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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가짜화가 이중섭

이중섭 갤러리 1 - 원산 시절


이중섭이 육이오전쟁 중 1951년 1월 4일, 흥남부두로 철수할 때까지 그린 그림이다.

즉 35세 이전 그림이다.

이 시기에 그는 아버지를 잃은 상태에서 태어나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고, 일본 유학을 하고,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큰아들을 낳았으나 디프테리아로 잃었다.


이중섭(李仲燮) 연보 1

 

19161

916,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700석 규모의 부유한 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악 이씨다. 부친 이희주는 우울증에 정신분열증까지 더해져 나이 서른에 허망하게 요절한다. 이 때 장남 중석이 12, 누이 중숙이 5세였다. 부친 이희주가 세상을 떠날 당시 중섭은 모친의 복중 태아였다. 410일로 알려진 생일은 잘못된 것이다.

 

19249

서당에서 동몽선습, 맹자, 논어등을 배우다가 외가가 있는 평양 시내로 나가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화가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한 반이 되었다. 보통학교에 다니는 동안 김찬영의 집에 가서 각종 화구와 미술 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 유적 안에서 잠자기도 하고 운동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한편 늦도록 어머니 젖을 먹고, 오줌을 자주 쌌다.

 

192813

보통학교 4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중섭은 수채화,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193116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미술부에 가입해 교사이던 서양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예일대 출신의 유학파였다. 당시 이중섭은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렸고,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했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렸다. 다쳐서 1년간 학교를 쉬었다.

 

193318

정주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닐 때 그의 가족들은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사했다. 이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형 중석이 원산에 백화점, 문방구점, 악기점을 열었다. 집안은 여전히 부유했다.

 

193419

일본 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오산학교 건물인 화학실에 불을 질렀다. 오산학교 25회 졸업 앨범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 쪽에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물의를 일으켰다.

 

193621

일본 도쿄로 가서 데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했다. 이후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동경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에 입학했다. 이때 김병기, 오산학교 선배 문학수와 유영국이 상급생이었다. 강사로 나오던 쓰다 세이슈와 친밀하게 지냈다. 기츠조지의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하였다.

 

193823

서울화신백화점에서 열린 동경유학생들의 미술협회전에 <낚시질하고 돌아가는 아이들>을 출품했다. 이 무렵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했다.

 

194025

동경문화학원을 졸업했다. 일본의 자유미술가협회 주최 제4회전에 <>를 출품하여 협회상을 받았다. 원산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연말부터 애인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194126

프랑스 유학을 시도했으나 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328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주체 제7회전에 <망월(望月)>을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았다. 서울에서 세 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조선으로 왔다가 일본으로 다시 가기를 포기했다. 태평양전쟁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그림은 거의 그리지 못했다.

 

194530

4월에 애인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했다.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었다.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했다. 여기서 815 해방을 맞이했다. 10월에 서울에서 열린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최재덕과 함께 서울 미도파백화점 지하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렸다.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부당하게 뭇매질을 당하는 것을 말리다가 순찰 중이던 미군정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졌다. 벽화 사례금으로 골동품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갔다. 이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황염수 등과 6인전을 개최했다.

 

194631

2월에 북조선예술가동맹의 회화부원이 되었다.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다. 닭을 키우며 이를 그리는 데 열중하다 이가 옮아 고생했다.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시인 구상 등의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다. 시 내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를 받았다. 구상은 이 사건에 반발하여 월남했다. 이후 이중섭은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로 치부되었다. 마침 그 당시에 스탈린을 수염 없이 그려 또 논란이 되었다. 그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음을 비관하여 자주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월남을 하지는 않았다.

 

194732

6월에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 그림을 그렸다. 8월에 평양에서 열린 815 기념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했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가 호의적인 평가를 하였다. 둘째아들 태현(泰賢) 태어났다.

 

194833

99일에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출범했다.

 

194934

봄에 셋째아들 태성(泰成) 태어났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했다.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지냈다.

 

195035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 중석이 행방불명되었다. 친일파,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0월에 집이 유엔군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머물렀다. 전세가 바뀜에 따라 남한군이 북진했다.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126일에 다시 바뀐 전세에 따라 부인과 두 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흥남부두를 떠나 부산에 도착했다. 이때 70대 노모에게 그때까지 그린 그림을 모두 두루마리로 말아 맡기고 내려와 평생의 한이 되었다. 부산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했다.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렸는데, 그 군인이 듣지 않자 화가 나 군인을 때렸다. 못 견딘 군인이 패를 지어 다시 나타나서 휘두른 총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 토끼풀이 있는 바닷가, 1941


- 연꽃 아래 헤엄치는 여자, 1941


바닷가


- 망월, 1940


- 야수를 탄 여자, 1945


- 바닷가에서 물새와 노는 아이들, 1941


- 소와 여인, 1942경


- 소, 1941. 지유텐 출품작


- 소와 아동, 1942


- 두 사람, 1942



- 저울질하는 사람, 1941


- 발 치료해주다, 1941. 부인 발을 치료해주는 이중섭 자신인 듯


- 연못이 있는 풍경, 1941


- 사람을 치는 소, 1942.8.6


- 말 탄 남자를 뿔로 쳐내는 소, 1941


- 반우반어, 1940


- 파도와 물고기, 1941.9


- 엽서, 1941년


- 소와 소년, 1941년 지유텐 출품작. 소년이 아닌 여인으로 보임


- 소와 여인, 1941


- 두 여인, 1940년경 추정


- 누운 여인, 1941년 * 부인 마사코라고 함.


- 소를 든 사람, 1942

]

-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1941


- 짐승을 부리는 사람들, 1941


- 활쏘는 남자, 1941


- 세 사람, 1942


-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1943


- 말과 소를 부리는 사람들, 1941


- 두 마리의 사슴, 1941


- 두 마리의 동물, 1941


- 나뭇잎을 따려는 여자, 1941


- 꽃피는 산, 1941.9

- 해를 불평하는 사람, 1941


- 연꽃밭의 새와 소, 1941


- 두 어린이와 복숭아, 1950년 이전


- 연꽃이 핀 물가에서 노는 세 아이, 1941


-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1941


- 나뭇잎을 따주는 남자,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