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유리병을 만들어 거기에 개미를 집어넣어 보면 개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습니다. 매우 희귀한 확률로(개미가 사람으로 변하는 확률이라고나 할까) 깨닫는 다하여도 고작 그 병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앎은 될지언정, 그리고 깨달음의 동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믿음이라 하여 보물처럼 간직합니다. 내가 원죄의 울타리에(유리병) 갇혀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죠.
그는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밖에 있는 다른 존재에게 꺼내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정작 그 밖의 존재도 더 큰 유리병 속에 자기처럼 갇혀 있음을 모른 채 말입니다. 마치 작은 방을 나오면 큰방이 있는 집, 그 집을 둘러싼 숲, 그 숲을 담고 있는 도시, 그 도시를 가지고 있는 나라, 그 나라를 부분으로 하는 지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지구조차도 하나의 원자 만큼이나 작은 것이 되어버리는 우주와 그 우주조차도 다시 또 하나의 작은 분자가 되어 버리는 이 한 없이 반복되는 크기의 질량 앞에서 절대란 없습니다. 하기사, 작은 방에서 나오는 데야 성공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런 굴레에서 스스로 확연히 벗어남을 말합니다. 자기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다름아니라 양파 껍질 같은 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간명한 처리이겠습니까? 만일 그 개미가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마땅히 그 병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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