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 | 2007/06/08 (금) 18:40
죽기 전에는 죽지 마세요
나는 올해 예순아홉이신 장모를 모시고 산다. 말이 모시는 거지 실은 밥을 짓고, 김치를 담고, 빨래하고, 마당에 잡초를 뽑는 일까지 다 하므로 어머니는 정당하게 가사 노동을 하며 사시는 셈이다. 파출부라면 정말이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는 못할 것이다. 잠시도 쉬는 법 없이 하루 종일 꼼지락거리는 성미다 보니 마당의 잡초나 쓰레기, 일곱 마리나 되는 우리집 강아지들한테 꾄 벼룩 따위한테는 정말 끔찍한 천적이다. 그런즉 제일 편한 건 아무래도 친딸인 내 아내요, 그이의 손녀인 딸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걸핏하면 성을 내며 어머니한테 소리치고, 딸마저도 그 어미를 닮아서 그런지 할머니를 괴롭히고 졸라대는 솜씨가 정말 가관이다. 왜 빨래를 안해 놨느냐, 다림질을 왜 이 모양으로 했느냐, 새로 담근 김치가 너무 짜다고 신경질내는 것은 주로 아내 몫이다. 일요일날 텔레비전 만화 시간에 맞춰 깨워주지 않았다고 성내고, 초저녁에 잠든 할머니를 깨워놓고 쎄쎄쎄 하자며 졸라대고, 아침에 학교 가면서 신발 안꺼내 놓았다고 짜증내는 건 여덟 살짜리 딸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기뻐한다. 딸하고 손녀하고 번갈아 투정을 부려도 어차피 핏줄이라서 그런지 뒷끝없이 즐거워하고 재미있어 한다. 나이 쉰에 남편을 떠나보낼 때까지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모진 인생을 살아온 어머니한테는 그나마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던 행복도 겨웠는지 그만 작년 가을부터 어머니가 제 나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열살 난 늙은 개를 안아서 옮기다가 그만 삐끗한 것이 척추에 탈골이 될 정도로 크게 일을 내고 말았다. 게다가 마침 틀니를 새로 했는데 잇몸이 나빠서 그런지 제대로 맞지 않아 음식을 씹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먹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면서부터 어머니는 갑작스레 늙기 시작했다. 예순여덟까지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어머니는 고추도 잘 가꾸고, 이불빨래도 척척 해냈다. 그러므로 그냥 어머니일 뿐이라고 밖에는 느끼지 못하고, 생신이 되어도 박수치며 노래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아, 그런데 한번 아프기 시작하니 역시 어머니는 그야말로 할머니였다. 그것도 칠순을 눈앞에 둔 큰할머니였다. 한번 눕자 어린애처럼 성격이 바뀌면서 일도 많아졌다. 밥을 지어서 드려야 하고, 빨래를 해 입혀야 했다. 어머니가 누우면서부터는 거실 바닥의 먼지도 뽀얗게 잘 보였다. 개 밥그릇에 사료가 떨어지기 일쑤고 물그릇에 물때가 끼기 일쑤였다. 마당의 잡초는 왜 그렇게 쉬 자라고, 쉬임없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에는 병원에 갈 때도 마을버스로 다녀오곤 했는데, 그마저도 타지 못하니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꼭 차로 모시고 다녀와야 했다. 그럴수록 손녀딸은 더 신경질을 부렸다. 말 상대를 해주지 않고 놀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의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마음놓고 학교도 나가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꼼짝없이 집안에 붙들리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원래 의지가 좀 약한 편이던 어머니는 금세라도 돌아가실 것처럼 끙끙 앓기 시작했다. 의사의 진단보다 어머니의 증세는 항상 앞서나갔다. 참는 게 습관이 되어 있던 분이라 그런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냥 누워 있기만 했다. 견디지 못하면 엉금엉금 기다시피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는 게 고작이었다.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일이 점점 늘어갔다. 고통이 심할수록 자식들 원망, 친척들 원망, 돌아가신 장인에 대한 원망이 한두 마디씩 튀어나오기 시작하더니 어머니의 얼굴은 갑자기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위인 내 성격도 한몫을 하기 시작했다. 내 성격은 내가 봐도 별로 인간미가 없다. 칼끝처럼 차갑다고나 할까, 인정머리가 없는 게 큰 단점이다. 이런 내 성격을 소개할 만한 일화가 한 토막 있다.
전에 언젠가 불교방송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돕는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진행자와 리포터, 자원봉사자들이 매일 아침 그 시간만 되면 내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출근 시간에 몇 번 그 방송을 듣던 나는 참지 못하고 한 신문에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 생노병사가 다 공부거린데, 왜 너희들이 함부로 남의 인생에 끼어서 그 사람들의 환경을 바꾸어 놓느냐, 그것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소개를 해야지 진행을 하고 소개를 하는 사람들이 덮어놓고 울고짜면 어떡하느냐는 질책을 따끔하게 담았다.
난 지금도 몸이 성한 사람이 남의 도움을 기대하는 걸 보면 참지 못한다. 정말 하다하다 안되면 몸을 팔아서라도 먹고사는 것이 참인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신장을 팔아서라도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고속도로 정체 구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먹을거리를 파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것이 불법이건 말건 존경심을 느낀다. 서울역 대합실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자며 누가 도와주기를 기대하는 실업자들보다는, 내 눈에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가 더 아름답게 보이고, 폐지를 모아 리어카에 끌고가는 할머니가 눈이 시큰하도록 존경스럽고, 유리창안에 줄지어 앉아 있는 창녀들이 더 씩씩해 보인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위가 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난 그러잖아도 아파서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붙들고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사람이 당장 내일 죽더라도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몸이 죽기 전에 생각이 먼저 죽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나는 어머니더러 불경(佛經)을 꾸준히 읽으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권했다. 남 원망하지도 말고 맺힌 게 있으면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풀어버리라고 했다.
어머니는 병이 깊어지자 서른 살 무렵에 어떤 친척집에 갔더니 밥 먹으란 소리조차 안하더란 케케묵은 옛날얘기까지 꺼내면서 서운해 할 정도였다. 그러면 나는 왜 그때 ‘밥을 못먹었으니 밥 좀 주세요’ 하고 말하지 못했느냐고 또 어머니를 다그친다. 문제는 어머니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어머니가 배가 고픈지 점심을 굶었는지 알게 뭐냐면서 어머니를 마구 몰아쳤다.
그래도 어머니는 조금도 호전되지 못했다. 그러기를 6개월여 하자 집안 분위기가 영 이상해졌다. 자식들이란 게 맨날 어머니를 야단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끝낸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타협하기로 했다.
먼저 잘 아는 한의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보았다. 증세는 예상만큼 심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만만찮게 나왔다. 나는 한의사에게 나을 수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서 꾸준히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는 답변을 어머니 면전에서 얻어냈다. 그래서 나는 그 한의사와 어머니 앞에서 나대로 선언했다.
“어머니가 나을 때가지 천 첩이고 이천 첩이고 약을 쓸 테니, 어머니는 제발 지레 포기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낫기 전에는 우리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의원에서 처방하는 대로 첩약을 지어먹고, 일주일에 두 번씩 침을 맞혀드렸다.
그렇게 한방으로 치료를 시작한 지 이제 넉 달쯤 되었다. 지금 밖을 내다보니 어머니는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다. 잡초를 용서하지 않는 성격만큼이나 뽑아놓은 풀이 수북해 보인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것까지는 안되지만 그래도 고통을 호소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몰래 까먹고 온 손녀딸을 내게 일렀다가 들켜서 서로 말다툼도 하고, 한약을 더 싼 데 가서 짓겠다며 멀리 이천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이로써 한숨을 돌릴만큼은 되었다.
그래도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시골에 따로 사시는 아버지가 누운 지 일년이 되어가면서 아버지 역시 그런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일요일, 나는 싫다는 아버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목욕을 시켜드렸다. 그리고 따끔하게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돌아가셔도 좋은 데 다시 태어납니다. 제발 어머니가 해드리는 밥 좀 참고 드시고, 누워 있을 때는 그냥 누워 있지 말고 숨 쉴 때마다 하나, 둘 이렇게 백까지 세세요. 그게 심심하면 거꾸로도 세어보고, 또 심심하면 관세음보살을 부르세요. 아버진 남 해꼬지는 안하고 인생을 사셨으니 지옥은 가지 않겠지만, 남한테 베푼 것도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반성하지 않으면 극락 못가요. 돌아가실 때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극락 못가면 최소한 좋은 집안에라도 환생해야잖아요.”
이런 자식을 아버지는 그저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하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를 뵈러 내려갈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반복한다. 나라고 해서 그 나이가 되어 정신을 똑바로 차릴 자신은 없다. 다만 그때 가서 내 딸이 나를 그렇게 윽박질러주기를 바랄 뿐이다.
- 왼쪽 사진은 아버지 19세, 오른쪽 사진은 23세다. 오른쪽 사진은 1945년 봄 일제에 강제징집되어 끌려가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다.
아버지는 청양에서 징집되어 끌려가다 대전에서 탈출했고, 이윽고 해방되어 오래 숨어다니지는 않았다.
- 이 글은 <푸른태양> 1번 게시물인 '어머니와 할머니'의 원본이다. '풍경소리'의 청탁을 받고 이 글을 줄여 보낸 것이다. 아버지는 2000년 4월에 돌아가셨으니, 글 쓴 시기는 2000년 이전인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