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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칭기즈칸의 고향을 가다

 

파란태양 | 2007/05/26 (토) 22:58

 

 

 

내 몸에 흐르는 적혈구의 고향을 찾아서 3

- 칭기즈칸의 고향을 가다

 

 * 사진을 옮겨오는 게 쉽지 않아 나중에 하기로 함. 사진설명만 붙여 놓음.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칭기즈칸의 탄생지 헨티아이마크를 찾아가는 길은 동쪽으로 왕복 1500킬로미터이다. 몽골의 동서 거리는 2392킬로미터(경도 차 32도 12분), 남북 거리는 1259킬로미터(위도차 10도 64분). 이 큰 나라 몽골 지도를 펴놓고 울란바토르에서 헨티산맥까지 그어보면 마치 이웃 마을처럼 가까워 보이지만 자동차로 가려면 며칠씩 걸리는 먼 길이다. 물론 그 사이에 호텔이나 여관, 화장실, 상수도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기대해서는 큰코 다친다.  

 

도시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울란바토르 동쪽의 위성 도시 바가노르(Baga-nuur)를 지나서야 흙길이 시작되며 본격적인 초원이 펼쳐졌다. 거기서부터는 수많은 갈래로 난 길 중에서 사다리를 타듯이 하나하나 골라가면서 동쪽으로 달려야 했다. 길이 있어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가기 때문에 길이 나는 것이라는 새삼스런 사실이 경이롭기만 했다. 적어도 서너 개가 가로세로 엇갈리는 초원의 거미줄 길은 번듯한 고속도로와 아스팔트길에 익숙한 ‘문명인’을 조롱했다.  

(초원에는 길이 없다. 길이 있어 사람이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이 가면 길이 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가다보니 거미줄 같은 흔적이 남을 뿐이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잡초가 자라나서 그 흔적마저 사라진다.) * 이하 괄호 안 글은 사진 설명. 사진은 화가 김호석이 찍었다. 

 

막상 대초원에 들어서자 우박이 쏟아지면서 한바탕 소나기가 내렸다. 먹구름이 몰려들자 방위를 알 길이 없어 막막했다. 나무라도 있다면 나이테를 보거나 가지를 살핀다지만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할흐족 운전 기사는 망망대해(茫茫大海) 같은 초원을 거침없이 달렸다.

 

서너 시간이나 달린 뒤에 휴식을 겸하여 들른 겔에서 ‘공포의 말젖술’(마시기만 하면 즉각 설사를 한다 하여 여행객에게 금지된 식품)를 얻어마셨다. 여행을 하는 동안 몽골인 안내인들은 어느 겔이든 거침없이 들어가 말젖술이나 차, 치즈, 들쥐 타르박 고기 따위를 얻어먹었다. 그렇지만 누구하나 낯선 손님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몽골인들의 좋은 인심도 자라온 환경이 다른 내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말젖술을 마신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서 기어코 소식이 왔다. 그렇다는 사실이야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몸에서 반응이 나타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도 없고, 그렇다고 몸을 가릴 나무나 바위도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차를 산꼭대기까지 몰고 올라갔다. 산꼭대기라면 보는 눈이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산이라고 해봤자 나무가 없기 때문에 어느 산이고 차가 올라갈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비를 맞고 바람을 맞았기 때문에 뾰죽한 봉우리는 없고 대체로 선이 완만해서 자동차가 오르지 못할 곳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산이 어머니의 젖가슴 모양으로 둥글둥글했다. 젖봉오리 같은 부분에는 예외없이 오보라는 돌무더기가 있어서 더욱 실감나게 느껴졌다. 특히 울란바토르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도시 주변에는 산마루마다 오보가 있었다.

 

막상 쫒기다시피 정상으로 올라갔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시야는 더 넓어지고, 보이지 않던 유목민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가지고는 시력이 5.0이나 된다는 몽골 유목민들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문명화가 시작되면서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가축을 확인하기 위해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안내인이 놀리기까지 했다. 하긴 정상에서 교정 시력 1.2인 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디 한 군데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정도라면 수십 리 이내에 있는 사람의 동작을 느낄 수도 있을 듯했다. 머뭇거리던 나는 하는 수없이 드넓은 초원을 향해 한바탕 방사를 해야 했다.  

 

초원에서는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한다. 바람이 불어도 바람을 맞아야 한다. 목이 마르면 강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가축을 잡아먹는 것 외에 그다지 선택할 방법이 많지 않다. 폭풍이 몰아치거나 천둥이 치면 초원에 납작 엎드려 코를 박아야 한다. 어쩌다 적이라도 쳐들어오면 속수무책으로 두 가지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싸워 물리칠 것인가,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도망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빨리 도망쳐도 지평선 밖으로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쓰러질 때까지는 쓰러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는 죽지 않는 강인한 기상을 초원에서 터득하는 것이다.  

 

이후 여행을 하면서 거듭 느낀 것은 초원의 산은 물결처럼, 숨결처럼 어울렁더울렁 생명의 춤을 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반의 한 가운데에서 한 점(點)으로 존재하는 나는 조잡하고 단순한 러시아산(産) 지프 UAZ-469를 타고 있고, 좌우로 바이탈 사인(Vital Sign)이 계속 지나가는 듯한 산이 그 지루한 게임의 유일한 변화였다. 그런 원반의 한 점을 향해 달려드는 길은 숨바꼭질하듯 숨기도 하고, 갑자기 서너 개가 한꺼번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럴 때마다 전혀 동요하지 않고 길을 가는 몽골인 기사는 바로 그 산의 형상을 끊임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낮으나마, 그리고 지평선 너머 낮게 일어났다가라앉았다하는 능선을 교통 표지판삼아 그는 주저없이 방향을 정하고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몽골의 산에서는 대부분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평균 해발 고도가 1580미터인 데다가 칭기즈칸 탄생지 주변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0도에 불과하고, 전체 평균 강수량은 겨우 200밀리미터쯤이다. 한국의 장마철로 치자면 1일 강수량에 불과하다. 이런 상태에서 초목(草木)이 정상적으로 생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초원에는 추위에 강한 풀이 자라고, 산 정상에 이따금 보이는 나무는 타이가 수종(樹種) 뿐이다.

 

바가노르시를 벗어나 한 산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참 산 좋다. 이 산 이름이 뭐지?” 그러나 안내인은 산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산에서는 산 이름을 말하지 않아요.” 몽골인들은 누구나 산을 경배하기 때문에 산에 안겨 있는 상태에서는 함부로 이름을 들먹거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산을 내려가고도 길게 늘어진 산자락을 훨씬 벗어난 다음에야 나는 그 산이 하마르-다와(Hamar Davaa)산이라는 말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초원을 여행하면서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은 시원한 시계(視界)와 더불어 쉬임없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이었다. 그 청량한 바람은 몸과 마음의 찌꺼기를 말끔하게 닦아 주었다. 습도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여름철이면 ‘물먹는 하마’라는 제습제를 장농마다 집어넣고 부산떠는 한국의 여름과는 달리 몽골인들은 도리어 물이 가득 담긴 컵을 가게 진열대나 전시관 등에 비치한다. 몽골의 공기가 얼마나 상쾌한지 초원의 언덕에 서서 코를 킁킁거리면 혹한을 이겨내고 꽃을 피워낸 갖은 들꽃 향기가 너무나 감미롭게 느껴진다. 특히 초원의 향기를 대표하는 약쑥 내음은 생명의 기운을 일으켜 주었다. 누구든지 8월의 몽골 초원에 누워 본 사람이라면 평생토록 그 향기를 잊지 못할 것이다.  

(8월이면 초원에는 온갖 꽃이 만발한다. 흰꽃은 대부분 솜다리꽃(에델바이스)으로 몽골 초원에서 구절초와 함께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몽골의 말과 양은 이 솜다리꽃과 약쑥, 구절초 따위를 먹고 자란다.)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초원의 향기는 이 약쑥 외에도 자운영, 엉겅퀴, 질경이, 창포, 구절초, 명아주, 야생 양귀비, 억새풀, 여뀌, 야생 마늘, 달래, 제비꽃, 그리고 내 상식을 넘어서는 그밖의 들꽃들이 풍겨내는 오케스트라였다. 이 들꽃들의 키는 대부분 한 뼘 미만이었고, 그마저 가축떼가 지나가고 나면 새끼손가락만하게 잘려나가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골프장 잔디처럼 보인다. 너른 초원의 한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바라보면 마치 잘 도열해 있는 칭기즈칸의 병사들을 보는 듯했다. 잡초처럼 태어나 야생마처럼 길들여진 13세기 유목 군대의 기상이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칭기즈칸의 숨결같은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면 잡초들은 일제히 일어나 창을 치켜들면서 “우우우우!” 하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이따금 만나는 유목민들이 “추추추!” 하면서 박차를 가하거나 “우우우우!” 하면서 말떼를 몰아갈 때마다 그런 환영이 일어나 “저게 칭기즈칸 군대야.”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고르반-바란(Gurban Baran) 솜에 이르러 빵과 과일을 샀다. 그러나 ‘빵과 과일을 샀다.’는 이 말은 기억해 둘 필요가 전혀 없다. 다른 곳은 아직 가보지 않아서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칭기즈칸 루트에서는 생수이든 음식이든 먹을 수 있는 것은 그때그때 사두어야지 다음 도시를 기대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후미진 골방 같은 곳에서 한두 개씩 물건을 숨겨놓고 파는 몽골의 시골 가게는 차마 가게라는 화려한 이름을 붙여주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그러므로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은 포기하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칭기즈칸을 찾아가는 동안 내가 실수한 것중의 하나가 시계다. 나는 평소에도 시계를 차지 않기 때문에 무심코 그냥 갔다. 나침반 따위를 챙긴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데 일행 모두 다 그 모양이었다. 믿었던 자동차 시계는 대단한 옵션이라도 되는 건지 이 단순조잡한 지프에는 달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해가 뜨면 아침이구나, 해가 지면 저녁이구나 생각하면서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나침반이 없어서 한 차례 길을 잘못든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얼마나 헤맸는지 다행히 시계가 없어 재 보지를 못했다. 그때 우리는 서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는데, 내가 무심코 뒤를 바라보니 마침 해가 나타났다. 늦은 저녁 무렵이었으므로 해는 앞쪽에 있어야 마땅한데 분명히 차 뒤를 계속 따라왔다.

 

“몽골 해는 동쪽으로 지나?” 그랬더니 이 몽골 안내인은 “해는 남서쪽에서 떠서 동북방으로 집니다.” 하고 아주 태연하게, 그리고 몽골국립대학교 졸업생답지 않게 매우 ‘무식’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몽골과 한국의 위도가 다르다 해도 그 말은 좀 심했다. 그래서 같은 대학 물리학과 출신인 운전기사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친구의 상식도 조금 낫긴 하지만 거기서 거기였다.  

 

“해는 남쪽에서 떠서 북쪽으로 집니다.” 이 황당한 대답에 나는 손바닥에 가상 지구를 그려놓고 태양 궤도를 몇 번이나 그려보았다. 끈질긴 내 의심끝에 결국 운전 기사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는 길을 돌렸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몽골의 해는 동남방에서 떠서 북서쪽으로 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것도 여름에 한해서겠지만 논리적으로 토론할 형편이 안되고, 한편으로 얼마나 길을 잘못 들었는지 운전기사가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해서 그쯤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고르-바란 솜에서 멀지 않은 곳을 달리다가 나는 우연히 바람을 가르며 초원을 질주하는 아가씨를 만났다. 몽골 전통 복식을 입고 좌우로 박차를 가하는 격렬한 율동, 칭기즈칸의 병사들처럼 둥그런 원을 그리며 날리는 채찍, 그 고운 입에서 흘러나오는 “추우 추우!” 하는 맑고 힘찬 목소리. 어찌나 바람을 맞았는지 여름철임에도 발그레한 실핏줄이 터져나온 볼, 칭기즈칸이 사랑한 야생마 콜란처럼 불타오르는 눈빛, 그러면서도 투박한 입술로 문 부드러운 미소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한번도 빗지 않은 듯 헝클어진 단발머리, 크림 한번 바르지 않은 듯한 검붉은 얼굴, 아가씨의 손을 보니 얼마나 고삐를 많이 쥐었는지 남자의 손처럼 거칠었다.  

 

아, 이 아가씨야말로 칭기즈칸을 길러낸 몽골의 어머니 허엘룬이 아닌가. 이름을 묻자 ‘톨가’라고 대답했다. 뜻을 묻자 ‘솥 받침돌’이라고 말했다.

사흘 뒤 억지로 찾아간 톨가네 겔에는 그 흔한 침대도 없고, 자산 가치가 있을 만한 물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낯선 물건으로는 손때가 묻은 마두금 한 개 뿐이었다. 세상에, 톨가는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낡은 양피를 깐 겔 안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내들이 떼를 지어 찾아왔다는 사실 때문인지 톨가는 얼굴을 몹시 붉히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다가 말젖술을 한 잔씩 돌렸다.  

 

가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송아지 스무 마리에 말 스무 마리 정도라고 했다. 안내인에게 물으니 그 정도 자산은 가난한 살림살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톨가는 6남내중 차녀로 장녀는 이미 시집을 갔고, 어린 동생들은 목축을 도울만큼 나이가 차지 않았던 것이다. 6월, 7월, 8월 석 달은 여름방학을 맞은 톨가가 집에 돌아와 목축을 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계절은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 밖에 일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 살림에 대학을 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대학 등록금이 준마 세 마리값이나 되기 때문에 톨가네의 가축 가지고는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식구가 먹을 수 있는 말젖이나마 짤 수 있는지, 아니면 어린 시절의 칭기즈칸처럼 모자라는 식량 대신 들쥐 타르박을 잡아먹으며 연명하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하루쯤 그 겔에 머물며 톨가네의 생활을 관찰해 보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어서 그러지를 못했다. 결국 나는 가난한 유목민, 그러나 꿈을 버리지 않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이 몽골인들의 의지를 읽고는 시큰한 가슴을 안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    

(툴가네 겔에서 바라본 초원의 풍경. 툴가네의 가난한 살림살이 넘어 겔밖으로 보이는 대초원은 생명이 꿈틀거린다. 초원이 있으므로 그들은 희망도 믿는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초원의 모습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가운데 어느 순간 거대한 늪지대가 나타났다.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 자동차로 칭기즈칸을 만나러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지옥의 코스이다. 자동차 바퀴가 푹푹 빠지는 것은 보통이고, 몇 시간 달리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해도 극성스런 모기 때문에 차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웠다.  

 

모기가 너무나 많아서 소변조차 보기가 어려웠다. 준비해간 모기약을 차안에 피워두고, 온몸에 모기퇴치약을 뿌려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모기가 얼마나 많은지 자동차 엔진소리에 비해 모기 울음소리가 그다지 작게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 늪지대를 가로질러 ‘칭기즈칸 루트’라는 옛날 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습지를 마차가 달릴 수 있도록 닦아놓은 길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자동차조차 그곳으로 달리지 못했다. 몇 시간을 달렸는지 가슴 졸이며 조심조심 차를 몰아갔는데, 그러는 중에 겔 한 채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늪지대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해가 졌다. 그때는 얼마나 두려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하다. 바퀴가 푹푹 빠지는 물구덩이를 통과할 때마다 우리들은 운전 기사를 격려하는 박수를 손바닥이 아프도록 쳐댔다.  

 

칠흑같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낯선 겔 세 채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겔은 몽골 유목민들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자동차 라이트에 비친 이 겔에는 커다란 위성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그 망망대해 같은 초원 한 가운데서 그들은 위성 안테나를 통해 세상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CNN, NHK, 중국 텔레비전, 몽골 텔레비전이란 단어하고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초원에서 그들은 태연하게 양쯔강의 물난리며 한국의 외환 위기를 보고들었다. 어떻게 양이나 치고 말이나 기르는 그 유목민들이 위성으로 텔레비전을 보려고 생각했는지, 그 발상이 의아했다.

  

(위성 수신 안테나를 설치하여 몽골 텔레비전은 물론 CNN과 NHK 방송을 겔에서 들여다 보는 21세기형 유목민. 그러나 몽골 초원에 사는 유목민들은 대부분 천년 전이나 이천년 전이나 삼천 년 전과 거의 다름없는 원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겔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시계도 걸려 있었다. 나는 울란바토르를 출발할 때부터 공간 감각도 잃고, 시간 감각도 잃은 채 거의 표류하다시피 그곳까지 갔건만 정작 그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들은 공간과 시간을 입체적으로, 시스템적으로 이용하는 21세기 유목민이질 않은가. 노르블린(Norovlin) 솜에서 첨단 문명을 살아가는 이 유목민 가족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말이 아닌 오토바이를 타고, 활이 아닌 총을 들고 사냥을 나갔다.

 

늪지대를 벗어나면서부터 함께 여행을 한 김호석 화백은 직업적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몹시 흥분했다. 그때쯤 고구려 고분 벽화에나 나오는 특이한 산자락이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파도가 치는 듯한 산자락이 북쪽으로 낮게 깔리고, 나머지 3면은 그대로 지평선 뿐이었다. 투르크계 민족의 정서를 담은 산의 곡선, 고구려 음률처럼 흐르는 이 산마저 없었다면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동몽골 쪽으로 갈수록 ‘유목 정착’을 하는 사람들이 한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동몽골은 서몽골에 비해 해발 고도가 낮고 강수량이 조금 더 많은 편이어서 농경이 가능했다. 나뭇가지로 흙을 파보니 중국 동북부의 흑룡강이나 송화강 유역의 흙처럼 검고 기름졌다. 밭에는 양배추, 완두콩, 오이, 옥수수, 당근, 파, 장다리, 감자, 빨간무 따위가 거름기 많은 검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고 있었다. 동몽골 지대로 들어갈수록 해발 고도가 더욱 낮아지면서 수종(樹種)도 소나무, 회벽나무, 하르모드 같은 것으로 바뀌어 갔다. 동몽골 지역은 나무만 많다면 고구려와 발해, 금나라가 발흥했던 흑룡강이나 송화강 인근의 지형과 거의 비슷하게 보였다. 특히 발해의 동경성터가 있는 평야 지대하고는 거의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오논강을 지나 마지막으로 방문한 도시가 다달(Dadal) 솜, 헨티산맥 끝자락에 붙어있는 여행의 최종 목적지였다. 겔보다는 소나무로 지은 통나무집이 더 많아서 이국적인 풍광이 오히려 낯선 마을이었다.

동상과 큰 기념비가 있는 공원을 대략 둘러보고 테무친이 탄생한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탄생지라는 지점에는 커다란 바위가 한 개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 마치 오보처럼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여느 오보처럼 지폐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술병이 어지러이 굴러다녔다.

 

동남쪽으로 발지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등뒤로에는 홍송(紅松)이 우거진 숲이 바람을 막아주었다. 그 땅에 앉아보니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긴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런 탓도 있었겠지만 그 땅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바로 그 자리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의 테무친이 눈에 밟히는 듯했다. 영웅호걸이 날만한 땅인가 풍수지리적으로 따진다 해도 좌청룡, 우백호, 안산, 진산 등 결코 빠짐이 없는 땅이었다.  

 

(칭기즈칸 탄생지 기념 표지석)

   

나는 칭기즈칸의 탄생비 앞에 소설 <천년영웅 칭기즈칸> 한 질을 바치고, 준비한 음식을 진설한 뒤 절을 올렸다. 테무친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 청년도 약혼녀 두와(햇빛)와 함께 절을 올려 주었다.

마을 청년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칭기즈칸이 뛰어놀았을 만한 곳을 무작정 돌아다녔다. 아버지가 메르키트족인 줄도 모른 채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땅이다. 어디선가 “테무친!” 하고 부르는 어머니 허엘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면 양을 몰러나갔던 테무친이 뛰어들어 오고, 이어서 카사르, 카치온, 테무게가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족장 예수게이는 어디를 갔나. 타타르부 잔당을 치러 용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몰려갔을 것이다.

 

아마도 탄생지 근처 어딘가에 겨울용 겔을 친 자리가 있을 것이고, 칭기즈칸 일가는 적어도 이곳 수십 리 인근을 옮겨다니며 목축을 했을 것이다. 부르칸산으로 숨기 전까지는 발지강을 따라 말에게 물을 먹이고, 백리 밖 오논강까지 사냥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몽골부가 자리잡은 동몽골은 부여(夫餘)가 일어나고, 고구려 시조 주몽이 태어난 땅이다. 그러니까 주몽의 고향도 그곳에서 멀지 않은 동몽골 땅 어디일 것이다. 주몽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따뜻한 땅 동남쪽을 찾아 내려갔다. 몽골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코리족이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맥(貊)족이라고 적는다. 아마도 사냥을 즐겼던 민족이었거나 그 기상을 지녔던 민족이었을 것이다. 동남쪽, 동몽골에 비가 내리면 무지개가 걸리곤 하는 그 땅으로 내려간 그들의 후손, 그 끝자락에 내가 붙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몽골 사람들은 고구려인들이 떠나간 그 땅을 가리켜 솔롱고라고 불러왔고, 그 사람들을 솔롱고스라고 불러왔다. 그뒤로 여러 민족이 일어났다 스러졌지만 그저 그 시대마다 달리 불린 이름일뿐 근본은 바뀐 게 없다. 고구려인들이 떠나간 자리에 절세의 천년 영웅 칭기즈칸이 나서 세상을 변혁시켰다. 칭기즈칸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인류는 아직도 미몽에서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서구의 르네상스, 과학기술, 자본주의가 모두 칭기즈칸 때문에 일어난 결과물 아닌가.  

 

나는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사는 이 땅까지 사흘간 자동차로 달려오면서 온갖 현대 문명의 편안함을 누렸다. 자동차를 이용했고, 카메라, 달러, 의약품, 패스트푸드 등을 가방마다 가득 담아 한시도 불편한 줄 모르고 길을 달렸다. 이 모든 문명의 편안함을 들여다보면 그 근원은 칭기즈칸에 닿는다. 칭기즈칸이 아니었다면 유럽은 중세의 야만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칭기즈칸이 던진 부메랑이 아시아를 강타하고, 그의 고향 몽골 고원을 가난에 찌들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칭기즈칸 탄생지를 향해 며칠간 달려오는 동안 내가 만난 몽골인들의 눈에서는 칭기즈칸의 눈처럼 불이 있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칭기즈칸의 뺨처럼 빛이 있었다. 역사는 길다. 8백년 전의 인물 칭기즈칸을 찾아 내가 여기 온 것처럼, 역사는 또다른 길로 들어설 것이다.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눈빛을 지키고 있는 한 희망은 언제든지 찾아들 것이다.

 

몽골인들은 기본적으로 고난을 극복해 낼 줄 아는 민족이다. 혹한을 이겨내며 목숨을 부지할 줄 안다. 그들은 아직도 거의 맹수에 가까운 민첩함과 소나 곰같은 인내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폭발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기든가 지든가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그들은 다시 한번 천둥치듯 일어날 것이다.  

 

칭기즈칸의 땅이 이렇게 살아 있는 한 그 기운은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땅이 살아 있으니 그 땅에 새로 태어나는 몽골인들에게 그 기운이 오를 것이고, 그 모두가 ‘리틀 칭기즈칸’으로 자랄 것이다. 8백년 전의 인물이 이렇게 생생한 기운으로 살아 남은 인물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이다. 8백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 칭기즈칸을 느꼈다. 그 자리에 여전히 풀이 자라고, 여전히 말떼가 뛰놀고, 그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어느 것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나 하나만 낯설 뿐이다. 칭기즈칸의 땅에 드러누워 바람을 느끼고 꽃향기를 맡으면서 하늘을 우러렀다. 그래서 칭기즈칸이구나, 내 머릿속에서 줄곧 떠나지 않은 생각이었다.  

 

- 1998년 8월 11일부터 18일까지 7일간 칭기즈칸의 고향이 있는 몽골의 헨티아이마크 다달솜을 다녀왔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수묵화가 김호석가 함께 했다. 통역은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비지야, 운전은 산림경찰 간밧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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