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 신문 기사에 올라온 짧은 시 한 편을 읽다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여기 옮기고 몇 마디 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한 교사가 20년간 타향살이를 하다가 늘그막에 고향에 다시 돌아와 느낀 감회를 적은 시로 보인다.
- 어느날이었다./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나는 우리나라 시의 현주소가 아직 <지하철 시(멋대로 써서 줄만 바꾼 잡문이란 뜻. 주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걸려 있는 시 중에 이런 함량미달의 시가 많아서 내 마음대로 부르는 말)> 수준이다. 좋은 시도 많지만 막상 뜯어보면 문장이 구성되지 않는 억지 문법과 논리로 포장돼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시도 그렇다. 얼핏 보면 그 감성이 느껴지는 듯하다. 즉 알맹이는 괜찮다. 하지만 포장인 우리말이 서툴다. 한국인이 쓴 시를 서툴다고 하면 말이 안되지만, 실제로 말이 안되게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날 물가에 앉아 생각한 바를 쓴 시라는데, 중간의 핵심 부분에서 맛을 떨어뜨리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들어갔다. 아래 부분이다.
-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이 부분이 이 시의 핵심인데, 막상 서술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산같이 온순하고'에서 산은 온순하다는 정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정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물같이 선하고' 역시 물은 선하다는 정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정의는 없다.
'바람같이 쉬운 시'라는 정의를 어떻게 봐야할지도 모호하다. 바람이 뭐가 쉽다는 것인지 얼른 교감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에서는 사람의 아픔과 바람의 괴로움을 같은 것으로 묶었는데 상관관계가 뚜렷하지 않다. 특히 '사랑의 아픔들'은 사랑은 아픈 것이고,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고 해석될 수 있는데, 사랑은 곧 아픔이라는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아픈 사랑'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그래야 그가 겪은 사랑 중 아픈 경험을 말하는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다. 지금처럼 '사랑의 아픔들'이라고 하면 사랑하면 으레 아파야 하는데, 그런 법칙은 없다. 게다가 아픔은 수량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므로 '들'이 붙으면 안된다. 수량명사는 또렷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랑은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 어휘가 아니다. 그 앞의 '일들'도 수량명사가 잘못 사용된 부적절한 표현이다. 그냥 '많은 일이 있었고'로 적으면 된다.
즉 시인이 물가에 앉아 있는 동안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는데, 그것이 우리말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언어적 배열이 잘못된 것이다.
그가 쓰고 싶었다는 시를 그는 이렇게 정의했다.
-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
그럴싸하지만 이 문장은 모호한 이미지로 뒤섞여 뭉쳐졌을 뿐 깊이있는 언어의 맛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산은 온순하고, 물은 선하고, 바람은 쉬워야 하는데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산이 주는 이미지 중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뽑아내야 하는데, 그때 그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도 다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고추는 맵고 새우젖은 짜야 하는데 고추가 짜고 새우젖이 매우면 안된다.
시적 표현을 떠나 올바른 문장으로 옮기자면 <수만년 한 자리를 지켜온 산처럼 묵직하고, 뭐든지 받아들이고 어디든지 스며들지만 결국 정화되는 물처럼 맑고, 가지 못하는 데 없이 날아다니는 바람처럼 가벼운 시>라고 하면 이해가 빨라진다. 이러한 문장을 시의 특성을 살려 간결하게, 맛깔스럽게 다시 짧게 빚어야 비로소 좋은 시가 된다.
문장이 정확해야 시심도 깃드는 법이다. 문장에서 오류가 나면 아무리 아름답게 쓰려 해도 이미 시는 저 멀리 흙탕물 속으로 흘러가 버리고, 다시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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