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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사람들/황금탑

아라한과 보살은 어떻게 다른가?

아라한(산스크리트어 Arahan)은 소승(小乘) 수행자들, 즉 성문승(聲聞乘) 가운데 최고의 이상상(理想像)을 말한다. ‘arahan’이란 말에서 ‘아(a)’는 없다는 부정사이고, ‘라한(rahan)’은 탐심이란 말이다. 따라서 아라한은 탐심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보살(菩薩,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은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로서, 보디 (Bodhi)와 사트바(sattva)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보디(Bodhi)는 보리(菩提) 즉 깨달음을 의미하며, 사트바(sattva-살타)는 유정(有情, 생명체)이란 뜻이다. 붓다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이란 뜻이다. 보살은 대승의 최고 인격형을 가리킨 말이지만 아직깨닫지 못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다만 보살로서 깨달음까지 이루어 붓다가 될 경지에 거의 이른 분은 보살마하살로서 구분한다.


소승과 대승을 가르는 수많은 지표가 있고, 분분한 논란이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두 유파가 내세우는 이상이 달랐다는 점이다. 

아라한의 길은 자신의 깨달음을 먼저 성취한 다음 그를 통해 얻어진 지혜로써 뒤에 중생을 교화하는 길이요, 보살의 길은 중생을 위한 자비행을 먼저 한 다음 그를 통해 얻어진 공덕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뒤에 추구하는 길이다. 따라서 아라한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탐ㆍ진ㆍ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의식세계를 갖춘 분이다. 보통 해탈이라 하면 인간을 괴롭히는 원인인 번뇌를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번뇌가 없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삿된 견해(유신견, 상견, 단견)인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의미한다. 


경전과 아비담마에 의하면, 아라한은 10가지 족쇄를 완전히 제거한 완벽한 성자이다. 10가지 족쇄란 유신견(有身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의심, 감각적 욕망, 악의, 존재에 대한 갈애, 질투, 인색, 이기심, 무명이다. 이러한 소승의 최고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라한이다. 그래서 아라한(阿羅漢)의 원뜻은 불교에서 완전해진 사람, 위대한 사람이다.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다.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 소승불교(부파불교)에 있어서 수행목표는 아라한을 이상으로 했다. 그러므로 여기엔 범부가 성불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라한은 본래 붓다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후에 불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계위로 바뀌었다. 


흔히 통속적으로 인격에 따라 범부ㆍ현인(賢人)ㆍ성인(聖人)으로 구분하지만, 소승불교에서는 성인을 예류(預流-수다원)ㆍ일래(一來-사다함)ㆍ불환(不還-아나함)ㆍ아라한(阿羅漢)의 사위(四位)로 나누어 아라한을 최고자리에 놓았다. 즉, 아라한은 성인(聖人) 4과 중 맨 위 단계이다. 자신의 오온(五蘊)을 있는 그대로 통찰해, 이 오온에 내가 없고, 나의 자아도 없고, 나의 것도 아니라는 통찰지혜가 생겨 몸과 마음에 대한 탐ㆍ진ㆍ치가 소멸돼 집착이 끊어진 의식세계인 열반에 들었다가 나오는 것을 성인의 깨달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열반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정신세계가 수다원(須陀洹, 예류과 : 성인의 흐름에 든 분)이 된다. 수행자가 마음의 번뇌를 씻어나간다고 할 때 그 이룬 정도에 따라 구분하는데, 우주의 근원인 공(空)을 체험하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고, 이때를 수다원이라고 하며, 불교의 성자 그룹에 들어가는 첫 단계로서 "입류(入流, 預流)"라고도 한다. 


이후 성실한 수행의 여정을 거면서 차츰 번뇌의 때를 제거해갈수록 사다함 아나함… 등 그 법위가 올라간다. 이와 같이 성인의 1단계라고 할 수 있는 수다원을 거쳐 다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더 깊은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면 사다함(斯陀含, 일래과)이 되고, 다시 오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 더 깊은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해 아나함(阿那含, 불환과)의 도과를 거쳐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도과에 들면, 그에게는 어떤 미세한 탐ㆍ진ㆍ치도 남아 있지 않는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과(果)는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이라고도 하며, 그 이전의 계위는 아직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단계이므로 유학(有學)이라 불린다. 아라한이란 제루이진(諸漏已盡), 즉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한 존재란 말이다. 


그리하여 초기경전에서 깨달았다는 점에서 아라한은 붓다와 동등하다고 했다. 단지 다른 점은, 붓다는 업을 완전히 소진시켜 윤회에서 벗어난 분이고, 아라한은 그 업이 아직 남아 있는 분이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n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 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묘사됐다.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마하살과 같은 경지인데, 대승이 의도적으로 상을 지어 아라한을 마치 개인적인 수행자인 것처럼 깎아내려 놓은 것일 뿐이다.


이러한 아라한은 자신만의 개성이 있을 수 없다. 이 아라한이나 저 아라한이나 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같은 느낌을 가지며, 같은 상황에서 같은 행동방식을 보인다. 그것은 모든 아라한들이 공히 일체의 조작을 벗어난 여여(如如, thatata)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붓다 역시 연등불이든 고타마 붓다든 같은 진리를 말씀하는 것과 같다.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은 보살이다. 보살은 6바라밀을 수행해 나가면서 한편으로 방편력과 지혜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사람이다. 

위로는 붓다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상구보리(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하화중생(下化衆生)] 역할을 하는 일종의 중간자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는 무수한 보살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라한과에 이르지 못한, 즉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보살이 중생을 붓다처럼 교화할 수는 없다. 모순이다. 상구보리가 안된 상태에서 하화중생을 한다는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을 돕는다는 게 사실은 상대를 해칠 수도 있다. <참새를 잡았을 뿐인데 4천만 명이 굶어 죽다>


중생은 업력(業力)으로 먹고 살고, 보살은 원력(願力)으로 먹고 산다는 그럴 듯한 말이 있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대중부(大衆部)에서 발전했다. 그런만큼 교리 해석에서도 유연하고, 또 계율의 해석도 상황에 따라 융통성이 있으며, 일반 신도들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개혁적 ‘젊은이들’이었다. 말하자면 붓다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고 임의로 실천하는 측면도 있다.

그 반대편에는 교리와 계율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보수적 어르신들, 즉 장로(長老)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불교를 테라바다(Theravada, 上座部)라 했다. 이것이 오늘날 남방불교의 근원이다. 


그리고 대승의 발전에는 외부의 사정도 있었다. 원래 엄격했던 교단은 아소카왕의 후원으로 풍부한 지원을 받고, 정착지에서 주거와 음식을 제공받았다. 그런데 그 이후 후원이 끊기자, 교단은 재가신도들과의 긴밀한 유대와 협력을 필요로 하게 됐다. 그래서 사부대중을 함께 엮는 대중의 불교, 즉 대승이 태동했다. 대승은 이와 더불어 교리체계를 새로 재편했다. 그 중심에 보살을 놓았다. 


대승불교가 보살을 강조함으로써 이전의 소승적 수행자들을 가리켜 편협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비판받았다. 이는 마치 붓다가 이끌던 교단을 비판한 셈이나 다름없다.

“어찌 너만 해탈하겠다고 나서느냐.” 하며, 그들은, ①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붓다의 제자들을 성문(聲聞), 즉 “붓다의 목소리를 다만 듣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했고, ② 한편 ‘무소처럼’ 홀로 깨달음을 즐길 뿐, 그 깨달음을 나누어주지는 않으려는 사람 들을 연각(緣覺), 혹은 벽지불이라 해서 배척했다. 심지어 이들을 일러 이승(二乘), 즉 ‘두 개의 작은 수레에 탄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③ 이에 비해, 대승은 자신들의 새로운 길을 보살승(菩薩乘), 즉 ‘영웅들의 수레’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신을 비우고, 남과 더불어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진정 위대한 사람들로 불리기를 바랐다. 최고의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역설적 마음가짐을 가질 때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수보리에게, “보살은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가질 때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승불교 승려 중에는 보살경지에 이른 사람이 없으며, 단지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만으로 멋대로 불법을 해석하고 교리를 뒤바꾸고 계율을 고쳐버리기도 했다.


붓다가 수보리에게, “보살은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보살은 보살마하살이지 절에서 여성이면 누구에게나 붙이는 그런 보살이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보살마하살-붓다 이렇게 단계를 나누었다. 

대보살이란 보살 중의 으뜸이다. 보살행으로 방편력과 지혜가 광대해지면 자연스레 대보살(보살 마하살)이 된다. 이렇게 보살에도 차이가 있다. 보살마하살은 불교에서 역사상의 붓다인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전의 상태, 또는 현세나 내세에서 붓다가 되도록 확정돼 있는 다른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보살마하살이라는 말은 본래는 석가모니 붓다에게만 국한돼 쓰였다. 그러던 것이 이타(利他)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에서는 누구든지 진리를 향해 굳은 발심을 하고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을 실천하면 다 보살이라 부르게 됐다. 즉 ‘석가보살’에서 ‘범부보살’로 보살의 의미가 확대적용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 보살마하살과 보살을 동일시한 실수가 있었다.


보살마하살이 아닌 그냥 보살은 수행자 겸 중생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다 지닌다. 그래서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의 모든 생명을 제도하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이념에 산다. 이러한 보살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보살에 대한 관점을 논의하는 것을 보살론(菩薩論)이라 한다. 즉, 붓다가 되기를 목적으로 수행하는 보살이 닦는 행을 보살행(菩薩行), 보살이 해야 할 법칙과 양식을 보살법식(菩薩法式), 붓다에 이르게 하기 위한 가르침을 보살승(菩薩乘), 그리고 그 가르침의 경전을 보살장(菩薩藏)이라 한다. 따라서 대승경전을 통틀어 보살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보살행, 보살법식, 보살승, 보살장에 관한 논의를 통틀어 보살론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며, 누구나 보살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기만 하면 10지(十地)라고 하는 보살로서의 정신적 수행단계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고 있으므로 누구나 서원을 세워 보살행을 할 수 있다. 그 자리를 놓고 보면 아라한 ‧ 보살마하살 ‧ 부처는 같은 것이다.  


붓다의 열반 뒤 100여년 경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은 뒷날 소승과 대승을 갈라놓는 계기가 됐다. 소승은 주로 승단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이론과 실천에 엄격하며, 초인적 수행을 권장하고, 붓다의 말씀을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 따라서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담마(법)의 해석에 배타적으로 가능한 절대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이에 비해 대승은 주로 재가불자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엄격한 초인적 수행과 너무 많은 계율, 그것도 주로 “…하면 안 된다”는 내용에 반발했다. 붓다의 말씀을 형식보다는 의미론적으로, 즉 진보적이고 개방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대승은 본래 재가신자와 대중의 권익을 보호하는 입장이었기에 혼자 깨닫는 아라한의 수행에 반발해서 아라한과 대척점에 설 수 있는 보디사트바(보살) 운동을 전개했다. 말하자면 천주교에서 갈라져나온 개신교와 비슷하다. 


대승불교는 붓다의 말씀 중 특히 자비(慈悲)을 내세워 오히려 깨달음을 현세에서 이룸을 포기하고, 대중과 함께 윤회하며 “다 같이 저 언덕으로 건너자”는 기치를 내세웠다. 하지만 뜻은 좋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바른 길로 안내할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늘날 대승불교를 자처하는 한국불교의 많은 승려들이 룸살롱을 드나들고 도박장을 출입하는 것조차 보살행이라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소승불교에서는 저녁 식사만 해도 계율을 어겼다며 엄격한 처벌을 받기도 한다. 대승 승려들은 저녁도 먹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숨겨놓고 고기도 먹지만 교리나 계율에 너무 매이면 안된다고 궤변을 지어낸다.


소승의 입장에서 보면 대승의 주장은 터무니없이 과대 해석되고 불법을 철저히 왜곡한 것이다. 그러나 대승의 입장에서 보면 소승의 주장은 교조주의자나 원리주의자와 같은 고집불통의 권위만 앞세우는 형식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보살은 윤회를 할까 안할까? 어떤 경전에서는 보살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듦으로써 윤회를 벗어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건 보살마하살이다. 그런가 하면 <화엄경> 같은 경전에서는 보살이 범부중생과 더불어 윤회전생을 한다고 돼있다. 

원칙적으로 보살이 하화중생(下化衆生)을 한다는 것은 범부중생과 더불어 윤회전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 따라서 지장보살이 지옥에 드는 것도 윤회를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고, 그래야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 게다가 대승에 나오는 대부분의 보살이나 보살마하살이 실은 힌두교에서 이미지를 가져온 힌두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독한 비판이 있다. 


이런 이유로 초기불교와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보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고타마 싯다르타만 정각(正覺) 을 이루시기 이전엔 보살이셨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이니 보살이니 하는 구분조차 없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아라한만 있다. 붓다와 아라한은 다 성불하신 분이다. 


붓다 생존 시에는 아라한으로서 그 가르침의 결과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아라한만 되면 바라문이 가르치는 교리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깨달은 자라는 의미의 아라한이라 칭했다. 

붓다도 자신을 아라한이라 불렀다. 대승의 교리대로라면 자신을 아라한이라고 부른 붓다가 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셈이다. 이런 궤변은 붓다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붓다의 아들, 즉 불자(佛子)는 과연 누구인가. 

아라한인가 보살인가? 

소승으로 말하면 아라한이고 대승으로 말하면 보살마하살이다. 보살마하살의 개념을 혼동하면 안된다. 대승 수행으로서 아라한과에 이른 분이 보살마하살이기 때문이다. 미륵보살마하살, 지장보살마하살, 관세음보살마하살, 문수보살마하살 등은 그냥 '보살'이 아니라 '보살마하살' 즉 '대보살'이다.

이런 본질을 숨기고 대승에서 말장난으로 아라한보다 보살이 높다는 말을 꾸며낸 것이다.


다만 아라한이 중생을 제도하는 수효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보살마하살은 성불해서 붓다가 되는 전후로 제도되는 중생의 숫자는 무량하다. 보살이란 한도 끝도 없이 많은 무량의 중생을 모두 다 고통에서 건져내주겠다는 각오를 하고 그런 길을 걷는 성인이다. 보살은 이미 깨닫고 나서 더더욱 깊은 깨달음에 도착하는 과정이다. 이 정도 되면 아라한을 거쳐 보살마하살이 된다고 보는 것이 맞지만, 소승에서는 이런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대승의 정의일 뿐이다.


불교의 깨달음이란 외도들과는 달라서, 지혜로 깨닫고 나서 그 지혜를 증장시켜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소승도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단계가 있고, 대승도 역시 초지, 즉 제1지에서 보살 제10지의 단계가 있다. 대승보살이란 이미 깨닫고 나서 더더욱 지혜를 증장시 켜 바라밀을 행하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이 글은  다음블로그 아미산에 실려 있는 <아라한과 보살>을 기본으로 손질한 것이다. 원문에 대승적 관점에 치우친 부분이 많아 직접 손질했다. <원본 보기>


- 미륵보살마하살. 아라한으로서 곧 붓다가 되실 분이다. 원래 보살은 깨우치지 못한 분으로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하는 아라한 이전 사람을 가리키는데, 종종 보살마하살과 혼동한다.


- 관광버스에 태워다 내려놓은 듯한 500아라한. 하지만 붓다 시절 붓다 다음의 깨달음을 이룬 분을 모두 아라한이라고 했다. 오늘날 보살이 아라한보다 높다는 말은 일종의 미신이다. 따라서 보살마하살과 보살을 같은 말로 보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