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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북방 기마민족의 고향 알타이산 답사기

파란태양 | 2007/05/27 (일) 08:54

 

내 몸에 흐르는 적혈구의 고향을 찾아서 4

- 북방 기마민족의 고향 알타이산 답사기

 

- 알타이가 부른다

 

알타이산(Altai Mts.)은 투르크(돌궐) 민족의 발상지이자 초원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기마민족이 신성하게 여겨온 신앙의 대상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북동아시아에 걸쳐 세로로 그은 듯한 이 산맥의 총길이는 2,000 km, 5천리이다. 폭도 어찌나 큰지 용(龍) 수백 마리가 북해(北海)를 향해 질주하는 듯하다. 이렇게 긴 만큼 이 산을 다 돌아다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알타이가 걸친 나라만 러시아(알타이공화국)․카자흐스탄․몽골․중국 네 나라이다. 남쪽으로는 고비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 머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아래쪽은 고비알타이, 허리쯤은 몽골알타이(최고점 후이툰:4,355 m), 어깨부분은 소비에트알타이(최고점 벨루하산:4,509 m)라고 한다. 

 

고비알타이에서 몽골알타이까지는 거의 나무가 자라지 않는 벌거숭이가 대부분이지만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1,500~2,500 m 산지에는 낙엽송․전나무 등이 무성하다. 물론 맨꼭대기에는 한여름에도 백설이 눈부시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이 아니라 빙하들이다.

알타이란 말은 황금을 뜻하는 알탄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마따나 이곳에서 발흥한 민족들은 강력한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원과 유럽을 지배했었다.(흉노-훈, 투르크, 몽골 등) 실제로 이 산맥에서는 납․아연․주석․금․백금 등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알타이산은 우리의 고대 국가 신라하고도 큰 연관이 있다. 신라 지역에서 발흥한 여러 김씨들의 연원이 실은 알탄이란 뜻의 금(金)과 일맥 상통하는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알타이산을 감상해보자. 

 

지난 7월 9일, 나는 친구인 화가 두 명(한 명은 수묵화가 김호석), 그리고 유명 사진작가인 범어사의 큰스님(관조 스님) 한 분을 모시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중인 안다(친구)의 빈 아파트로 가서 여장을 풀고, 여행 준비 겸 고산 적응에 나섰다. 알타이산 정상을 등반하지는 않고 산밑을 자동차로 달릴 예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3000m 이상이므로 신체가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 몽골인들은 틀렸어. 저래 가지고는 미래가 없어! 

 

마침 몽골인의 축제 나담이 열려 장거리경주를 구경하러 갔다. 작년에는 결승선에 서서 30km를 달려오느라 땀에 흠뻑 젖은 경주마와 헐떡거리면서도 이를 악문 채 휘파람을 불어대는 기수들을 구경했는데, 이번에는 출발선에 가서 경주마들이 출발하는 광경을 보기로 했다. 후진국일수록 경찰과 군인의 힘이 막강한데, 과연 이 사람들이 여기저기 포진해 있어서 출발선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선에 잠입하여 뙤약볕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그 시각, 매사 뿌리를 뽑아 살펴보는 걸 좋아하는 동료인 화가 한 명과 스님은 경주로 중간쯤의 높은 언덕 밑 수로에 숨었다. 수백 마리 말이 높은 언덕에서 뛰어내려오는 장면을 찍기 위한 고행이다. 이들은 과연 몇 시간 후, 하늘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군마(群馬)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폭풍같은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면서 높은 언덕에서 일제히 떨어져내리는 듯한 몽골말들의 질주를 보고나서 두 사람은 몇 시간의 사투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필름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모르지만. 

 

두 사람에 비해 나는 그다지 좋은 구경을 하지 못했다. 출발선을 지키는 것은 군인들 몫이었는데, 이놈들 또한 어찌나 지루해 하던지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내내 얼차려 비슷한 훈련에 골몰했다. 훈련이 아니라 그것은 분명 오락이었다. 쓸데없이 흩어져, 모여,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어린 병사들을 학대했다. 인간 하찮은 것들은 어딜 가나 자그마한 권력이라도 쥐면 저 짓이구나 싶어 짜증이 났다. 그러자니 하릴없이 지프에 앉아 물만 마셔야 했다. 디지털 영상을 촬영하는 친구도 경찰들에게 아부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현장에 더 가까이 가려 애를 썼지만, 그 아까운 담배를 몇 개피나 낭비해가며 겨우 몇 걸음 나가면 이번에는 군인들이 나서서 눈알을 부라렸다. 본심이야 어쨌든 원래 눈깔이 부리부리한 몽골인들이 성을 내면 금세 칼이라도 들었다 내리칠 것처럼 무섭다.(전깃불을 보지 못한 몽골인들의 눈은 짐승의 눈처럼 안광이 시퍼렇게 튄다. 휴전선 철책을 지키는 우리 군인들처럼.) 그러니 멀찍이 물러설 수밖에 없다.

밖에서는 그 지경이고, 지프 안에서는 러시아 억양의 두 몽골인(기사와 통역)이 귀가 아프도록 지저귀어 참말 견디기 힘이 든다. 

 

드디어 멀리 경주에 나설 말들이 떼를 지어 나타났다. 모두가 다 어린 애들이다. 초등학교 3학년에서 5학년쯤 될 듯 애띤 얼굴인데, 얼굴을 보면 우습게 보여도 말에 탄 모습 전체를 보면 칭기즈칸 시절의 기마병 같다. 그만큼 고삐를 쥔 자세나 등자를 차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등번호를 찬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출발선은 갑자기 바빠졌다. 군인들은 출발선 사이사이 도열하여 그들을 맞아들이고, 경찰들은 민간인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악을 쓰고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출발선에 경주마들이 다 정렬하기도 전에 일단의 말 몇 마리가 말굽을 차면서 바람같이 날아갔다. 그러자 군중심리에 이끌려 다른 말들까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한참 있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출발 신호를 내야 할 책임자가 그들의 꽁무니를 향해 신호탄을 쏴주었다. 안그러면 경기 자체가 무효가 되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쏜 것이다.

“몽골인들은 틀렸어. 저래 가지고는 미래가 없어!”

 

내가 몽골인 통역과 운전 기사에게 푸념하자 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고, 금세 환호성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긴 땅을 박차고 나가는 수백 마리 경주마들이 먼지를 구름같이 일으키면서 달려나가는 광경은 자못 아름다웠다.

그러면 뭐하는가. 저희들끼리 공정하게 경쟁할 줄 모르는 걸.

야성(野性)이 지나친 탓일까, 출발 부정은 나담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울란바토르 근처에서 벌어진 경주에서도 똑같은 일이 더 심하게 일어났지만 그대로 경기가 치러졌다. 내가 이렇게 비판하는 이유가 있다. 몽골인들은 역사적으로 분열이 잦고 지나치게 개인적이다. 그런 민족성을 간파한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몽골을 수백년에 걸쳐 철저히 농락할 수 있었다. 오늘날 내몽골, 외몽골, 러시아 바이칼 주변 등 나라가 세 조각난 것이지만, 그들은 아직 옛 영화를 찾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하고는 먼 길 함께 갈 수 없다 

 

나담이 끝난 뒤 우리는 고비알타이에서 몽골알타이까지 운전해 줄 운전 기사를 찾았다. 몽골에 갈 때마다(이번이 우리팀이 네번째 가는 여행이다) 차를 운전해주던 간밧이란 젊은이가 있는데, 이번에도 이 친구 차를 하루 3만원에 타기로 약속했다. 다만 일행이 많아지다 보니 차량을 한 대 더 구해야 되는데, 여기서 말썽이 났다. 어찌어찌 연결된 사람은 지도전문가로서 몽골 각지를 여행하면서 지리 자료를 모은 경험이 있다는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그는 하루 이용료로 120달러를 요구했다.

“120달러? 혹시 저 친구 12달러를 잘못 말한 것 아니야?”

 

통역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눈치가 이상했는지 그 베테랑은 원헌드레드(검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가) 투웨니(엄지검지 두 손가락을 치켜올리면서) 달러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기름값과 숙식비를 제외하고 순수 차량 이용료만 그런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렌터카를 쓰자면 그만한 돈을 내는 건 상식이지만, 몽골의 대학교수 월급이 50달러고, 중령인지 대령인지 하는 고급 장교(영어통역 아버지의 경우)의 월급이 60달러인 형편에서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간밧은 하루 이용료가 3만원(28달러쯤)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약 네 배 정도 되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그 친구를 고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간밧더러 친구 한 명을 구해달라고 했는데, 이 친구가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그도 120달러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50달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무래도 고비는 복사열이 너무 강해서 엔진이 멈출 수도 있고, 알타이는 자갈길이 거칠어 타이어가 터질 수도 있거든요.”

 

결국 다같은 운전을 하는데 누군 120달러를 받고 누군 30달러도 못받느냔 것이다. 조라치 리라고 불리는 동료가 약속대로 하라고 거듭 촉구했지만 이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래도 몽골 사람들에게 약속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간밧하고도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하고는 함께 여행할 수 없다. 네 차는 그만 타겠다.”

그러고서 그날까지 이용료를 즉석에서 계산해 주어버렸다. 녀석은 세게 나가면 우리가 굽힐 줄 알았던지 갑작스런 해고 통보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난 그러거나말거나 딴 운전자를 찾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그러느라고 알타이 여행은 또 하루가 늦어졌다. 

 

7월 13일, 오후 1시가 되어서 겨우 운전자 두 명을 구했다. 물론 하루 이용료는 3만원으로 못을 박았다. 팁으로 30만원을 주는 한이 있어도 간밧이나 그 지리전문 베테랑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점심을 먹지 못했는데, 전체 일정을 소화하기가 벅찰 것같아서 일단 차를 출발시켰다. 가다가 아무 데나 들러 간단히 먹을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울란바토르에서 카라코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카라코롬까지는 고속도로가 깔려 있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운전자들은 그때까지도 몹시 화가 나 있던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짜증이 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봐야 알지.”

  

그저 던진 말은 아니다. 몽골에서 쓰는 하이웨이란 말과 우리가 쓰는 하이웨이는 성질이 다르다. 대부분 비포장이고 길없는 길을 달리는 그들 운전자의 시각으로 볼 때 하이웨이란 시속 60킬로미터만 낼 수 있어도 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들 의심대로 세계제국의 본거지였다는 카라코롬으로 가는 길은 엉망이었다. 아스팔트를 깔긴 했으나 그저 아스콘을 갖다 들이부은 것이지 매끈하게 닦지도 않고, 중앙선이나 차로선도 없고, 갓길도 없고, 가드레일도 없었다. 게다가 우마차 금지니 하는 법규도 없는지 양떼며 말떼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비만 내려도 웅덩이가 패이고, 화물차가 마음먹고 지나가면 길이 갈라져버리는 것이다. 

 

운전자들은 웅덩이를 피해 곡예운전을 계속 해야만 했다. 비포장을 갈 때보다 승차감이 더 좋지도 않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도로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러려니, 다들 불만이 없었다. 그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길에서 몽골식 패스트푸드를 간단히 얻어먹고 쉬지 않고 길을 달려 우리는 한밤중에 카라코롬에 닿았다. 적어도 목적지 도시명이 나온다면, 그리고 그 이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지라면 번듯한 호텔이라도 서 있고,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카라코롬을 알리는 네온사인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날 어둠을 밝히는 것은 하늘을 찢어발기는 번갯불 뿐이었다.

여인숙급 호텔은 그나마도 손님이 차서 구하지 못하고 결국 겔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이튿날은 폐허가 된 카라코롬 시내를 차안에서 휘둘러보는 것으로 끝내고 고비알타이가 시작되는 고비 사막을 향해 달렸다. 내가 카라코롬이라는 이 세계적인 유적지를 이렇게 몇 줄 안되는 시덥잖은 말로 묘사하는 것은 이러는 것이 카라코롬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나중에 카라코롬에 가보면 내가 왜 이 유명한 도시를 이토록 무심히 지나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 운전기사는 잠들고 자동차는 홀로 질주하다 

 

14일 오후 우리는 고비사막으로 들어가는 전진기지랄 수 있는 보그드란 도시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서 도시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산다는 단순한 뜻이지 한국의 어떤 지방 도시를 떠올려서는 안된다. 즉 전화, 숙박, 교통 그 무엇도 불가능하다. 거기서 살 수 있는 것은 물, 빵, 쌀 등이다. 

 

이날 점심 무렵에는 함께 여행하는 몽골인 화가의 매형집(매형이란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다)에 들렀는데, 여기서 또 실수를 했다. 남의 집에 갈 때는 선물을 꼭 지참하라는 몽골인 친구들의 말에 따라 우리는 보드카 두 병을 선물했다. 그런데 이 몽골인 의사는 점심을 먹는 내내 보드카를 따라주어서 우리는 대여섯 잔씩 억지로 먹었다. 술을 잘 못하는 나도 이리 빼고 저리 뺐지만 결국 넉 잔을 마셨다. 주인이 주는 술을 받아마시지 않는 것은 주인에 대한 모독이라나 하는 통역의 협박 때문이다. 주인도 술잔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 ‘눈깔’을 부라렸다. 너희는 그렇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안마시겠다면 더 권하지 않는다고 대들었지만 이 몽골인들에게는 도무지 통하질 않았다. 칭기즈칸 시절에도 남송의 사자 한 사람이 그 주법(酒法)에 걸려 진짜로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이 주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두 시간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로부터 두 시간 뒤에 영영 알타이산을 보지도 못하고 어디론가 더 먼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된다. 

 

나는 그놈의 질 낮은 몽골산 보드카에 정신을 잃고 꾸벅꾸벅 졸았다. 잠결에 운전기사하고 몽골인 친구(미술대학 교수. 광주비엔날레에서 올해 상을 받았다.)가 떠드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듣자하니 우리의 목적지 홉드라는 말이 여러 차례 들리고,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 바닥을 몇 차례 두들기며 낄낄대는 걸 보니, 그곳에 가서 여자들하고 놀자는 뜻 같았다. 그렇게 까마득히 잠을 자던 중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바깥 풍경에 눈을 돌렸다. 

 

운전기사도 지쳤는지, 그리고 몽골인 화가도 지쳤는지 떠들지는 않고 둘다 앞만 보고 가는 듯했다. 몽골인 화가의 어깨를 툭 쳐보니 그는 잠을 자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차창 밖을 구경하는데, 정말 좋은 경치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영국의 스톤헨지처럼 생긴 거대한 암석군이 나타났다. 고대인들이 정신 수련을 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집단 생활을 했는지 흔적이 역력한 바위지대였다.

“서!”

운전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시켰다.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기사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우리 편한대로 가르쳐 놓은 게 있었다. 서, 가, 먹어, 담배(담배 피우고 싶으냐), 아이락(아이락을 먹고싶으니 가까운 겔에서 서라), 차호(어디 가서 우유차를 얻어마시자), 물(물이 떨어졌으니 사든지 얻든지 해라) 그리고 피차 재미있자고 만들어 놓은 오락용이 몇 가지 더 있다.

 

그런데 이 운전기사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서라고 하면 서야지! 스탑!”

서라는 말이나 스탑이라는 영어나 그 친구에게는 다 같은 외국어일 뿐이지만 저절로 그렇게 말이 나왔다. 그래도 그는 서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윗통을 벗은(몽골에서는 여자 앞에서든 어른 앞에서든 윗도리를 훌러덩 벗어도 좋다. 더위에 약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의 등짝을 철썩 갈겨버렸다. 

그는 으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핸들을 움켜쥐고 급정거를 시도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타이어가 타는 냄새가 나면서 한없이 밀려나갔다.

“왜 이래! 천천히 서란 말이야! 놀랐잖아!”

 

차에서 내려 운전기사한테 호통을 치면서 보니 녀석의 눈이 시뻘갰다. 여태껏 잠을 잔 것이다. 몽골인 화가도 놀라서 뭐라고 저희들끼리 한참 동안 떠벌거리더니 사연을 고백했다. 기사는 술만 먹은 게 아니었다. 술을 먹기 전 보그드에 사는 애인(애인인지 창녀인지 눈으로 보질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만)을 만나 두 차례 섹스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보드카까지 마셨으니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놈은 보그드를 벗어나면서부터 여태껏 잤다고 했다. 무려 두 시간 정도를 핸들을 잡고 잔 것이다. 거기가 초원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디 벼랑이라도 있었거나 앞에 다른 차라도 나타났더라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하루 종일 가도 차 한 대 만날까 말까 하고, 또 언덕은커녕 주먹돌 하나 없는 땅을 달렸기 때문에 운전 기사나 나나 피차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 친구가 두 시간 동안 자면서 운전했다는 게 겁이 나기는커녕 재미있기만 했다. 그래도 주의를 단단히 주고 다시 길을 재촉했는데, 이 날은 기사의 체력을 감안해 해가 질 무렵 노숙을 하기로 했다. 

 

- 우주라는 집에서 하룻밤 묵다 

 

멀리 지평선 끝에 고비알타이의 꼬리가 쥐이빨처럼 낮게 보이는 돈드고비 지역이다. 황혼이 지는 걸 바라보면서 누구는 텐트를 치고, 누구는 저녁 준비를 했다. 나는 동행한 스님하고, 또 여자 통역하고 셋이서 매트만 깔고 그냥 바닥에서 자기로 했다.

 

바람을 찬 삼아 저녁을 먹은 뒤 운전기사하고 몽골인들은 따로 모여 보드카를 나누어 마셨다. 원래 보드카 정도는 저희들 먹고싶은 만큼 주겠다는 게 우리들의 방침이었는데, 이 날 운전기사의 수면 운전을 핑계로 하루 한 병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그렇게 좋아하는 보드카를 홀짝홀짝 사탕 빨아먹듯이 먹어야 했다. 

 

나는 매트에 누워 침낭을 펼쳤다. 침낭 세 개를 나란히 놓으니 불편할 것도 없다. 습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 밤이라지만 바람은 온풍이다. 이른 봄, 꽃 피는 언덕으로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 같다. 습기가 전혀 없으니 솜털보다도 더 포근하다. 통역은 술에 취한 채 옷을 훌훌 벗고는 먼저 침낭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참, 통역이 여자였던가.

 

주변을 둘러보니 매트를 중심으로 천하가 돌고 있었다. 땅은 둥근 원반처럼 보인다. 360도를 빙 돌아 다 매끈한 지평선이기 때문이다. 별빛이 무수히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지평선이 훨씬 더 좁아보였다. 어쨌거나 나는 지구의 중심에 누워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중심에 누워 있는 셈이다. 그곳에서는 '알탄하다스'로 불리는 북극성에 눈을 고정시키는 순간 우주 시계가 확연히 들어왔다. 이른바 내 바이오코드가 항상 바라보는 항성시계, 나는 아직 잠에 들지 못한 스님에게 하늘과 별에 대해 말씀드렸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지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하늘을 가리키면서 설명하고, 또 하늘을 보고 오늘이 몇월 몇일인지 아는 법에 대해서 얘기했다. 하늘에는 우리들이 손목에 차고 있거나 휴대폰에 찍혀나오거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시간보다 더 정확한 시계가 있다. 북극성이 바로 시계판의 중심이고 북두칠성의 손잡이가 바로 그 시각을 가리키는 시침(時針)이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바람소리말고는 들려오는 게 없다. 낙타 울음소리나 바람소리, 아니면 테무친이 벌벌 떨었다는 늑대나 승냥이 울음소리라도 들려오면 좋으련만, 기껏 기사들이 코 고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왔다.

“칭기즈칸군이 중국을 치러 가는 길에 아마 여기쯤에서 노숙했을 것이다. 10만 대군의 함성, 말과 양떼의 울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잠들기 전에 아마 그렇게 중얼거린 듯하다.

 

아침에 눈이 부셔 침낭 자크를 살짝 열고 보니 지평선에 해가 오르고 있었다. 노을이 노랗게 번진다.

우주(宇宙)라는 한자를 보면 집 우, 집 주라고 하는데, 그 말 그대로 나는 우주라는 집에서 하룻밤 편하게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이 날은 고비 한 가운데를 향해 하루 종일 달렸다. 사막이라고 하지만 모래언덕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사전에서 사막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砂漠과 沙漠 두 가지가 나오는데, 고비의 경우 沙漠이라고 보는 게 맞다. 사하라사막이니 하는 것은 모래산이 즐비한 砂漠이지만, 고비는 물이 모자랄 뿐인 일반 황토지대다. 그러므로 그런 땅에 비가 내리면 금세 풀이 자라고, 숲이 우거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아시스가 아니어도 드문드문 풀이 자라고, 하르막이라는 오미자 비슷한 열매가 아주 잘 자란다. 고비 한 가운데서도 목축이 이루어지는 걸 보면 그곳이 아주 몹쓸 땅은 아닌 것이다. 

 

고비 한 가운데에 이르러 처음으로 명사산(鳴砂山)을 구경했는데, 어찌나 빛깔이 고운지 처녀의 속살 같았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허벅지나 겨드랑이, 젖가슴 정도의 빛깔이다. 처녀의 속살을 자주 보질 못해서 확언하긴 힘들지만 그걸 본 일행들이 모두 다 그렇게 말했으므로, 적어도 우리 일행들에게 각각 소속된 옛날 처녀들이 그랬다는 걸로 보아 틀리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고비 데저트’라는 말이 생겼는데, 아시안의 얼굴색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고운 흙을 채취해 물감으로 써야만 한다고 했다. 일본의 화방 같은 데서 고비 데저트라는 물감을 비싼 값에 팔고 있다는 걸 아는 화가 두 명이 페트병에 고운 모래를 퍼담자 나하고 스님 역시 쓸 데도 없으면서 마구 담았다. 이 물감용 고운 모래는 귀국후 내가 존경하던 한 스님의 영정을 그리는 데 써달라고 제자 스님께 맡겼다. 

 

- 기사들의 반란 

 

이날 밤 문제가 생겼다. 운전기사 두 명이 울란바토르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들을 너무 혹사시켰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아침 일곱시부터 밤 열시까지 운전을 시키는 잔인한 종족이라고 욕하면서.

“우리도 인간이다. 인간 대접을 해달라.”

“인권운동하냐? 구체적으로 말해.”

“하루 3만원으로 열 시간 이상 운전하는 건 무리다. 우리는 사람이지 말이나 양이 아니다.”

“우리가 주는 돈은 3만원이지 3천원이나 3백원이 아니다. 너희들 한 달 월급을 하루 임금으로 주잖는가?”

“더 줘야 가겠다. 안그러면 돌아가겠다.”

 

급기야 우리 네 사람은 긴급 회의를 열었다. 돈을 하루 3만원에서 4만원으로 올려줄 것인가, 계약을 깨고 걸어서 갈 것인가. 물론 걸어서 갈 수는 없고 비용이 얼마가 더 나오든 이놈들한테 져서는 안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우린 당초 하루 3만원에 약속했다. 약속대로 하지 않겠다면 할 수 없다. 하루 10만원이 들더라도 너희들하고는 가지 않겠다. 오늘까지 계산해 줄 테니 그만 돌아가라.”

묵묵부답이다. 

나는 더 세게 나갔다.

"울란바토르에 전화를 걸어 거기서 차를 부르겠다. 하루 백만원씩 들어도 좋다. 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놈들에게는 굴복하지 않는다. 차가 올 때까지 며칠이고 기다릴란다. 난 소설가라 직장이 없다. 여기 내 친구도 화가라서 직장이 없고, 스님도 출근하실 데가 없으니 그냥 여기 한달이고, 두달이고 살란다."

난 정말 그럴 결심이었다.

 

내가 되차게 나가자 그중 한 명이 먼저 귀순해 왔다.

“난 그냥 끝까지 갈 테니 없던 걸로 해다오.”

결국 밤이 가기도 전에 운전기사 두 명, 통역, 몽골인 교수 네 명은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몽골에서는 스님을 라마라고 부르는데, 라마에 대한 존경심이 어찌나 큰지 그들은 머리를 한껏 조아렸다. 결국 내가 이겼다.(여행이 끝난 뒤 팁을 넉넉히 주었다. 그들이 요구했던 액수의 몇 배를 쳐서 안겼더니 녀석들은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 너같은 놈들이 언젠가는 몽골을 새로 일으킬 거야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여행은 계속되었지만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30분쯤 달리다가 10분쯤 엔진을 꺼놓아야만 라디에터가 끓어넘치지 않았다. 고비알타이의 꼬리부터 밟아나가기 시작하는데, 곳곳에 신기루가 보였다. 앞에 엄청난 호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 데도 물은 없었다. 신기루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실감이나지 않겠지만 정말 눈앞에 호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날 점심 무렵 우리는 고비가 모래산을 낳는 장면을 구경할 수 있었다. 고비는 모래만 있는 곳이 아니라 자갈도 있고, 진흙도 있는 마른 땅이란 건 앞서 말했다. 따라서 사하라 사막이나 중앙아시아 어디처럼 결고운 모래무덤만 즐비한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모래산이 띄엄띄엄 형성되는데, 그 광활한 마른 땅에 회오리 바람이 일면서 이 회오리에 모래만 빨려올라간다. 모래를 머금은 이 회오리 바람이 이곳저곳 옮겨다니다가 그 모래를 한 자리에 뿌려놓는다. 그렇게 수백년 모으다 보면 경주 왕릉만한 모래산이 생기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또 귀중한 걸 많이 주울 수 있었다. 옛날 몽골 귀족들이 입는 옷 복다크라는 걸 보면 울긋불긋한 보석이 많이 달려 있는데, 그게 고비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선홍색, 짙은 코발트색, 붉은 갈색, 눈부실만큼 흰색 등 가지가지다.

“한국 아줌마들 보석 투어를 하자고 하면 벌떼같이 달려들겠군.”

보석을 모르니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눈부신 돌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고비를 지나, 우리는 고비알타이산을 한 자락 한 자락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온도는 대략 40도가 넘는다. 그런 그곳에서도 신기할 만큼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무 것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척박한 땅에 가까스로 풀이 나고, 그런 메마른 풀을 먹겠다고 낙타들이 떼를 지어 헉헉거린다. 생명의 끈질김인가, 그런 낙타를 잡아 젖을 짜먹는 인간도 거기에 있다. 좋은 땅 다 놓아두고 왜 그런 곳에서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얘기를 해봐도 그들에게는 어떠한 불만의 그림자도 없다. 활짝 웃고, 작은 선물에 기뻐하고, 뜨거운 우유차를 넘치도록 따라 손님에게 건네준다. 

 

그로부터 우리는 용비늘 같은 고비알타이산을 따라 길 없는 길을 달렸다. 시속 40킬로미터만 달릴 수 있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덕분에 힘이 불끈거리는 알타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어 좋았다.

 

우리는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자갈길을 달려 어렵사리 차강골에 이르렀다. 거기서는 고아들이 사는 겔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중 사내라고는 다섯 살 난 아이뿐이었다. 그 아이가 새벽 일찍 양떼를 몰고나가고, 날이 저물면 양떼를 몰고들어온다. 안장 없는 말에 다 해진 담요 한 장 달랑 얹고, 이 아이는 휘파람을 불면서 양떼를 이끌었다.

“그래, 네가 몽골놈이야. 너같은 놈들이 언젠가는 몽골을 새로 일으킬 거야.”

우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암각화가 있는 차강골로 들어갔다. 

 

양을 치던 목동들이 심심풀이 삼아 그렸을 암각화가 무수히 나타났다. 사슴 뿔이며 말 따위를 어린애 솜씨로 직직 그려놓은 암각화는 대충 훑어보고 차강골 계곡에 널려있는 푸른 공작석을 줍는 데 정신을 팔았다. 고운 옥돌이 어찌나 많은지 거기다 천연옥돌탕을 만들면 참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집채만한 바위 전체가 옥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들 그것은 그림의 떡이다. 그걸 옮길 교통수단도 없고, 그걸 용케 울란바토르로 옮긴들 목욕이 뭔지 모르는 몽골인들을 상대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알타이에 취해 넋을 잃고 길을 가다가 내 생애 다시는 보지 못할 엄청난 노을을 보았다. 거기가 어디던가, 하여튼 누군가 해발 3천미터가 넘는 곳이라고들 했다. 옛날 칭기즈칸에게 굴복한 나이만이란 나라가 있던 땅, 그 험한 산기슭을 타고 넘어갈 때다. 확 터진 하늘, 알타이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노을빛으로 우리는 모두 숨을 죽였다.

“이건 알타이산이 내리는 선물이다. 저 보랏빛 수묵이 흐르는 오른쪽부터 선홍색 물감을 토하는 듯한 중앙, 그리고 황금 햇살이 퍼지는 왼쪽까지….”

우리는 모두 노을이 질 때까지 산 정상의 오보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금빛, 붉은빛, 분홍빛, 파란 기운이 짙게 배어나오는 먹빛, 보랏빛. 그 노을을 죽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을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천연 수묵화처럼 빛나는 노을을 본 곳의 지명은 옛 나이만 제국의 출입구인 탕킬이라는 곳이었다. 거기서부터는 3천5백미터 고지다.(엄청나게 높아보이는 백두산이 2744미터이다.) 느낌으로는 평지와 다름없는데 하여튼 거기는 엄청나게 높은 '하늘의 땅'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번 산을 넘어간 태양은 대서양 어디로 다이빙이라도 했는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초원에서는 말을 몰고 양을 부르는 목동들의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부랴부랴 이 집 저 집 두드리면서 하룻밤 신세질 곳을 찾았지만, 겔이 좁다는 이유로 두 군데서나 퇴짜를 맞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겔에서 가까스로 여장을 풀 수 있었다.

할머니 혼자서 손녀딸 둘을 데리고 사는 겔이다. 스물이 넘었다는 손녀딸 하나는 정신박약아겸 근육무력증에 걸려 있었다. 몽골인 통역이 말을 걸어도 이 아가씨는 웃기만 한다. 주인 할머니는 아랫목 맨바닥에 누워 있던 아가씨를 구석 침대로 옮겨놓았다. 눈치를 보니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같다. 시각만이 유일한 창구인 듯 아가씨는 우리 이방인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따뜻한 말 한 마디 위로해 줄 수도 없고, 입맛이 워낙 다르니 가져간 음식을 나누어 줄 수도 없다. 돈을 준다고 돈을 아나, 손목을 잡아준다고 이성을 아나, 도무지 불쌍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는다. 아무 말이나 해주면 그저 웃는다. 언제고 좋은 세상에서 튼튼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 푸른 초원을 마음껏 달려라, 그렇게 말해줄 뿐이다.

 

도대체 이 아가씨에게 몽골인이란 무슨 의미일까, 사람이란 무슨 의미일까, 여자란 무슨 의미일까 부질없는 생각에 잠겨보았다. 차라리 푸른 초원을 마음껏 돌아다니다가 주인을 위해 심장이 뜯겨지는 양이 되는 게 더 나으련만, 아가씨는 그 황량한 고산지대에 태어나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그렇게 누워 있다가 머지 않아 죽어갈 것이다. 겨울이 일년의 반이 넘는다는 3천5백 고지, 그러니까 아마도 하얀 눈이 사람 키높이로 내린 어느날 쇠똥 난로가 타오르는 가운데 그는 눈을 감을 것이다. 아가씨가 태어나던 날도 그랬을 테니까. 

 

- 홉드, 그 아련한 추억 

 

이튿날 아침, 고산지대를 달렸다.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에 매달려 풀을 뜯는 말, 소, 낙타 떼를 보면서 그런 악조건에서 수천년 살아왔을 그 가축들의 유전자에 경의를 표했다. 더불어 그 가축떼와 더불어 살아왔을 그곳 알타이 사람들에게도.

 

우리 여행은 고비알타이에서 허리에 해당하는 몽골알타이(최고점 후이툰:4,355 m)에 들어와 이제 소비에트알타이(최고점 벨루하산:4,509 m)가 머지 않은 홉드에서 마쳐야 했다. 원래 계획은 홉드에서 울란바토르까지 차량으로 가려고 했는데, 모두들 지쳐 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자니 홉드 직전 구석기 시대 동굴 답사에 나는 끼질 못하고 먼저 홉드로 가 비행기 예약을 해야 했다. 

 

홉드로 들어가는 길은 3천미터쯤 되는 산마루에서 폭포처럼 떨어지는 거친 아스팔트였다. 여기저기 한여름 만년설이 쌓인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런 산 어딘가에는 설인(雪人)이 산다고 몽골인 통역이 말했다. 설인 여자한테 잡혀가 몇 년간 살다온 남자도 있다고 했다. 물론 거짓말이겠지만.(통역은 사실이라고 바득바득 우겼다.)

 

경사로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몽골 서북부의 휴양 도시 홉드를 바라보니 먼 이국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키다리 종족이라고 알려진 도르밴족의 고향, 바로 칭기즈칸을 가장 가까이서 지켰던 민족으로 오늘날에도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다만 요즘들어 알타이산을 넘어 서쪽의 카자흐스탄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늘면서 혈통이 아리송해져간다고 한다. 러시아풍의 얼굴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통역의 친척이 사는 집에 여장을 푸니, 시인이라는 이 친척은 우릴 위해 양을 한 마리 잡았다. 그 역시 몽골인답게 능숙하게 칼을 썼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만 보고 있는 양의 심장을 예리한 칼로 5센티쯤 찢고, 그 다음에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마지막으로 심장을 드나드는 동맥을 끊어버린다. 양은 눈을 사르르 감더니 이승을 하직했다. 몽골인들이 양을 잡는 광경은 하나같이 똑같다. 칭기즈칸이 정한 몽골법 ‘야사’에도 나온다. 양에게 고통을 가장 적게 주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 바로 심장을 바로 끊어버리는 것이다.(칭기즈칸은 '무식한 이슬람놈들처럼 양의 목을 칼로 잘라 죽이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했다)

 

잔인하기로 이름난 유목 기마군의 후예들이지만, 그들이 기르는 짐승만은 최대한 예의를 다해서 잡았다. 마지막 고통을 덜 주려는 것도 그렇지만, 그들은 날씨가 조금만 궂어도, 또 저녁 무렵에는 양을 잡지 않는다. 양의 영혼이 맑은 날 파란 하늘로 올라가길 기원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깜깜한 밤에는 그들이 사랑하는 양을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홉드에 머물면서 강변을 구경하고, 옛 청나라 시절 만주군이 주둔했던 성곽도 돌아보았다. 거기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 소비에트알타이까지 가보면 좋으련만, 거기서 예니세이강가를 거닐어보았으면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행을 마쳐야 했다. 러시아로 들어가는 길이 없다. 언젠가는 소비에트알타이에 가서 칭기즈칸의 큰아들 주치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는 예니세이강의 석양을 보고싶다. 그 석양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칸의 큰아들이면서도 그는 그곳 예니세이강 바닥에 묻히길 소원하고, 나중에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아버지 칭기즈칸은 예니세이강의 물을 끊고 강바닥을 깊이 판 다음 아들의 시신을 그곳에 묻었다. 

 

주치는 내가 대하소설 칭기즈칸을 쓰면서 가장 안타깝게, 그리고 애정을 갖고 묘사한 인물이다. 칭기즈칸의 아들이긴 하되, 사실은 적장의 피를 이어받은 몽골의 나그네, 그래서 더더욱 소비에트알타이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나름대로 알타이문화를 일으킨 진원지를 구경한 감회는 새로웠다. 광활한 대지, 넉넉한 산자락에서 알타이족들이 일궈냈을 고대 문화와 문명을 호흡하면서 현지인들이 읊는 시와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았다.

  

알타이라는 용의 꼬리부터 밟기 시작해서 이제 그 어깨에서 내렸다. 언젠가는 그 알타이산이 또 한 차례 용틀임할 날이 올 것이다. 유럽인들이 불안해 하는 황화(黃禍), 그것은 언제나 이곳 알타이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로마까지 쳐들어갔던 훈족이 일어난 곳, 터키와 카스피해 인근의 아랍권을 지배했던 투르크족이 일어난 곳, 러시아와 폴란드와 헝가리를 지배한 몽골족이 일어난 곳이다. 그 힘을 느끼면서 나는 울란바토르로 향하는 프로펠러기에 몸을 실었다. 

평생 다시 가보지 못할 그곳을 내려다보면서 내 몸 어딘가 알타이족의 핏줄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 이 여행은 범어사 관조 스님, 화가 김호석(조라치 김), 화가 이승희(조라치 리)와 함께 했다. 화가 김호석이 내비게이터를 했고, 내가 몽골인들을 상대했다. 운전기사 두 명 이름은 잊었다. 우리말 통역은 아이 셋을 둔 아줌마였는데 이름을 잊었다. 홉드와 울란바트로에서 영어 통역을 한 친구는 졸라다. 몽골인화가 이름도 잊었다. 2007년 초 돌아가신 관조 노스님을 모셔야 하는 입장이어서 몽골인들을 다소 엄격하게 다루었던 것같다. 외국을 여행할 때 나는 결코 어물거리지 않는다. 인도,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 같은 곳을 여행할 때는 꼭 이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안그러면 백달러 때문에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다. 김호석, 이승희 두 사람이 현지인들하고 분쟁이 생겨도 격투에서 이길 수 있는 체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걸 믿고 만용을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겁이 날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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