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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한겨레신문 / 번역가의 한국문학에 대한 충격 발언

아래 기사 중 코멘트할 부분을 골라 본다.

나는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여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우리 문학 현실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코멘트할 자격이 있으며, 내 코멘트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확신한다.


원어민 번역가인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 역시 지난해 ‘창비 주간논평’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문학의 수준 미달과 비평 부재의 문단 풍토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놓은 바 있다.

-> 수준 미달은 결국 공부를 안한다는 이야기다. 손끝 감각만으로 진단하는 의사처럼 작가들이 펜 하나 달랑 들고 글만 쓴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실이다. 한국어할 줄 아니까 글을 쓴다는 정도다. 문학 외에 물리학, 화학, 생물학, 경제학, 경영학, 예술학, 의학, 철학 등이 있다는 걸 잘 모른다.


비판에 인색한 한국 문단의 ‘특수성’

-> 좋은 문학 비평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유교 관습에서 자란 우리 작가들은 정당한 비평에도 종종 분노하여, 평론은 곧 싸움으로 번진다. 내 후배 평론가는 글 한 편 발표할 때마다 늘 전투를 치렀다.

SNS에서도 이러한 우리 국민성이 곧잘 나타나는데, 팩트에 의한 사실 비평이어도 욕설댓글이 줄줄이 따라붙는다. 문학과 교양 등에서 아직 충분한 토양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 문학 토양은 거칠고 영양이 없는 마사토다.


한국 문학 작품을 번역해 놓으면 순수와 서정, 섬세함 같은 장점은 모두 사라지고 얼핏 유치하다는 느낌

->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칠 때 지나치게 감성 위주로 가르친다. 문법이며 문장은 중시하지 않는다. 게다가 글의 과학성을 따지는 일은 거의 없다. 문장 구성이 안되고, 궤변이 난무한다. 특히 시를 보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표현이나 상징, 비유가 너무 많다. 한의사가 400년 전 동의보감을 근거로 운운하는 것 비슷하다.


한국 문학은 지성적 측면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 젊은 작가들은 사랑이란 주제에 지나치게 매달린다. 이런 걸 순수소설이라고 포장한다. 한 마디로 세계문학 수준에서 보자면 한국문학 작품에는 유치한 주제가 너무 많다. 말하자면 공부할 필요가 없는, 아무나 쓸 수 있는 소재를 잘 고른다. 공부를 해야만 창작이 가능한 주제에는 잘 접근하지 않는다.

내가 공부하던 70년대, 80년대에는 창녀가 주요 소재로 유행한 적이 있고, 그 다음에는 시위 등의 대학문화가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시야가 매우 좁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작가와 독자들은 무턱대고 노벨상만 꿈꿀 게 아니라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한다.

-> 공부 안하는 건 사실이다. 국어사전조차 잘 펼치지 않는다.

막걸리 마시고, 담배 패우고, 떼로 몰려 다니는 사람은 많아도 공부하는 작가, 시인을 많이 보지 못했다. 또 공부를 해도 문학만 공부하지 다른 학문은 잘 공부하지 않는다. 관심사가 한정돼 있고, 시각의 각도가 너무 좁고 근시안적이다. 동서양 고전, 과학, 음악, 미술, 철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 세계문학전집만 읽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작 뉴턴, 알버트 아인쉬타인, 스티븐 호킹을 알아야 하고, 워렌 버핏 등 금융투자자를 알아야 하고, 정치와 역사, 문화와 예술 세계, 화가, 작곡가, 연주가 등을 깊이 알아야 한다.


영어권 출판사는 주로 장편소설에 관심을 지닌다. 반면 한국 소설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장편은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원고료 받기 쉽고 패거리 짓기 쉬운 문학잡지 투고용 단편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봐야 어차피 생활이 안되는데 작가 시인이 되기로 작정했으면 죽기살기로 장편에 도전하기를 권장한다.

문예창작과 대학원 시절, 장편을 내면 논문 통과된 것으로 해주는데도 끝내 쓰지 못하는 작가가 대부분이었다. 6년을 배우고도 장편 하나 써내지 못하는 작가가 언제 어디서 장편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교수들조차 시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근본 불명의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시장이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한다. 이들은 창작 지도를 하기 위해, 학점을 매기기 위해 짧은 단편을 선호하기도 한다. 장편은 읽을 시간도 없고, 대개 읽을 가치도 없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또 읽어도 문학출판사나 문학잡지 편집장 같은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해 현실과 동떨어진 지도를 해서 문학의 싹을 문대기 십상이다.

또한 단편은 매체가 부족하던 일제시대에 유행한 형식이고, 세계문학은 주로 장편이다. 장편 플롯 체계는 단편과 많이 다르다. 단편이 사진 한 컷 이미지라면, 장편은 동영상 같은 것이다. 이미지만으로는 안되고 정교한 플롯을 짤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엄청난 학습량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사에서 전문번역가들이 원하는 품질의 문학은 한국 독서시장에서 안먹힌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독자들은 감각적인 문장, 섬세한 묘사, 오감을 휘젓는 감수성을 원한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짜증을 낸다. 진실을 알기보다는 단 한 줄의 광고카피를 더 좋아한다. 날씨가 자주 변하는 데서 오래 살아온 우리 민족성 탓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문법이나 문장을 놓고 따지면 귀찮아하고,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억지가 버젓이 먹히는 수준이 우리 독자들 평균수준이다. 수준 이하의 어휘, 수준 이하의 문법이 쓰레기처럼 널려 있어도 독자들은 그런 글에서도 감각적인 꿀만 찾아 먹는 것같다.

글을 물에 담갔다 꺼내도 남는 줄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문학 중에는 물에 담갔다가 꺼내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작품이 너무 많다. 발표한 지 5년만 돼도 깡그리 잊혀지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럼 나는?

나 역시 잘못된 문학을 배웠다. 다만 역사소설을 주로 써오다보니 고전, 철학, 역사, 정치, 전쟁 분야를 억지로 공부하고, 한편으로 바이오코드를 발명하면서 천문학, 생물학, 두뇌생리학, 한의학, 심리학 등을 익혔다. 또 사전을 10권 만들다 보니 나는 연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일부터 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30년 뒤에도 내 작품이 읽힐 수 있을까 상상할 때마다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서 우리말을 다듬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내가 이제와서 세계인의 시각에 맞춰 작품을 쓰기에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 특히 생물학, 생명과학, 진화생물학, 유전학 등을 공부하고 나니 남녀 사랑 따위에는 일절 관심이 사라져 독자들이 원하는 문장을 구사할 수가 없다. 돌이켜보니 지난 5년 사이 발표한 작품에 남녀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작가로서 갱년기를 지난 것이다.

젊을 때는 15시간 연속 일해도 두뇌와 몸이 버텨주었는데 요즘은 8시간 이상 일한다는 게 힘들어 견디기 어렵다. 8시간 작업도 몰입하니까 가능한 거지 몸에는 무리가 간다. 영양제를 챙겨 먹고 면역력을 수시로 체크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같다.

좋은 후배들이 나와 세계적인 수준의 작품을 쓸 수 있도록 나는 우리말 다듬는 일에 더 열중하려고 한다.

문학을 하겠다고 결심한 젊은이가 있다면, 무조건 공부해야 한다.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야만 한다. 자기 책으로 10만권 이상 독자를 불러모으지 못한 문학교수나 작가의 이야기는 듣지 말기를 권한다. 독자와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국독자를 설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계독자를 설득하겠는가. 관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실력을 충분히 갖출 때까지 우리말과 문법 공부에 충실하고, 세계적인 시선을 가질 때까지 한없이 공부할 것을 권한다.


조카가, 내가 다닌 문예창작과에 입학할 때 그토록 조심시켰지만 아직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조카 나이 30은 살 떨리는 나이다. 30은 자기 색깔을 드러낼 나이고, 그동안 무엇을 공부했는지 말할 수 있는 나이여야 한다. 교수한테 속지 말고, 동창에게 속지 말라고 간곡하게 일렀는데 이 조카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동창 중 단 1명만이 작가가 되고 나머지는 다른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휩쓸려 놀다가 잊었을 것이다.


한겨레신문 / 번역가의 한국문학 ‘충격 발언’


“지난 35년간 제가 읽은 한국 소설 중에는 퓰리처 상이나 부커 상 후보에 오를 만한 책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시도 마찬가지로, 위트브레드 문학상 후보에 오를 만한 집 

또한 많았다고 할 수 없지요.”

대표적인 한국문학 번역가의 한 사람인 케빈 오록 경희대 명예교수의 ‘충격 발언’이

다. 9일 오후 한국문학번역원(번역원) 주최로 열린 제2회 세계 번역가대회 이틀째

회의에서 나온 말이다. 그의 발언에서 언급된 퓰리처 상이나 부커 상, 위트브레드 문

학상은 미국과 영국에서 시상하고 있는 문학상들이다. 한국 문학을 사랑하고 존중

하는 이들에게 대뜸 구정물 한 바가지를 끼얹는 것 같은 발언임에 틀림이 없다. 그

중 혈기방장한 이라면 대뜸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따지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발표를 몇 시간 앞두고 나온 오록 교수의 발언에 감정적으로만

대응할 일은 아니다. 그의 말은 한국 문학에 대한 악감정이나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평생을 한국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고대와 현대의 한국

시와 소설을 열정적으로 번역해 온 전문 번역가이기도 하다.


오록 교수와 마찬가지로 한국 문학, 그중에서도 시를 전문적으로 번역해 온 원어민

번역가인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 역시 지난해 ‘창비 주간논평’에 기고한 글에서 한

국 문학의 수준 미달과 비평 부재의 문단 풍토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놓은 바 있다.

오록 교수가 9일 발제에서 비판에 인색한 한국 문단의 ‘특수성’을 꼬집은 것 역시 지

난해 안 교수의 글을 떠오르게 한다.


한국 문학에 대한 고언은 번역가대회에 참가한 다른 번역가들한테서도 들을 수 있

었다. 7일 낮 문학 담당 기자들과 함께한 간담회에서 포르투갈어 번역가인 임윤정씨

역시 한국 문학을 향한 쓴소리를 토해 놓았다. “한국 문학은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며

섬세하다. 반면 중남미 문학은 지성적이고 냉철하다. 한국 문학 작품을 번역해 놓으

면 순수와 서정, 섬세함 같은 장점은 모두 사라지고 얼핏 유치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 문학은 지성적 측면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부인인 고혜선

단국대 교수와 함께 한국 문학을 스페인어로 번역해 온 프란시스코 카란사 페루 우

나삼 대학 객원교수의 판단도 비슷했다. “중남미 독자들은 수준 높은 작가를 원한다.

한국의 작가와 독자들은 무턱대고 노벨상만 꿈꿀 게 아니라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영어권 번역자인 브루스 풀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교수는 한국 소설

의 또다른 문제점을 지적했다. “영어권 출판사는 주로 장편소설에 관심을 지닌다. 반

면 한국 소설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두세 명의 작가에 집중해서 장편소설을 번역해야 한다.”


번역가대회의 날짜가 이즈음으로 잡힌 데는 당연히 주최 쪽의 의도가 작용했을 것

이다. 노벨문학상 발표에 편승해서라도 한국 문학의 좌표와 위상에 대한 사회적 관

심을 환기시키려는 것일 테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향한 하나

의 계기가 될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윤지관 번역원장의 말이다. 한국 작가의 수상 여부와 무관하게 한글날에 발

표된 노벨문학상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 다양한 색을 나타내는 스펙트럼. 우리 문학시장은 이 중의 단 한 줄에 매달려 있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