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나는 해방 이후, 그러고도 육이오전쟁이 끝난 1958년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사전을 그대로 베낀 국어사전으로 공부하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한자어 중 50% 이상이 일본어였다는 사실을, 1994년부터 시작한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시리즈>를 편찬하면서 뒤늦게 알았다.
이후 나는 내가 아는 어휘가 아니면 절대로 의심스런 한자어나 일본어 문법, 영어 문법, 어려운 한자어를 쓰지 않는다. 이때, 내가 쓰는 어휘가 우리말이 아닌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크게 당황한 나머지 잠시 글을 쓰지 못한 적도 있다. 지금은 우리말 사전을 미분하여 하나하나 제대로 된 말만 골라내고 있다. 나중에는 일본어를 모조리 추방하고, 한자어에 치여 쓰이지 않던 순우리말을 되살려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학작품을 쓰는 소설가가 나오기 바란다. 우리 세대는... 틀렸다.
- 초기 <우리말 사전>은 대개 일본국어사전을 한글발음으로 번역한 것뿐이다. 조선총독부 발간 <조선어사전>이 그랬고, 이희승(1896.6.9 0830)의 1961년 <국어대사전>조차 일본의 新村出이 엮은 일본어 사전 <고지엔(廣辭苑)>이라는 일본어 백과사전을 베껴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광수는 1941년 10월, <우리들의 천황이 사용하시는 말을 우리 국어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글을 <新時代>라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이후 친일 소설가인 김동인과 함께 일본식 어법을 대량으로 들여왔다. 대표적인 게 '그녀'다. 내 작품에는 그녀란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 따라서 글의 기초 재료인 우리말이 일본어에 크게 오염되어 있음에도 문체니 문장이니 하면서 감각적인 글쓰기에 애쓰는 일 따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어떤 작품이라도 미분하여 한자와 일본어에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가려줄 수 있다.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희승 씨가 베껴 우리말사전으로 만든 원본 <고지엔広辞苑>을 미분하는 작업도 할 것이다. 그래서 거기 남아 있는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도 찾아낼 것이다. 언제가 될지, 내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니면 내 딸이 하거나 다른 후배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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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대학 4년간 정말 열심히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데 주력했다. 물론 그런 중에도 장편소설을 몇 권 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습작이었고, 그중 <아드반(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별을 사랑해야 한다)> 한 권만 출간했다. 나머지는 다 연습이었다. 그런 연습이야 고등학교 때도 이미 했다. 고등학교 4년간(사연이 있어 꼬박 4년 다녔다) 숱한 시를 써서 시집 두 권 분량을 쓰고, 장편소설을 두 편 써냈다. 물론 품질미달로 다 버렸지만, 내게는 장편 정도는 몇 달 안에 써낼 수 있는 힘이 그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공부를 어느 정도 하고나니 글쓰기가 갑자기 어려워지는 걸 느꼈다. 나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권유로 동양고전을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러면서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따위를 샅샅이 읽었는데 그때는 이야기에 빨려들어가 <글>에 대해 그리 큰 신경을 쓰지 못했다.
시를 알지 않으면 소설도 제대로 쓰기가 어렵다는 내 판단에 따라 대학원에서는 주로 시론을 공부했는데, 그런 다음 군에 다녀와 남의 글을 써주는 회사에서 3년간 일했다. 이때 나는 재벌회장들의 사고 방식, 글을 대하는 자세 등을 엿볼 수 있었다. 요즘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이 나왔다고 들었는데, 재벌회장들의 글을 쓰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맞춤글이 뭔지,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글을 쓴다는 게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시적 감성이 필요하다는 걸 인식하고 대학원에서 시론을 공부한 사람인만큼 작가는 거의 모든 문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그들의 요구에 맞추면서도 팩트를 비껴나가지 않는 글을 쓰는 연습을 했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 편집장을 지낸 김형윤 씨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그런만큼 '글의 정확성'에 대해 몸서리칠만큼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다. 대학 때 김동리 선생께서 징그럽도록 문장을 파헤치면서 따지던 것 이상으로 김형윤 씨는 정확한 문장을 써야 한다는 강박증을 내게 충분히 심어주었다. 심지어 출근 시각 9시 이전인 7시 30분까지 먼저 출근하여 내가 쓴 글을 토론하는 시간까지 가졌다. 내가 만일 김동리 선생으로부터 일찍이 그런 훈련을 받지 못했다면 그 시간이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미 내 글이 해부당하는 숱한 경험을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도리어 김형윤 씨의 지적 하나하나가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김동리 선생은 소설을 쓰는데 필요한 문장을 가르쳤다면 김형윤 씨는 사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렇게 나는 두 번에 걸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결정적으로 내 글의 요소인 어휘에 관해서는 1994년부터 시작한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시리즈> 편찬 과정에서 우리말이 한자에만 오염된 게 아니라, 그보다는 일본어에 크게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놀랐다. 한자어 정도는 걱정할 필요도 없을만큼 우리 문학, 인문서적, 번역소설 등 대부분의 출판물이 일본어를 갖다가 단지 우리 발음으로 적은것일 뿐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말의 70%가 한자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게 사실은 한자어가 아니라 일본어가 그렇게 많다는 뜻이다. 일본어에 70% 이상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작가로서 어찌 등골이 오싹하지 않겠는가.
나는 글 쓰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 문학의 미래에 빛이 비쳐들기는 어렵다고 본다. 아니면, 일본어를 발음만 우리말로 바꿔 쓴 작품을 기가 막히게 뛰어난 외국인 작가가 거의 창작 수준에 가깝게 번역을 해준다면 더러 상을 받는 일도 있으리라고 본다.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이것이 내가 오래도록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시리즈> 등 우리말 사전류를 미분(잘게 나누어 따지는)해 온 이유이다.
언제고 내가 미분하는 우리말들이 다 모아지면 그제야 <우리말 사전>이 완성될 것으로 믿는다. 나 혼자 할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해야만 할 일이다.
- 나는 지금까지 5권을 출간하고, 5권을 편집 완료했다. 아마 20권쯤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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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소개글> 나는 1992년 수백만 부가 팔린 소설을 내놓고 잠시집필을 멈춘 적이 있다. 내가 쓰는 우리말이 실은 70% 정도가 일본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학자들이 우리말로 논문을 쓰면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또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우리 민법, 형법 등 모든 법전이 실은 일본어 법전을 우리 발음으로 옮긴 뒤 토씨만 갖다 붙인 책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일본어에 이처럼 크게 오염된 우리말로 글을 써야 하나 하는 패닉에 빠졌던 것이다. 게다가 이광수, 김동인 같은 친일소설가들이 문법과 문체, 기본 어휘에서 일본어를 그대로 베껴 쓴 게 많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예를 들면 나는 절대로 쓰지 않는 '그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가인 내가 굳이 20년이 넘게 우리말을 쪼개고 나누어 먼지를 털고 때를 닦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5번째 작업으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을 내자 왜 소설가가 사전을 만드느냐는 질문이 또 들어오길래 오늘 그 이유를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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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섞어쓰자는 사람이나 한글만 쓰자는 사람이나...>
<박근혜 대통령 기사에 朴槿惠라고 표기하지 않아 "우리나라 망했다."는 조갑제 씨께>
<초등한자교육 주장하는 친일학자들, 조선총독부 사전 내다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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