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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가던 길 멈추고 2012

암으로 돌아가신 목사 님, 작은어머니, 사촌아우를 생각하며

* 이 글은 2012년 6월 10일에 쓴 것으로, 바이오코드연구소 카페에 원문이 있다.

4년 세월이 지났으니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도 생긴다. 연구소 글에는 실명이 있지만 여기서는 지운다.


A 선생님 부군 조 목사님은 0620이다.

A 선생님은 0730이다.

두 분 다 의기투합하면 손해가 뭔지 이익이 뭔지 제쳐두고 우선 일부터 하고 보는 분들이다.

의기 투합한다고 세상일이 순조롭다면 누군들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던 조 목사는, 하지만 이미 각질화돼버린 교회권력 앞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가 믿는 하나님 앞에 비겁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리가 없다. 교회에서도 눈치를 보고, 수를 쓰고, 아첨을 하고, 작당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사람은 주변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중국 선교에 나섰지만 자금 부족과 현지 공산당 정권의 종교 탄압 및 간섭, 중국인들의 이해 부족 등으로 간난신고를 겪었다. 평생 배운 것이라곤 목회 일밖에 모르는 그의 가정은 피폐했다. 안팎으로 닥쳐오는 고난이 그를 엄습했고, 인고로 버티다 결국 암에 걸렸다.

 

암의 1차 원인은 스트레스다. 그가 받은 스트레스의 양을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그냥 그의 마음의 지도같은 얼굴을 보면서 막연히 상상만 할 뿐이었다.

 

2011년까지 교육을 마친 2급 상담사 대부분은 조 목사를 잘 안다. 부부가 운영하던 서래마을 OO는 우리들의 스터디 단골집이고, 해마다 연말이면 모여 회포를 풀던 곳이다.

 

조 목사는 약 2년 전 암이 진단되어 수술을 받았고, 경과가 괜찮은 듯하여 재차 중국 선고에 나섰지만 암이 재발해 귀국했다. 항암 치료를 받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양주에 잠시 머물면서 자연치료를 받았다. 항암성분이 풍부하다는 우리 된장을 갖다 드리고 된장차를 끓여마시는 법을 알려드리기도 했다. 용인으로 모셔 자연치료 전문가를 소개시켜드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척추교정을 해준다는 분의 호의를 물리치지 못하고 등을 내밀었다가, 이미 척추까지 퍼진 암세포를 건드리고 말았다. 벌집을 건드린 셈이다. 암세포가 급격히 퍼지자 조 목사님은 치료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떳떳이 응하겠다고 결심, 지난 일요일 용인에 있는 호스피스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당일 A 선생님이 용인에 사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마침 40매 짜리 잡지 원고를 쓰던 중이라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또 감기가 심해서 이튿날인 월요일 아침 병원으로 찾아갔다.

집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용인의 끝 백암, 백암에서도 끝인 이천 접경에 호스피스병원이 있었다.

공기 좋은 곳이라서 이런 곳에서 마음 수련을 잘하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감기가 심해 목사님께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서너 걸음 앞에 앉아 이야기만 나누었다. 바이러스가 걱정되어 손도 잡아드리지 못했다. 기존에 먹던 모든 항암 관련 약을 병원에 반납하고, 이제 병원에서 주는 약만 먹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통증만 줄이는 약이다. 치료가 아니라 편안하게, 존엄하게 세상을 떠나도록 도와주는 병원이니 모든 게 그러했다. 난 급한 마음에 선물로 받아두었던 상황버섯과 영지버섯을 들고갔지만 병원 규칙상 어떤 외부 약이나 음식도 허용되지 않아 도로 가져왔다.

 

공식적으로 죽음을 인지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호스피스 병원, 방마다 그런 분들이 누워 있는 곳에서 조 목사님께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머리를 쥐어짠들 그게 약이 되겠는가, 위로가 되겠는가.

 

"아버지, 정신 차려요! 죽을 때까지는 죽지 마세요!"

죽음을 앞두고 기력을 차리지 못하던 아버지에게 나는 그렇게 소리질렀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서로 신앙관이 다르긴 하지만, 그 몸 버리고 아기로 태어나 무슨 일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웬만하면 그 몸 고쳐 쓰세요."

그러면서 암세포와 공존하는 문제를 얘기했다. 목사님은 통증은 느끼지 않았지만 기력이 쇠해 대화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점심 식사를 반밖에 하지 못했다. 효소 조금 마시고, 물 조금 마시는 정도였다. 이 날 나눈 대화를 조금 더 가다듬어 쓴 것이 <암세포들아, 내 말 좀 들어봐>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정말이지 이 글을 자주 읽으면 암세포들이 각성하여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것이라는 확신도 가졌다.

"누님, 이 글 프린트해서 읽어주세요. 암세포 들으라고."

A 선생님이 날 배웅하는데, 리키가 같이 왔다고 하니 주차장까지 따라 나왔다. 리키는 보자마자 날 더운데 저를 차에 두고 어딜 그렇게 오래 다녀왔냐며 신경질을 부렸다. A 선생님은 그것도 모르고 안아보고 싶다 하여 건네는데 리키가 그만 왕하고 물어버렸다. 물린 손가락에 피가 났다. 리키는 나도 물으려고 했다. 창문을 다 열어두고 갔는데도 덥고 신경질이 났던 모양이다.

 

금요일 저녁, 아버지의 첫부인 제사가 있어 시골에 갔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첫 부인이 있었지만 스물도 안된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자식이 없다. 아버지의 자식인 나는 다른 제사는 혹 가지 못해도 이 제사는 꼭 가려고 애쓴다. 오래 전에 우리가 '큰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분 묘소를 열어 뼈를 수습하고 화장해서 우리 형제들이 골분을 산에 뿌렸다.

 

토요일, 웬일인지 잠이 안와서 다섯시 반에 일어나 동네를 둘러보았다. 그 시각은 A 선생님도, 조 목사님도 하얗게 밤을 지새며 고통스러워 하던 무렵이다.

사람들은 벌써들 일어나 물꼬를 보러 나가고, 소 외양간에 나갔다.

어젯밤 제사 지낸 직후에는, 큰형이 어머니가 새벽 세시에 전화해 서울 숙부 문병하라고 시켰다는 주장을 듣고 형제들이 난상토론을 벌였다. 어머니는 열한시 넘어 한 건 맞지만 새벽에는 안했다고 하시고, 형은 새벽 3시라고 우겼다. 치매 기운이 있어 다들 긴장하는 상황이라 내가 어머니 휴대폰을 검색해보니 11시 50여분 정도에 전화건 기록이 남아 있었다. 다행이 새벽 3시에 전화한 기록은 없었다. 어머니는 "거봐라, 치매 아니다." 하시며 그제야 안심하고 형은 물러섰다. 그렇게 어머니를 위로하고 보니 아침 6시면 늘 두어 통씩 전화거는 상대가 보였다. 대개 첫째, 첫째며느리, 이런 식으로 적힌 이름이 아니고 맨으로 전화번호만 있었다.

"어머니, 이 분은 누구길래 아침마다 전화하나요?"

 

아침에 그게 생각나 물으니 어머니 말씀하시기를 "예산 숙모인데, 폐암 걸려서 나랑 맨날 전화로 얘기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올라가는 길에 들렀다 가라고 하셨다.

상태를 물으니 병원에서 나와 집에 있다고 한다. 그럼 거기도 조 목사님처럼 때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돌아가신 다음에 가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아침 먹고 다 갑시다."

그러고서 아침 먹고나서 차조기 잎 따고, 이곳저곳 사진 찍고 돌아다니다 돌아왔다. 어머니는 김칫거리 뽑아다 며느리와 다듬었다. 그때 집에 놓고갔던 전화기에 찍힌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창에 뜨는 이름 <AOO>. 느낌이 왔다. 안받은 전화 다음에 달라붙은 메시지를 여니 오전 8시 경에 소천하셨다는 짤막한 문자였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앰뷸런스로 조 목사와 A 선생님이 이동하는 중이었다.

 

정 많이 든 분들 몇 명에게 부고하고, 어머니더러 예산 숙모한테 바로 가자고 했다.

집안에 들어서니 인기척이 없었다. 마당에 보니 짙은 분홍색 선인장 꽃이 만발해 있었다.

일부러 꽃이 아름답다고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문을 열었다. 적막하다.

"작은어머니, 어디 계세요? 누구 없나!"

그러고 보니 안방에 누워 있던 숙모가 얼른 몸을 일으켜 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이윽고 둘째가 헐레벌떡 건너왔다. 그나마 정 많은 둘째가 내려와 간병중이다.

"냄새 안나니? 아이고, 냄새 고약할 텐데?"

"냄새 안나는데? 무슨 암환자 방이 이렇게 깨끗해?"

숙모는 나 세 살 때 날 돼지로 만들어준 분이다. 막 시집와가지고 어린 내가 부엌으로 가서 "작음마(작은어머니를 빠르게 부르는 말) 밥줘!" 그러면 "애기, 또 밥줄까?" "응." 그러면서 하루에 다섯 번이라도 얻어먹었다 한다.

 

약꾸러미를 보니 치료약은 별로 없고 보조제들 뿐이다.

속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헤아려보았다. 둘째 주장으로 일년은 보는 듯했다. 난, 모르겠다.

"그럼 어머니 모시고 시골로 들어가라. 폐암은 숨쉬기가 어려운데, 산에 가면 산소농도가 높아 숨쉬기가 조금 편하다. 음이온 풍부하고, 피톤치드 많은 곳에 있다 보면 폐암은 저절로 낫는 수도 있다."

그러고서 절차와 방법 따위를 알려주었다. 

어머니는 말씀을 숫제 못하셨다. 여든세살인 어머니는 죽는 사람을 하도 많이 보아서, 재작년만 해도 자매처럼 지내던 이웃 당숙모가 음독 후 사망하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몹시 착잡하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죽을 때 죽더라도 아프지나 않다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작은어머니는 워낙 예의바르고, 체면 중시하는 분이라 우리가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불편하더라도 참아가며 앉아 있을 분이었다. 어머니더러 그만 일어나시라고 했다. 사실 어머니는 형들이 집에 왔을 때 예산 좀 가자, 가자 청했지만 늙으신 몸으로 문병갔다 병 옮으면 어떡하냐는 둘째의 '근거없는'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날에서야 숙모를 보았다.

(이후 숙모는 몇 달 안가 사망하고, 간병하던 사촌동생도 특이암으로 사망했다.)

 

나는 올라오고, 어머니는 손녀 손잡고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내 차에는 리키가 조수석에, 바니가 뒷좌석에 앉아 졸며 눈뜨며 함께 있었다.

날씨가 덥다고 내내 헉헉거렸다.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아 나는 에어컨 대신 바깥 바람을 쐬려 했지만 이것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아 감기를 무릅쓰고 에어컨을 켜야만 했다.

 

집에 도착하니 두어 시, 약속을 여덟시로 잡았으니 시간 여유가 있어 텔레비전도 보다 컴퓨터도 하다 시간을 흘려보냈다.

 

8시가 되어 국화 한 송이를 조 목사 영전에 올렸다.

"목사님 시신을 중앙대 병원에 기증하기로 했어요. 사례도 특이하고, 암 치료 중 쑥뜸을 하니 암세포가 피부 바깥으로 돌출한 걸 보니 연구 가치가 있을 것같아서요. 그동안 무슨 치료를 했는지 자세히 적어서 병원에 보내드리려구요."

"A 선생님 혼자 결정하셨어요?"

"목사님도 동의하셨어요."

"잘하셨네요. 불에 태워없애면 뭐하겠어요. 목사님 사례를 연구하면 좋은 자료도 나오겠지요."

 

나는 <암세포야, 내 말 좀 들어봐>를 쓰면서 숙주인 인간이 죽으면 너희들도 불에 타 죽는다고 협박했는데, 적어도 조 목사님을 괴롭힌 암세포들은 어쩌면 실험실에서 생명을 이어갈지도 모르겠다. 내일 월요일 아침 영결식이 끝나면 조 목사님의 육신은 중앙대 병원에 정식으로 인계된다. 그뒤 절차는 잘 모르겠지만 해부와 분석 과정을 거친 다음 화장을 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돼야만 봉안이 가능할 것같다. 며칠이 걸릴지, 몇달이 걸릴지도 모른다. 

 

백년 전에 암으로 죽은 한 미국 여성의 경우 그분의 몸에 있던 암세포가 지금도 남아 연구실에서 자라고 있다. 이 암세포를 증식해 전세계 병원에 연구용으로 나눠줬다고 한다. 백년 전 암이 지금도 자라고 있는 것이다.

 

조 목사님은 지금 하늘에서 휴식하고 계실 것이다. 나 잘 있다, 이렇게 사인을 보내주시면 좋으련만 인간과 영은 주파수가 서로 달라 교신이 어렵겠지 뭐. 언제든 인간과 영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휴대폰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스티브 잡스도 하늘에 가 있으니 아마 머지 않아 나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아마 목사님이 가 계신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짜릿하고 환타스틱할 것이다.

 

카페에 더 일찍 고지하지 않은 것은 혹시 부담들을 가질까봐서다.

이로써 족하다. 목사님과 맺었던 인연에 감사한다.

(이 글에 나오는 우리집 개 리키와 바니도 그 사이 하늘로 갔다. 앞서서 숙모와 사촌동생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A 선생은 미국으로 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그뒤 소뇌 뇌경색이 와서 몇년째 투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