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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나도 모르게 '엄마'라고 말하다


몇 해 전 여름, 어머니는 손자손녀들이 뛰어노는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계셨다.

그러는 걸 내가 뒤에서 찍은 게 이 사진이다.

아버지 떠난 지 10년이 넘은 그즈음 어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저 바다를 바라보실까 궁금했다.

또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고 보니, 하늘에 계신 어머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며 이승을 바라보실까 궁금하다, 


어머니가 저 먼 서쪽하늘로 가시고 나니, 그렇게 며칠 지나고 나니 현관문 열고 깜깜한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엄마"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더이상 엄마라고 불러서는 안된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에 따라 이 날 이때까지 어머니로만 불러왔는데, 둘이만 있을 때도 어머니라고 했는데, 느닷없이 내 입에서 "엄마'란 철부지적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엄마라는 단어에 내가 놀라 눈물이 핑 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당숙네로 가서 학교를 다녔는데, 처음으로 어머니 품을 떠난 탓에 밤마다 어머니가 그리워 미칠 듯이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3월이 가기 전 달 밝은 밤에 그만 당숙 집에서 몰래나와 무작정 고향집으로 걸어갔다. 아마도 서너 시간 걸렸을 것이다. 

한밤중이 돼서야 집이 바라다보이는 다리에 섰는데, 거기서부터 "엄마! 엄마!" 소리치며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걸어간 집에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네째숙부의 부인 즉 내 숙모가 될 분을 선보러 서울에 가신 것이다.

그래도 둘째형, 네째동생, 막내동생이 집에 있었다. 피붙이라도 보니 살 것같았다. 나는 더이상 당숙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죽어도 집에서 걸어다니겠다고 다짐했다.


둘째형은 그러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걸어서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4월 하순이 되면서 도저히 학교에 다닐 수 없을만큼 지치고 지쳐 귀신을 보기 시작하고, 심지어 오줌도 쌌다. 밤길을 걸어올 때는 소리와 색깔이 같이 들리고 보이는 공감각 현상이 일어났다. 귀신이 자주 나타나 오라는대로 따라가기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두말없이 청양장 날에 읍내로 나가더니 먼저 있던 큰집둘째 당숙네 말고 읍내에 나와 살고 있던 큰집 큰당숙을 찾아가 사정을 했다. 애가 헛것을 보고 몸이 쇠약해져 도저히 안되겠으니 맡아달라고 사정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는 하는 수없이 큰당숙에게 고개 숙이고 들어갔다. 덕분에 나는 건강을 되찾고 공부도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큰당숙의 큰아들, 그러니까 내게 육촌형이 되는 재원형은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물리화학교사였는데, 제법 공부를 하는 내게 큰 정성을 쏟았다.


그뒤부터 나는 다시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했다.

중학교를 마친 뒤에는 어머니가 공주 이모에게 나를 맡기는 바람에 나는 고등학교 3년간 또 집을 떠나 있었는데, 그때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뛰어오는 법이 없었다. 친구들하고 노는 게 더 재미있고, 책 읽고 쓰는 게 너무나 재미있어 웬만하면 이모네에 붙어 있었다.


나는 1958년에 태어나 1965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13살이 된 1970년까지만 '엄마'하고 살았다. 1971년에 어머니를 떠나 지금까지 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쩌다 시골에 갔다가 저녁 나절에 올라올 채비를 하면 어머니는 마구 심술을 부렸다. 사설을 어찌나 길게 늘어놓는지 그 사설을 다 듣느라 예정 시간보다 두세 시간 정도 더 머물러야만 했다. 마치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늙은 어머니는 자식들을 그리워한 것이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지 정없이 그냥 올라간다고 늘 불같이 화를 내셨다. 

어머니 생신같은 특별한 날에 5형제가 다 모여도 저녁나절이면 어머니는 슬슬 심술을 부렸다. 다 떠나면 적막강산에 앉아 혼자 염불이나 해야겠다느니, 이러다 죽으면 구더기 생기겠지, 이런 식으로 우리 가슴을 콕콕 찌르셨다.

집만 해도 그렇다. 이웃집에 누가 집을 새로 지었는데 그뒤로는, 자다가 족제비(덫) 치어 죽을지도 모른다(집이 무너진다는), 도시 화장실만도 못한 데서 산다는 둥 불만이 많으셨다. 현대식으로 개량한 집에 게르마늄 돌을 깔고, 에어컨까지 놔줘도 그러셨다. 하는 수없이 집사람 몰래 어머니께 새 집을 지어드리니 그제야 활짝 웃으셨다.


자존심이 너무 세서 며느리 신세 안지겠다며 죽을 때까지 집에서 혼자 살겠다고 하셨는데, 마지막에는 어쩌는 수없이 막내며느리 신세를 졌다. 평생 딸 없는 걸 후회하지 않으셨는데 몸져 누우신 뒤로는 서운하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막내며느리가 큰 마음 내어 딸마냥 정성껏 돌봐준 덕분에 어머니는 병원이든 요양원이든 큰소리치며 지내셨다.


내가 하늘로 먼저 보낸 개가 열 마리가 넘는데, 이 녀석들이 어디 떠돌지 말고 어머니께 의지했으면 좋겠다. 전에는 아버지께 아이들 좀 잘 봐달라고 틈만 나면 기도했는데, 이젠 어머니 아버지가 다 하늘 계시니 우리 아이들도 알아서 잘 거둬주시리라고 믿는다. 우리 개들을 아끼던 사촌동생이 죽은 뒤로는 이 아이들이 꿈에 나타나지 않는 걸로 보아 아마도 이 동생이 챙겨주는 게 아닌가 싶다. 숙부 숙모 고모 당숙모까지 다 가셨으니 아마도 이승보다 더 재미나게들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엄마란 단어가 입에 그리 익숙하지 않아 쑥스럽지만 그래도 엄마를 불러보니 50년 전 그 아득한 옛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승과 저승에 우리 두 집 살림 차려놓고, 저승에서는 우리 개들과 부모님과 숙부숙모당숙당숙모사촌육촌, 그렇게 어울려 사시고, 이승에서 나는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유기장애견 별군이와 다루기 정말 힘든 우리 딸하고 원수인지 동지인지 헷갈리는 아내와 더불어 한숨 쉬며 더러 웃으며 그렇게 살아갈란다. 


- 어머니 쉼터이던 정자. 앞에 보이는 은행나무는 아버지가 심은 것이고, 그 너머 텃밭은 어머니가 소일 삼아 채소를 심어 기르던 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