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국중립내각>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거국이야 '온 나라가 한 데 뭉쳐 들고 일어나는 것'이니 따질 게 없고, 중립도 '신천지든 더불어든 국민의당이든 따지지 말고 오직 국민 편에서'라는 의미이므로 역시 따질 게 없다. 남은 건 '내각'이란 어휘다.
<내각>이란 정조 이산이 1776년에 설치한 규장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원래 閣은 殿에 비하면 급이 매우 떨어지는 건물이다. 왕과 왕비가 사는 건물은 殿이지만 신하들이 쓰는 건물은 閣이다. 절에서도 전은 부처와 보살만 모실 수 있는 건물이고, 각은 산신, 칠성신 등을 모시는 건물이다.
- 창경궁 비원에 있는 원래 규장각. 지금은 기능을 잃고 내용물은 서울대 부속건물로 이전하고, 여긴 빈 건물로 있다. 규장각을 세운 정조 이산은 이 건물을 내각이라고 불렀는데, 일종의 국왕 전속 도서관인 셈이었다.
조선 말기 고종은 폼으로나마 조선이란 국명을 바꿔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는데 이때 의정부를 내각으로 부르도록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각으로 불러오던 규장각은 빼고, 각부 대신들의 협의체라는 뜻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다만 이 내각이 회의를 하는 건물은 수정전(修政殿)이라고 하여 황제를 자칭하는 고종 이재황이 참석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런데 이 어휘를 오늘날에도 쓴다는 건 말이 안된다. 내각은 신하들의 회의체인데, 오늘날의 국무회의하고도 다르다. 국무회의를 대통령이 주재하면 이건 어전회의가 되는 것이고, 국무총리가 주재하면 내각이 되는데, 의미를 잘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다.
대통령을 제왕적 수준까지 높여 놓은 현행 헌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내각회의는 왕조시대의 내각처럼 아무런 힘이 없다. 자기들이 별스런 결정을 하든말든 대통령 말 한 마디에 다 뒤집어진다. 왕조시대에 왕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게 수포가 돼버리던 것과 똑같다.
일본처럼 의원내각제를 실시하는 경우에는 내각이 진짜 힘을 갖고 있다. 총리가 주재하는 내각이 스스로 결정하여 국사를 이끌어간다. 일왕도, 국회도 어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권력은 총리가 청와대 행정관이나 비서관만도 못한 푸대접을 받는 헌법 아래에 놓여 있다. 그야말로 '얼굴 마담'이고, '대독(대통령 대신 연설문 읽어주는)총리'에 불과하다. 즉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이렇게 권한이 없는 사람이 중립내각이 아니라 야당 내각을 이끌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헌법 제86조 2항 /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종이란 뜻이다. 국무총리는 스스로 생각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되고 오직 <대통령을 보좌>하는 보좌관에 지나지 않으며, 반드시 <대통령의 명을 받아> 일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시대 도승지쯤 되는 자리다.
따라서 여러 말할 것 없이 <거국중립내각>이 아니라 <거국중립정부>여야 한다. 아무 권한이 없는 총리, 장관을 비벼 놓은들 지금까지 총리와 장관들이 해온 것처럼 종노릇, 내시노릇이나 할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권한이 너무 막강해서 총리, 장관쯤은 하루 아침에 갈아치울 수 있다. 우리나라 총리실과 장관실은 매일 청와대 비서관, 행정관 따위에게 전화걸어 이거 해도 되느냐, 저거 해도 되느냐 품의나 받는 곳이다.
따라서 뜻대로, 법대로 가자면 <거국중립정부>로 가야 한다. 정부란 입법부와 사법부가 아닌 일반 행정을 맡아보는 국가기관이다. 당연히 대통령 권한이 포함된다.
어차피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라, 앞으로 헌법이 정한 대통령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권한을 종이나 다름없는 총리에게 줄 수도 없고, 역시 존재감 없이 종질에 열중해온 장관들에게 줄 수도 없고, 내시급의 청와대 비서들에게 줄 수도 없다. 이런 때에는 여야가 합의하는 <거국중립정부>를 구성하여 대통령 권한을 대폭 이양하고, 박근혜 자신은 남은 임기 동안 외교와 안보만(국민이 허락해주면)맡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자신이 <거국중립정부>를 세운다는 확고한 의지와 의견 표명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 거국이란 어휘에 중립이란 의미가 들어 있지만 운율을 맞추기 위해 그냥 둠. 따지지 말 것.
- 대통령 상징 문양. 봉황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너무 똑같아서 어느 놈이 봉이고 어느 놈이 황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일단 수컷 봉 한 마리라도 떼내어 <거국중립내각>에 주고, 대통령은 얼마 안남은 임기 동안 황 한 마리만 쥐고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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