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기업 한진해운을 뒷처리하는 우리 정부 수준이 대단히 실망스럽다. 박근혜 정부의 일솜씨를 보니,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 정부를 믿으면 안된다는 오랜 믿음이 더 강해진다.
어느 한 기업이 망해갈 때는 그 조짐이 조금씩 나타난다. 한진해운은 회장인 조양호의 딸 조현아가 못된 짓을 하다가 처벌될 때 이미 무너져내렸고, 조양호 회장은 이 사건을 부풀리고 키우는 언론과 정부에 대한 충격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던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한진해운을 쉽게 버린 조양호의 복수로 보이기도 하고, 그의 무능으로 보이기도 하고, 정부와 채권단의 오기로 보이기도 하는 매우 복잡한 사건이다. 한진해운 사태가 우리나라 경제 위기의 전조가 아니기를 바란다. 경제담당 장관 등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공직자들이 일사분란 '시키는대로만 하는' 종질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경제적 충격이 생각보다 더 클 것으로 보인다.
* 한진해운 - 자본금 1조 2천억원. 매출 7조 7천억원. 영업이익 369억원. 순이익 30억원. 현재 한진해운의 공식 사이트는 잠겨 있다.
한진은 나와 인연이 있는 회사다. 오늘날 한진그룹의 주력회사인 한진해운이 공중분해되는 걸 지켜보자니 옛 생각이 나면서 기분이 착잡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딱 3년간 남의 밑에서 일해보았다.
이 직장 생활 3년 동안 나는 기계처럼 <글 쓰는 일>을 했다. 그러다보니 내 글이 없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내 심기가 뒤틀린 것은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의 고희기념집을 쓸 때였다. 그 아들 조양호(현 한진그룹 회장. 당시 42세)의 주문으로 글을 쓰는데 조중훈을 한자로만 쓰라면서 훈을 勳이 아니라 動 아래에 점 네 개를 찍으라고 요구했다. 당시 컴퓨터에는 그런 자가 없었고(지금도 아래아한글에 없는 일본식 한자다), 우리 사식(당시에는 글자를 쳐서 조판했다. 그런 조판용 글자를 사식이라고 했다. 일본말이다.)에는 없고, 일본 사식에 그런 글자가 있어 일일이 뽑아다 끼워넣어야 했다. 그러면서 내 판단이나 양심에 따라 표현하는 것을 일절 금했다. 그들이 발주하여 쓰는 글이니 클라이언트(일 준 사람을 가리키는 그 업계 용어)의 의중까지 파악해가면서 글을 써야만 했다. 이 책이 어디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난 완전히 기계적으로, 공학적으로 그 책을 써냈다. 글 쓰는 기술자로 일한 것이다.
칭기즈칸은 마지막으로 금(金)나라를 무력으로 정벌한 뒤 포로로 잡혀온 야율초재를 보고 "너는 글 쓰는 기술자이므로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칭기즈칸은 당시 아무리 원한이 큰 나라를 정벌해도 기술자만은 꼭 살려주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딱 그런 대우를 받는 처지였다. 당시 조양호 등 그의 형제들은 고희집 내용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나를 글쓰는 '어린' 기술자로 대했다.(당시 내 나이 서른한 살. 조중훈 씨 고희는 1989년 봄이라 88년에 집필작업했다.)
당시 조중훈 씨는 해외에 돌아다니느라 난 만나본 적이 없고, 그때에도 알래스카에 가서 사진 촬영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사진작가로 지냈는데, 그런 이유로 일은 그의 자식들이 다 맡아서 했다. 고희집을 쓸 때 의견을 내는 사람은 주로 양호, 수호, 남호 3형제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당시에 나는 이 형제들에게서 조중훈의 영웅담은 들었지만, 그들은 영웅적이지 않은, 즉 조중훈과 같은 창의력이 없는 사람들로 보였다. 즉 내 눈에는 모두 관리형으로 보였다.
그런 중에도 나는 조중훈 씨가 육이오전쟁 중에 어떻게 하여 한진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어 월남전을 일으킨군 군수물자 수송 사업에 뛰어들어 어떻게 그 큰돈을 벌어들였는지 연구하면서 그가 대단한 창의를 가진 기업인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하지만 지난 해 조양호의 딸이 갑질(용역이나 급여를 주는 입장에 있는 측이 부리는 횡포, 계약서에 흔히 갑이라고 표기되는 쪽이 우월적 지위가 있기 때문에 생긴 말)을 일삼다가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이어 오늘날 한진해운이 분해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조양호 씨는 아버지의 유업을 유지하는데 실패했다. 재산을 유지하는데 실패했다기보다 정신을 잇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의 큰아들 조원태가 난폭운전, 뺑소니, 욕설 등으로 가십기사에 오르고, 딸 조현아는 상상할 수 없는 갑질을 거듭하다 파멸했다. 즉 조중훈은 미군이 버린 트럭을 주워다가 고쳐서 돈을 벌었는데 조현아는 항공기 1등석에 앉아 멋대로 사무장을 욕보이고 항공기를 개인적으로 움직이도록 다그치는 짓을 했다. 국제선 항공기를 개인 소유 자동차쯤으로 인식하고, 사무장을 운전기사쯤으로 인식한 것이다.
난 한진해운이 분해되어 다른 회사로 흡수되더라도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기업정신은 꼭 살려주기를 바란다. 전쟁 중에도 돈을 번 사나이 조중훈, 기업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공부해야 할 우리 시대 인물이다.
* 바이오코드 메모 / 조양호는 0115~20. 작년부터 힘이 든 시기에 들어와 있고, 끝내 한진해운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딸 조현아는 0245. 2014년 12월 5일의 땅콩회항사건으로 2015년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이미 사고를 쳐서 이 화를 아버지에게 바톤터치, 결국 한진그룹을 몰락의 길로 밀어넣었다.
- 1969년 3월, 퀴논항. 앞에 걷는 이가 조중훈, 그 옆은 신상철 주월대사.
미군 군수물자를 하역하는 퀴논항, 조중훈은 1470톤의 군수물자를 32시간만에 인근부대까지 수송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5년간 벌어들인 달러는 1억 5천만 달러였다. 당시 우리나라 외환보유고는 5천만 달러였다.
- 1982년. 왼쪽이 조양호, 오른쪽이 조중훈.
* 여기에 한진상사가 월남에서 어떻게 군수물자를 성공리에 수송했는지 비화는 나오지 않는다.
한진상사 트럭에는 기관단총이 달려 있었고, 직원들은 M16소총을 휴대하였다. 이들은 정글을 지날 때 선제총격을 가하기도 하고, 베트콩을 만나면 직원들이 직접 교전을 하기도 했다. 아래는 미 국방성 수송박물관에 소장된 한진상사가 군수물자 수송 중 조우한 베트콩과 교전하는 장면. 이 직원들은 대개 군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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