙 산골이다 보니 친구들이 다 나무꾼이요 농사꾼인지라 자연스럽게 공부를 폐하고 말았다. 거기도 사회니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울리자면 혼자 고고하게 공부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서당이라도 마친 것은 다행이었다.

 

그 다음이 난데, 다행히 고추농사가 풍년이 들어 중학교에 거뜬히 들어갔다. 둘째형이 중학교에 갔다면 난 틀림없이 진학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다음 넷째가 바로 나 때문에 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 해는 결실이 좋고, 한 해는 못하는 해걸이 과수처럼 넷째가 못가니 다섯째인 막내는 또 자연스럽게 중학교에 들어갔다. 물론 우리 시골에서 생각하는 중학교는 지금 서울에서 스탠포드대학이나 하바드대학에 유학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짜리가 매일 30리길을 걸어다니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첫해 5월쯤, 난 자다가 오줌을 싸고 헛것을 볼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다. 어린 자식에게 이런 고통을 감수시킬 부모가 우리 시골에는 많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부잣집들조차 자식을 중학교에 보내는 걸 꺼렸던 것이다.

 

집에 가니 천안 아파트에 ‘갇혀 살던’ 이모가 짐을 싸가지고 와 계셨다. 자식들이 다 떠난 집에서 어머니 혼자 주무시게 할 수 없어 내가 여든여섯이나 된 이모한테 사정한 것이다. 어머니가 동무 많은 시골에서 살고싶어 하시고, 이모 또한 동생하고 시골에서 살고싶다고 해서다. 이모가 시집갈 때 어머니는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니 자매답게 살아본 적이 없다면서.

 

다시 갖다놓은 위성 수신기를 틀어보았다. 핑클인지 에쵸틴지 하는 어린 것들이 아버지 떠난 빈 방에서 공허하게 떠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가 우리 산간 마을에서 유일하게 통화 가능하다며 사온 017 전화기를 어머니 목에 걸어드렸다. 밭에서든 산에서든 마실가서든 자식들 전화를 받고, 또 자식 목소리 듣고 싶으면 아무 때나 걸라는 뜻이다. 아들이 다섯이니 1, 2, 3, 4, 5중 하나를 1.5초만 누르면 자동 연결되게 해놓았다. 어머니 나이 일흔하나, 그걸 가르치는데 30분이 걸렸다. 그동안 사료를 제대로 주지 못한 개 두 마리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도 마지막으로 집을 떠났다. 나를 받치고 섰던 큰 기둥이 어디론가 사라진 느낌이다.

 

2000.4.


<아버지 49재 때 내가 1000권을 만들어 법보시한 '다이제스트 금강경'>

<아버지 보내주신 도천 스님, 101세로 하늘 가셨네>



- 작은 사진은 일제에 징용되었을 때, 19세.




'파란태양 > *파란태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나의 눈물   (0) 2008.12.18
바이칼, 하늘을 담은 호수   (0) 2008.12.18
내 딸 도란이에게   (0) 2008.12.18
내 고향 고랑부리  (0) 2008.12.18
우리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0) 2008.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