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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꽃

 

파란태양 | 2007/05/11 (금) 21:14

 

아버지의 꽃

 

 

- 10년 전,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글을 오랜만에 꺼내보았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78세가 되던 2001년 봄에 당신의 조상들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버지 나이 73세를 뭐 대단한 줄 알고 쓴 이 시절이 그립습니다. 어머니 나이가 벌써 76세시거든요. 전 이런 어머니를 아직도 옛날 일 잘하던 새댁쯤으로만 알고, 시간없어 시골에 갔다오기만 해야 하니 그새 김치 담가 놓아라, 고춧가루 열 근을 사놓아라, 이렇게 ‘어머니를 부리고’ 삽니다. 우리 어머니가 백 살이 넘도록 이렇게 영원히 부려먹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제발 지금까지 늙으신 거야 하는 수없고, 앞으로는 절대 늙지 말고 이대로 쭈욱 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어머니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산해보니까 어머니 백 살이면 저는 68세군요. 그쯤되면 제가 어머니 없이도 꿋꿋이 살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지금은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제 나이 마흔여덟인데두요. 하긴 쉰여섯이나 되는 우리 형이 가끔 어머니한테 떼를 쓰는 걸 보면 그것도 장담은 못하겠습니다만. 아 참, 아래 글에 나오는 꽃은 석산(石蒜)과 비슷한 상사화입니다. 그땐 이름도 몰랐어요.

-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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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올해 73세시다. 난 아직도 아버지 나이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아직도 쌀 한 가마 정도는 거뜬히 어깨에 메고, 아직도 나뭇짐 한 지게쯤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짊어지실 것만 같다. 씨름 대회에 나가 상도 타시고, 멀리서도 나를 부르시는 음성이 천둥처럼 울릴 것만 갔다.

그러나 다 부질없다. 아버지의 패인 주름살 속으로 묻혀 버린 기억들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 아버지의 나이를 실감한 것은 작년쯤이었다.

작년 봄, 우리 시골집 장독대 옆에 해마다 오르던 난이 푸른 싹을 무수히 밀어 올렸다. 시골에 고향을 둔 독자라면 아는 분도 있겠지만, 장독대 옆이나 뒤란 어딘가에 긴 이파리만 죽죽 뻗어 올라오는 토종 난류처럼 흔해빠진 것이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내가 사는 용인 집에도 있을 정도이니까. 그러나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난은 그렇게 흔해 빠진 것이 아니다.

 

 

이 난은 내가 기억을 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줄곧 그 자리에서 잎을 피웠다가 여름이면 지곤 했다. 그러기를 내가 본 것만도 30년이 넘게 한 것이다. 이 난은 너무나 허무하게도 이파리만 내놓다가 그냥 지곤 했다.

이른 봄, 매화와 함께 연두색 싹을 쳐들고 봄을 알리던 난. 그러나 그 이른 자태만큼 오래도록 사랑을 받지 못했다.

도무지 꽃을 피우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꽃같은 것은 처음부터 피우지 않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러던 이 난이 작년 봄, 아마도 늦은 5월쯤이었던 것같다.

갑자기 대궁이 올라오더니 꽃송이가 맺히더라는 것이다. 이 소식은 금세 형제들에게도 다 알려졌다.

-장독대 옆에 있는 그거, 난 같은 거 말이다. 그게 꽃을 피웠다. 한번 구경와라. 무지무지 이쁘구나.

나 역시 전화를 받고 부모님만 사시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 50년만에 피었다!

아버지의 일성이었다. 장독대로 달려가 보니 정말이지 환상적인 자태로 꽃이 피어 있었다. 은행나무가 수십 년만에 열매를 맺고, 선인장 중에는 백년은 되어야 피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아직 내가 경험해 본 것은 3년 기다려 열매를 본 대추나무와 배나무 정도밖에 없다. 그렇게 오랜 세월 정성을 들여 기다린 것이 없다. 하물며 50년씩이나.

-와아!

-꽃도 피우지 못하는 바본 줄 알았더니.

아버지는 감회에 찬 얼굴로 자랑스럽게 난을 설명했다.

-내가 스물 몇 살나던 해, 그 뭐냐, 신불암(神佛庵) 터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신불암하면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꽤 유명했던 절인데, 어쩐 일인지 지금은 없어져 깨진 기왓장만 남아 있는 곳이지. 그런데 그 절터 한쪽에 말없이 피어 있는 이 난을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웠지. 50년 전에 내가 신불암 터에서 보았던 그 난이 바로 이 꽃이었어. 50년만에 다시 보게 되었구나. 내가 죽기 전에 그 꽃을 다시 보다니...

아버지는 50년전, 그 혈기방장하던 20대를 그리워하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보셨다. 내게도 20대가 있었으니 아버지에게도 있었겠지.

 

 

그런 지 이제 일년이 지났다.

나는 시골에 내려갔다가 딸아이에게 줄 기념비적인 선물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이 난을 생각했다. 그래서 다섯 촉을 따로 떠서 용인 집으로 가지고 와 마당 한쪽에 심어 놓았다.

이제 앞으로 50년 뒤에는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의 꽃’이 피어나겠지.

내 나이 88세, 후훗. 딸아이 53세. 서기로는 2045년이다.

실감이 안가는 숫자들이다. 나로서는 이번에 옮겨다 심은 아버지의 꽃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그런 세월이 있을 거란 믿음만 남아 있고, 내가 아버지의 꽃을 옮겨다 심었다는 사실은 내 딸아이의 기억 속에 전설처럼 아스라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역사의 연속성을 별로 믿지 않았다. 내 삶이 내 생각이 자식에게, 또 그 자식에게 이어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아직 나이가 적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에 난을 옮겨 심으면서 처음으로 생의 연속성을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이 난에 관한 한 50년 뒤에 내 딸은 나를 생각할 것이다. 아마도 내 딸이 낳은 내 손자, 손녀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건 우리 할아버지가 100년전에 어느 절터에서 옮겨온 것인데, 그 뒤 50년만에 꽃이 피었단다. 그걸 우리 아버지도 나를 위해 또 옮기셨다. 그래서 그로부터 다시 50년이 된 오늘 마침내 아버지의 꽃이 피었구나. 우리는 또 우리 후손을 위해 또한번 난을 퍼뜨리자. 50년 뒤, 그 꽃이 필 때에는 너희들도 아들딸을 낳고 어쩌면 손자까지 볼지도 모르겠구나.

 

흐뭇한 일이다. 이렇게라도 무엇인가 생명을 전한다는 것은. 더욱이 내 핏줄을 타고 이 맑고 향기로운 ‘아버지의 꽃’이 대대로 내려간다는 사실은 참으로 가슴 벅차다.

 

 

- 1995년

 

 

* 지금보니 너무 씁쓸하다. ‘아버지의 꽃’을 옮겨심은 우리 집은 지금은 남의 집이 되었다. 기윤이 학교 문제로 그 시골을 나왔기 때문이다. 아쉬워라, 참으로 아쉬워라. 나이를 먹을수록 아쉬움은 늘어만간다. ‘아버지의 꽃’을 보러 남의 집이 된 옛 우리 집에 일부러 가보았다. 아직 대궁이 오르지 않고 있었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