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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고랑부리

 

파란태양 | 2007/05/07 (월) 21:18

고랑부리, 그 서글픈 이름

  -1998 <월간조선> 작가의 고향

 

내 고향 청양(靑陽)을 생각하면 늘 안타깝다. 그립다기보다는 뭔가 극복해야 할 대상처럼 보인다. 청양은 백제 시절 고랑부리라고 불리던 곳으로, 그곳에서도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작은 마을 이름은 운곡(雲谷)이었다. 이 운곡이란 아름다운 마을은 일제때 북상, 북하 두 개 면이 합쳐지면서 그만 면 이름으로 쓰이고, 운곡 마을은 일제 때 마구잡이로 생겨난 ‘신대’란 멋없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나는 우리 마을은 운곡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참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고, 청양 또한 한자가 참 곱다고 여겨 ‘청양군 운곡면’을 한자로 즐겨 썼다. 물론 나중에 중국 지도에서 청양이라는 똑같은 지명을 발견하고, 신라에 강점된 이후 백제땅에까지 불어닥친 중화 사상 때문에 고랑부리라는 원래 지명이 그런 식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고는 그만 흥미를 잃어버렸다.

 

또한 내가 우리 고향 마을을 별로 재미없게 여기는 것은 그곳이 버려진 금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때 제법 큰 금광이 개발되어 팔도의 뜨내기들이 다 모여들어 마을 사람들은 일찍부터 나쁜 외래 문화에 물들고, 제법 돈 맛을 알면서 동네 물이 흐려졌다. 금광이 문을 닫은 뒤로도 그 좁은 골짜기에 백 호가 넘는 인부들이 남아 산비탈을 개간하면서 피차 가난하게 살아야만 했다.

 

내가 태어나던 1950년대 후반이 꼭 그랬다. 금광을 해서 돈을 번 사람들은 다 떠나갔지만 이사갈 돈도 없고, 마땅히 돌아갈 곳도 없는 사람들은 그냥 주저앉았다. 갈 곳없는 사람들이 움막같은 집을 지어 놓고 여기저기 품을 팔며 사는 모습, 폐광에서 잡석을 갈아대며 혹시나 하고 금을 찾던 사람들, 명절이면 싸움질만 해대던 가난한 동네 사람들, 기억에 남는 것은 대략 그 정도이다. 그런 데서 뜨네기 친구들과 어울려 지낸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러니까 그 친구들의 불안했던 집안 사정만큼이나 헷갈리기 일쑤이다. 조금 사귀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고, 또 없어지고, 그렇게 해서 내가 중학교에 갈 때쯤에는 호수가 절반 이상 줄었다. 그많던 친구들은 그렇게 다 가버리고, 남아 있는 친구는 이제 한 명밖에 없다.

 

 

점심이 뭐예요?

 

 

나 역시 그런 신산한 삶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 시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국민학교’ 3학년 국어 시간에 일어났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먹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아는 사람, 앞으로 나와서 칠판에 써 봐요.”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아침, 그래 아침은 안다. 저녁, 그래 저녁에도 호박죽이나 풀죽을 쑤어먹었으니 그 ‘때’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먹는 거라니 도대체 뭘 먹길래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친구들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에 계집애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 아이는 칠판에 대고 ‘즘신’이라고 써 놓았다. 충청도 산골아이들답게 우리는 이런 식의 사투리를 곧잘 썼다. 언어 생활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 내가 쓰던 말과 지금 내가 쓰는 말은 좀 과장하자면 한국어와 일본어만큼이나 다르다. ‘어떻게 해요?’를 ‘오치기 헌대유?’로 말했으니, 이런 지독한 사투리를 쓰다가 어느날 갑자기 서울말로 빠꾸어쓰려니 병이 생겼다. 다소 어눌해지고, 발음에 자신없어 머뭇거리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여튼 ‘즘신’이라는 글자를 보자 나는 그제야 빈 도시락에 우유죽을 받아 먹는 걸 생각했다. 혹 어떤 독자께서는 국민학교 3학년이나 되는 녀석이 어떻게 그렇게 미련할 수 있었느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한글을 깨우쳤다. 그러므로 1학년을 다니는 동안은 한글도 모르면서 그저 왔다갔다만 했다. 내가 미련한 탓도 있지만 산골 마을에서 공부가 뭔지도 모르는 부모 형제와 살면서, 또 그런 환경에서 가르치는 교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2학년 때 처음 한글을 깨우치고 나서 주위를 보니 한글의 원리를 알고 책을 읽는 아이는 나를 비롯해 두엇 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후 장학사니 하는 높은 사람들이 올 때면 꼭 내가 일어나서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대곤 했으니 그리 늦은 것도 아니었나 보다.

어쨌든 이 날 아침과 저녁 사이에 먹는 것을 몇 명이 더 대답은 했지만 표준말로 합격되지는 않았다. ‘점신’, ‘즘심’ 등이 더 나왔지만 끝내 ‘점심’은 나오지 않았다. 점심 다운 점심을 먹지 못하고 사는 어린 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대고 큼지막하게 ‘점심’이라고 쓰고는 몇 번이나 따라읽으라고 했지만 도무지 감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선생님한테서 배운대로 집에 가서 ‘점심’을 달라고 해 보았다. 웬걸, 어머니는 어머니 말씀으로 ‘새코빠진 소리’ 하지 말라고 꾸중하셨다. 그러면 그렇지, 점심이란 건 아무나 먹는 게 아니고 서울 사람들이나 먹는 특별한 음식이야. 그제서야 나는 내가 무식하지 않다는 걸 알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점심은 커녕 저녁이나마 밥으로 먹으면 다행이던 시절이었는걸. 어머니는 이따금 ‘호박죽 하지 마’ 하고 내가 소리지르곤 했다는 말씀을 하신다. 저녁거리가 없어 호박을 쑤어먹이려고 어머니가 마당에서 왔다갔다하면 또 호박이냐고 내가 울어대곤 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난 아마도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것도 중학교가 멀어 걸어다닐 수도 없는 처지라서 읍내에 있던 친척집에 붙어 다니면서 처음으로 점심도, 저녁도 제대로 얻어먹었던 것같다. 초등학교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어느 때부터인가 고구마로 점심을 대용했고, 때때로 보리밥을 저녁으로 먹었다. 물론 나는 그러한 우리집 생활을 가난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을에는 점심은 커녕 저녁으로 맹물만 마시고 그냥 자는 집이 흔했기 때문이다. 철없던 그 시절, 점심으로 먹는 고구마를 들고 밖에 나가 그마저도 먹지 못하는 아이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먹어보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집은 상대적으로 웬만큼 산다고 자부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가정 생활을 조사한다고 ‘가난한 사람’ 손들라고 할 때는 절대로 손을 들지 않았다. 그대신 ‘중간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라고 할 때 자신있게 손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집이 가난한 것이고, ‘가난’하다고 자수한 아이들의 집은 요즈음의 전쟁 난민보다 못한 극빈자 집안이었다.

 

이쯤 얘기했으면 이제 다른 얘기는 사족이 된다. 예를 들어 나물뜯어 밥대신 먹었다든가, 쌀겨나 보릿겨로 개떡해 먹은 것이나, 산에 가서 떡갈잎을 따다 팔거나 칡을 끊어다 팔거나 하는 것쯤은 낭만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린 시절에 관한 한 덮어두고, 접어두고, 잊고싶다. 그런 시절이 내게 왜 필요했는지 난 아직 모르겠다.

 

 

산이 많아 생각은 많았다

 

 

어릴 적 세수를 하려면 1백 미터쯤 떨어진 개울까지 나가야 했다. 이슬을 밟으며 세수하러 오가다 본 제비꽃이며 엉겅퀴꽃, 뫼꽃 등, 그리고 세수하면서 고개를 쳐들면 하늘 높이 보이던 국사봉 계곡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오르곤 했다. 그래서 그 산 너머를 상상해 보다가, 초등학교 때 동쪽으로 산을 넘어 공주 사촌집에 가보기도 하고, 남쪽으로 산을 넘어 외할아버지 댁에 가보기도 했다. 그러고도 산이 가로막혀 있었다. 내 세상이 가로막힌 것이다.

 

- 내 동생이 찍은 것으로 어린 시절 여름이면 늘 보던 꽃이다.

 

또 하나, 그렇게 나를 자극해 준 것은 우리 마을에 있었다는 고려 사찰 운곡사(雲谷寺)다. 무학대사가 새 도읍을 찾으러 계룡산에 왔다가 서기 비치는 땅이 있어 와 보니 국사봉 아래 우리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곡이 좁아 겨우 3천인이 머물만한 곳이라 일국의 도읍은 곤란하고, 3번 크게 흥하리라도 하더란다. 어릴 때 무학이 말했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보려고 산에 올라가 동네를 내려다보면 뭔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 가난한 마을이 무슨 영화를 누릴까 싶었지만 기운만은 넘쳐났다.

이따금 무학 대사가 말한 것중 하나는 일제 때 금광 시절이었다고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작은 산골 마을에 극장이 서고, 장이 서고, 전기가 들어오고, 병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섰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번 끊긴 전기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다시 들어왔으니까.

 

어쨌든 나는 황성(荒城) 같은 폐광 지대에서 사무실이며 화약고, 갱도 등을 드나들며 재미나게 놀았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이었는가는 알지 못했고, 어른들도 먹고 살기가 바빠 아이들이 그런 데서 노는 것을 단속하지도 않았다. 수은으로 오염되었을 그 땅에서 나는 머루 따위를 아무 생각없이 따먹었고, 어른들 역시 근처에서 지하수를 파 식수로 먹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 형제 다섯 명중 나를 포함해 두 명은 어찌어찌 대학을 나왔지만 나머지 셋은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세째인 내 위로 두 형이야 지독하게 가난해서 형편상 그랬다지만 내 밑의 동생 하나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다 초등학교만 졸업시키니까 우리도 그랬을 뿐이다. 그때는 고추 농사도 새로 시작하고, 청양 구기자가 제법 유명해지려고 할 때이므로 돈 문제는 분명 아니었다. 물론 걸어서 30리 길을 다녀야 할만큼 중학교란 것이 그리 매력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데서 나는 태어나 자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가정 형편상 읍내에 있는 농고를 들어갔지만 1년 뒤 공주에 사는 이모에게 떼를 써서 공주고에 새로 입학했다. 저 하기 나름이라는 어머니 말씀을 따라 들어간 농고에서는 오전엔 공부를 했지만 오후에는 무조건 논이나 밭으로 학생들을 몰아냈다. 집에서도 그렇게 일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시절이었다. 특히 그 어린 것들을 데리고 얼마나 나라를 튼튼히 지키려고 그랬는지 교련 선생이 밤늦도록 총검술을 시키고, 하도 기합을 많이 주는 바람에 그나마 정내미가 떨어져 버렸다.

 

 

평생의 스승이 된 땡추

 

 

스승의 날이 되면 나는 늘 괴롭다. 여기저기 명사들이 나와서 옛날 학교 때의 스승을 찾아다니고, 때로는 방송국 스튜디오에 모셔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 혹시라도 나한테 저런 프로그램에 나오라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아니 대학시절까지 다 합쳐서 그동안 만났던 교사와 교수들을 죄다 떠올려놓고 생각해 보아도 대부분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뿐더러 차라리 이사다니면서 만났던 주인집 아저씨하고 지냈던 추억이 더 새로울 정도로 그분들하고 관련된 추억은 깜깜하다. 종 칠 때까지 칠판에 쓴 걸 베끼느라 정신없었고, 선생도 내용을 잘 모르는지 혼자 실컷 책을 읽다가 질문에 막히면 괜히 트집잡아 몇 명 잡아다가 출석부 모서리로 마구 때리고, 하도 기합을 받아서 혹시 저 선생 병이라도 걸렸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다. 왜 그렇게 때려대는지 툭하면 엎드려 뻗쳐라, 포복해라, 의자들어라. 종례 시간이면 이유도 대지 않고 불러내어 따귀를 줄줄이 때려대던 일, 생각만 해도 지겹다. 나는 특별히 불량하다거나 말썽을 자주 피우지도 않는 얌전한 학생이었건만 학교다니면서 맨날 얻어맞고, 맨날 기합만 받은 것같다.

 

그러던 나한테 정말 좋은 스승이 한 명 나타났다. 공주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어 하는 수없이 이모집에 얹혀서 얻어먹기도 하고 용돈도 타쓰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마침 이모집 뒷산 공산성(웅진 시절 백제성이 있던 자리) 밑에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 난 그때까지 교회만 다녀봤지 절이라는 곳에는 가본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그 절에 가서 땡추로 알려진 한 스님을 만났다. 그 당시 이 스님은 갑사에서 쫓겨나 파계승 비슷하게 떠도는 중이었는데, 그래서 찾아가는 손님도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 보니 나하나 찾아가는 것도 반가워 그 스님은 이것저것 얘기를 해주고, 책을 보여주고, 세상 이야기도 해주셨다. 마음속으로 높이 모시던 박정희 대통령이 나쁜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 정도로 나는 매일매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예수 이야기, 석가 이야기, 증산 이야기 등등 화제도 나날이 바뀌고, 그덕분에 나는 알지도 못하는 주역책을 사서 밑줄까지 치면서 공부할 정도로 낯선 세상에 들어섰다.

그분은 21일이 지난 병아리가 껍질을 깨지 못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 콕콕 찍어주신 어미닭같은 분이다. 물론 그분이 직접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지는 않았다. 그분이 그렇게 나를 찍어대지 않았던들 난 아마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녁만 먹으면 절에 올라가 스님 이야기를 듣다가 한밤중 스님이 주무실 때면 내려오곤 하기를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는 계속한 것같다. 그래서 스님을 만난 뒤로 나는 아침이면 공산성에 올라가 좌선도 하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었고, 저녁이 되면 그 절로 가서 예비고사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분은 이제 세상을 뜨셨고, 나는 세상에 남았다. 그리워도 뵙지 못하고, 누구냐고 물어도 그분을 땡추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법명도 잘 대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분이야말로 나한테는 큰스승이었다.

 

 

기억나는 두 사람

 

 

나를 이룬 것은 모두가 다 내 고향이다. 단지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만을 고향이라고 얘기한다면 나는 아마 삭막해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름도 잊어버린 그 많은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어떻게 떠올리며, 그 악다구니 같았던 삶을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어린 시절에 비해 나는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그래서 프로페셔널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아름다운 인연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한 인연은 화가분이 맺어주셨는데, 그분의 화실에 놀러갔다가 한 소식을 들었다. 그분은 아침 10시의 햇빛과 오후 2시의 햇빛과 오후 7시의 햇빛이 다 다르다는 걸 처음으로 내게 알려주셨다. 그러면서 그림자가 진 캔버스를 가리키며 그림자의 색깔이 어떤 색인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난 그때까지 색치(色痴)에 가까웠다. 진달래를 봐도 그저 분홍색만 있는 줄 알았다. 하늘은 그냥 푸르고, 흙은 누런 줄만 알았다. 그날 나는 햇빛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꽤나 놀랐다. 그 경험에 이어 수덕사의 한 노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햇빛의 ‘무게’를 느끼면서 시각을 알았다고 하는 이야기며, 한 디자이너가 길을 가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Y(노랑) 10이니, M(빨강) 5니 하면서 색깔을 말하는 걸 보았다. 그래서 나는 하찮고 단순한 것이라도 깊이 들어가면 또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이후 마음 속에 새겨두었다.

 

또 한 인연은 쌀가게를 한다는 분이었다. 그분은 쌀을 손바닥에 올려놓기만 하면 김제쌀인지 이천쌀인지 포천쌀인지 금세 구분할 수 있고, 그게 몇 년도산(産)인지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건 또 얼마나 큰 충격이었던가. 하찮은 것이라도 제각각 큰 의미가 있다는 것, 그래서 속단해서도 안되고 완전하다고 자만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처받지 않은 마음

 

 

고향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고, 뭔가 깨우쳐야 한다면 별로 말할 게 없지만, 그래도 나는 복받은 축에 속한다. 나한테는 가난의 상처니 하는 것이 거의 없다. 난 가난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어렵사리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니고,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생이 되면서도 친척이나 이모, 형의 도움으로 근근이 다녔지만 그분들은 아무도 내게 상처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나를 감싸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언제나 낙천적이다. 낙관적이고, 작은 일에도 즐겁다. 쉽게 부끄럼을 타지만 잘 싸우기도 한다. 혼자서나, 마누라 앞에서는 잘난 척해도 남 앞에 서면 갑자기 겸손해지고 친절해진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아직 어린애만 같다. 더 똑똑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 행복하게만 자랐나 보다. 그래, 한 마디로 죄스런 인생이었다. 혼자 힘으로 아내와 자식을 먹여살리면서 한 세상 살아간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를 76세로 병고에 시달리는 우리 아버지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나이로 밖에는 세월을 느끼지 못하는 못난 자식을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바라보실까. 내 고향 청양은 그런 기억 속에 연민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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