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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글, 이렇게 쓰면 안된다

동아일보 컬럼을 읽는데 마땅치 않은 게 보인다.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이란 사람이 쓴 건데, 그래서 가끔 동아일보 사설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 지난 2월 14일에 <천정배를 탈레반이라니? 동아일보 너희가 정녕 미쳤느냐?>를 썼는데, 

이 정도 인식을 가진 논설위원이면 쓸 수 있는 사설로 보인다.


남의 글 비판하기가 어려운데 혹시 따라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몇 가지 지적한다.

난 이 사람을 알지 못하고, 개인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가 써놓은 결과물만 갖고 말한다.

난 우리말로 된 글을 놓고 '문학적' 운운하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어법과 논리, 기본 상식만 갖고 말한다.

내 이력 중 소설가로서 쓰는 비판이 아니라 사전편찬자로서 비판한다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OOO의 법과 사람]이어령의 뒤통수를 때린 참용기


이어령 선생은 천재다.

객관화가 불가능한 주장이다.


거의 유일무이한 국보급 천재다. 

이 역시 개인의 주장일 뿐이다. 수석논설위원이란 사람이 쓸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다음 아고라나 일베 정도에서나 가능한 일방적인 주장이다.


양주동은 그 시대 TV나 라디오에 나와 가장 말을 많이 했고, 가장 많은 글을 썼다.

통계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썼다고 한다"고 적어야 한다.


양주동처럼 박학강기(博學强記)를 뽐낸다.

동아일보가 중국신문이 아닌 다음에야 한국인이 거의 쓰지 않는 한자어를 이렇게 쓰면 안된다.

박학까지는 봐줄 수 있지만 강기는 안된다. 우리말이 아니다.


기라성 같은 문단의 원로급부터

기라성은 '반짝이는 별'을 가리키는 일본어다. 

수석논설위원이란 분이 이 정도 교양이 없으면 곤란하다.


나도 어디 가도 꿀리지 않고 구라를 피울 줄 안다. 

구라는 일본말이다. 이러니 동아일보가 친일어용신문 소리를 듣는다.


나의 영원한 대부(代父) 최인호가 

대부는 대부일 뿐 영원하지도 짧지도 않다. 영원한 아버지가 있을 수 없듯이 영원한 대부도 없다. 영원한 장모, 영원한 아내란 표현이 없는 것과 같다. 대부의 뜻을 모르고 쓴 것같다.


뇌중풍으로 쓰러진 여파로 말이 어눌해

뇌중풍은 없다. 뇌졸중이다. 중풍이라고 하든지, 기왕이면 정확하게 뇌졸중이라고 해야 한다.

'여파'가 아니라 측두엽 쪽에 오는 뇌졸중의 당연한 증상 중 하나가 말이 어눌한 것이다. 여파란 어휘도 맞지 않는다.


보석 같은 체험담을, 깊고 풍부한 지혜를, 번득이는 예지를

체험담은 보석 같질 않다. 다양한 게 체험담이니 꼭 보석같은 것이라고 특정하면 안된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지혜와 예지는 거의 비슷한 말이다. 같은 말을 두 번 쓴 것만큼 어색하다.

예지는 叡智와 豫知가 있는데 앞엣 것은 지혜와 같고, 뒤엣 것은 혼동을 피해 예측 능력이라고 쓰면 된다.


 레플리카(복제품)를 전시하기로 한 뒤 

복제품(레플리카)라고 쓰는 것이다. 우리말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잘난 사람들은 레플리카를 일상으로 쓰는지 몰라도 그러면 안된다.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을 뒤집은 전례가 전무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 대통령이 아니라 하늘이 재가해도 틀린 건 틀린 거다. 종들이 보기에 존경스러울 뿐이다.


아마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을 뒤집은 첫 사례일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그 이전 전두환, 최규하, 박정희, 윤보선, 이승만 시절에 과연 이런 일이 없었을까. 물론 대통령 기록물을 다 찾아보지 않았으리라고 의심한다. '첫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도로 써야 한다.


이어령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데 뒤통수에서 대통령의 말이 들려왔다.

이어령 같은 분이 이만한 일로 의기양양하지 않는다. 적절치 않다.

또 대통령의 말은 뒤통수에서 들려온 게 아니라 뒤 혹은 등뒤에서 들려온 것이다. 뒤통수는 신체 부위이지 장소를 가리키지 않는다. 꼭 쓰고 싶으면 '뒤통수에 대고 말하다. 정도의 표현이 적절하다.


노 대통령이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의적인 표현이다. 어떻게 부처님 미소를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노태우에게 갖다 붙이는가. 이것도 안되지만 굳이 붙이자면 '부처님 미소처럼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정도로 했어야 한다.


  <컬럼 원문>

이어령 선생은 천재다. 1934년 충남 아산에서 났다. 올해로 82세. 양주동 박사(1903∼1977)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국보급 천재다. 양주동은 생전 술이면 술, 글이면 글, 말이면 말로 ‘국보 제1호’였다.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영문학자, 번역문학가, 수필가였다. 비공식 통계지만 양주동은 그 시대 TV나 라디오에 나와 가장 말을 많이 했고, 가장 많은 글을 썼다.


이 시대 이어령이 그렇다. 여든 넘은 나이에도, 수술하고 건강에 이상이 온 지금도 여전히 양주동처럼 박학강기(博學强記)를 뽐낸다. 내가 이어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7, 8년 전 인연이 맺어진 서영은 작가를 통해서다. 이어령이 이화여대 교수를 하면서 1972년부터 14년간 월간 문학사상 주간을 할 때 서영은이 이어령을 모셨다.


몇 년 전 서영은이 나를 불렀다. 이어령 선생을 모시고 점심을 하는 자리였다. 기라성 같은 문단의 원로급부터 중진 작가 10여 명이 있었다. 나도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령 선생이 조금 늦게 와 착석했다. 그때부터 마이크를 아마 90% 독점했다. 나도 어디 가도 꿀리지 않고 구라를 피울 줄 안다. 그런데 그날 나는 평생 처음 짧게 두세 번밖에 말하지 못했다.


나의 영원한 대부(代父) 최인호가 몇 차례 이어령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을 뿐이었다. “승옥이 형(‘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의 작가 김승옥), 요즘 어떻게 지내?” 2003년 뇌중풍으로 쓰러진 여파로 말이 어눌해 필담으로 ‘충무공 이순신에 관심…’이라고 쓴 종이를 보여줬다. 그때 이어령은 다시 “임란 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이라며 해박한 지식을 한껏 과시했다. 놀라웠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최인호 대부에게 나중에 물어봤다. “왜 그랬냐고.” “다 좋으신데 너무 마이크를 독점하셔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엔 압도당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며칠 전 이어령을 같은 모임에서 봤다. 근데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지 마이크를 겨우 60%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가 건강하게 100세 넘게 오래오래 살아 보석 같은 체험담을, 깊고 풍부한 지혜를, 번득이는 예지를 후배들에게 많이 나눠주길 진심으로 빈다. 


그날도 그는 나에게 보석 하나를 선물했다. 문화부 장관 때 일이었다. 외무부에서 유엔본부에 전시할 각국의 문화재를 모집할 때였다. 어떤 문화재로 할지는 문화부의 소관이다. 그런데 외무부에서 제멋대로 신라금관으로 정하고 레플리카(복제품)를 전시하기로 한 뒤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문화부에 사후 통보했다.


이어령 장관은 보고를 받은 뒤 불같이 화를 내고 외무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을 뒤집은 전례가 전무했다. 할 수 없어 이 장관이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노 대통령에게 요모조모를 설명했다. “신라금관 모조품은 사이즈가 작아 눈길을 끌 수 없다. 오히려 88올림픽 때 사용한 용고(멕시코 큰 소의 가죽으로 만든 대형 북)나 월인천강지곡 목판인쇄본을 확대 복사하는 것이 훨씬 나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노 대통령은 바로 외무부 장관을 찾아 “나 노태웁니다. 이어령 장관 생각대로 하세요”라고 지시했다. 아마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을 뒤집은 첫 사례일 것이다. 


이어령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데 뒤통수에서 대통령의 말이 들려왔다. “이 장관, 혹시 저의 좌우명을 아시나요. 참용기입니다. 참자 용서하자 기다리자. 그렇게 평생 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 장관이 얼굴이 붉어져 돌아보는데 ‘물태우’라 불리던 노 대통령이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동아일보에 몸 담고 있는 분들은 이 신문의 친일, 친독재 과거를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