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 | 2007/05/11 (금) 21:02
내 몸에 흐르는 적혈구의 고향을 찾아서 1
- 바이칼, 하늘을 담은 호수
역사는 고고학적으로 해석해야만 그 진실이 밝혀진다고 믿는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지독하게 빠져든 중화사상과 사대주의 때문에 우리들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스스로 훼손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타의에 의해 또 한번 조작되었다. 지금은 또 어줍잖게 들어온 서양식 사관이 슬그머니 들어와 역사 해석 자체를 묘하게 비틀어 놓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고대사를 연구하기 위해 세 가지나 되는 함정을 피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는 오늘날의 식자들이 칠판에 마구 갈겨대는 알파벳 속에 숨어 있는 서양사관,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관된 식민사관, 또 하나는 스스로 천하고도 중원의 작은아우라고 자처하는 중화사관이다.
어떻게 보면 서양사관이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는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가 깊지 않으니 그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넘기 힘든 장벽은 바로 중화사관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조작했다고 열을 내는 사람들이 많지만, 기실 그 정도는 애교에 지나지 않고, 정말 큰 문제는 조선시대 5백년 내내 줄기차게 계속된 중화사관이 문제다. 좀 의식 있다는 사학자들조차 조선시대에 출간된 사료를 토대로 또하나의 중화사관 아류를 생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사대주의를 조장하는 삼국지를 기본틀부터 바꿔버린 자주 삼국지를 썼지만, 화독(華毒)에 걸린 독자들의 저항에 걸려 큰 보람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무턱대고 고조선이 장강 이남의 중원까지 아우르는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느니 주장하는 극단적인 민족사학도 접어두고, 또 그 반대의 탁상공론식 실증사학도 잠시잠깐 접어두고 우리의 역사 공간을 좀더 구체적으로 답사하기를 권하고 싶다.
고구려의 역사 공간인 만주나 부여의 역사 공간인 동몽골과 연해주 등지를 여행하다 보면 우리가 책상머리에 앉아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뜻밖의 사료를 얻을 수 있다. 발해가 왜 거란족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는가를 알기 위해 거대한 분화구인 지하삼림이나 인근의 용암 흔적을 찾을 수도 있고, 그 강하던 고구려가 왜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는가 알기 위해 만주 지역의 극단적인 대륙성 기후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부여의 고토에 있는 부이르호수에서 나는 조개를 돈이라 하고, 그 돈을 화폐로 썼다는 이야기쯤은 아이들 상식이고, 주몽을 가리키는 원어인 추모가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말이라든가, 주몽이 창업한 고구려 이전에 이미 구려 6부가 코리란 발음으로 존재했다는 사실 따위를 하나하나 찾아들어가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래서 수천 년 전의 고대사를 연구할 때는 예단은 금물이다. 가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도대체 왜 알타이산이 투르크계 아시아 민족들이 다들 신성시하는지 가서 눈으로 보고, 바이칼 호수가 뭐길래 그쪽 사람들이 천지(天池)라고 주장하는지 가 보면 느낌이 온다.
바이칼만 해도 그렇다. 바이칼을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나 역시 시베리아 동토 한 가운데 있는 차디찬 호수 정도로 이해했다. 거길 가기 위해 작년 5월 몽골에 먼저 들어갔는데, 세상에 5월초임에도 날씨가 몹시 추웠다.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기는커녕 초원이 그저 누렇기만 했다. 아직 싹이 트려면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었다.
그래서 바이칼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는 몽골보다 더 북쪽에 있는데, 거길 가면 얼마나 더 추울까 걱정되어 비행기를 타기 전에 내복을 껴입었다. 그러고는 바이칼 호수에 대해 미리 공부했다.
위치는 러시아 연방 동시베리아 남부. 길이 636km, 최대너비79 km, 면적 3만 1500 ㎢. 초승달 모양으로 북동∼남서쪽으로 길쭉하며, 부리야트공화국과 이르쿠츠크주(州)에 걸쳐 있다. 호수의 최대 깊이는 1,742 m로 세계에서 가장 깊다. 최고 40.5 m 깊이까지 육안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깨끗하다. 주위로부터 약 330개의 하천이 흘러들지만, 흘러나가는 수로는 앙가라강(江) 뿐이다. 저수량은 2만 2000 kℓ나 되며, 세계 담수호 가운데 최대를 자랑하며, 북아메리카 5대호 전부의 수량과 맞먹는다. 바이칼호는 표면적이 넓기 때문에 이 지방의 기후를 비교적 따뜻하게 해 준다고 한다. 8월의 표면수온은 9 ℃∼12 ℃, 연안에서는 20 ℃에 이른다.
그러나 이 정도 상식으로 거대 호수를 대번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이르크추크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였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보니 갑자기 더워졌다. 내복까지 끼어입은 내 사정과는 달리 시내에는 연두색 이파리가 가득 달린 가로수가 즐비하고, 만화방창한 봄꽃이 화사했다. 아가씨들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내가 대체 북쪽으로 올라온 건지, 남쪽으로 내려온 건지 감이 잡히지 않을 만큼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제야 나는 몽골이 해발 1500에서 3000미터 사이에 이르는 고원지대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비교적 평원지대인 그곳 바이칼 근처 지방은 고도 1백미터당 1도씩 따지는 상식으로 볼 때 엄청난 온도 차이가 났던 것이다. 더구나 시베리아의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14 내지 영하 48도라는데, 그중 14도 정도가 이 지역 날씨다. 이 정도는 백두산 자락이나 개마고원이 있는 함경도, 평안도 날씨와 비슷하다. 바이칼 호수 덕분에 온도가 더 떨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내가 목표로 정한 레나강 상류의 고아시아 발상 유적지가 있는 슈슈키노라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길을 가면서 밖을 내다보니 땅은 차지고 비옥했다. 그곳의 새 주인이 된 러시아인들이 여기저기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 정도 땅에 그 기후라면 오곡을 농사짓고도 남을 만큼 조건이 넉넉했다. 그러니 반드시 유목만 할 필요가 없고 반농반목이 가능한 나라가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농지를 따라가다 보니 방목되는 돼지떼를 여러 번 목격할 수 있었다. 몽골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시커먼 흑돼지가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고 있질 않은가. 더 가다보니 안면도나 백두산, 만주 등지에서 볼 수 있던 적송이 군락을 이루며 나타났다. 온갖 산마다 적송이 하늘을 찌를 듯이 반듯하게 자라고 있었다. 또 있었다. 그런 적송 사이사이로 붉게 핀 진달래가 김소월의 시마냥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차에서 뛰어내려 진달래밭으로 들어가 보니 우리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흔해빠진 그 진달래 그대로였다. 역시 몽골에서는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슈슈키노까지 안내한 고고학자의 설명을 들으니 그러한 기후는 몽골 북부 고원 지대를 경계로 연해주까지 이어지고, 거기서부터는 북만주를 통해 두만강까지 내려간다고 했다. 아마도 고아시아인들이 더 따뜻한 땅을 찾아 떠났다면 당연히 그 코스를 따라갔을 것이라고도 했다. 하긴 그 길목에서 부여족, 코리족(예맥)이 일어나고, 선비족이 일어났다.
슈슈키노 암각화를 보니 거기서 울산 반구대와 같은 암각화가 부지기수로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행 시간이 짧아 그 아래쪽의 말타 유적지는 가보지 못했지만 비디오를 통해 보니, 그곳에는 우리의 숨겨진 고대사의 비밀이 적지 않았다. 모계 사회의 증거, 샤마니즘의 원형 따위가 그대로 출토되어 수천 년 전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져 더 자세한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해야겠다. 조선시대의 중화사관을 거치면서 우리는 우리 역사의 시작을 지나치게 중원에 결부시켜 거기서부터 연원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황제 헌원이니 소호금천씨니, 또는 신농 복희 등에 매달렸다. 우리 스스로 중원을 세계의 중심지라고 단언하여 끊임없이 매달렸다. 오늘날의 세계사는 뉴욕과 워싱턴을 중심으로 씌어지고,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의 역사가 북경을 중심으로 씌어진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고대사까지 북경을 중심으로 씌어지는 것은 아니다.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굽어보는 땅 시베리아,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남진 루트가 된 연해주, 북만주 일대 모두 우리의 역사 공간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거기서 해모수와 버들꽃 아가씨의 사랑이 이루어졌고, 주몽이 말을 치면서 자랐다. 억지로 그 공간을 평양으로 끌어내리거나 백두산 자락으로 비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좀 더 열린 시각으로, 무한한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고대사 연구에 나서야 제 모습이 보이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