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20일, 6촌 모임을 하는데, 6촌형제 중 장손으로서 가장 나이가 많던 형은(1935년생) 2014년 9월 3일에 하늘 가시고, 대신하여 형수가 모임에 오셨다.
우리 어머니보다 불과 3살 적다. 어머니는 85세 때 요양원에 계셔서 애를 태웠는데, 형수는 어찌나 건강한지 어디든 따라가신다. 아파트 11층 깊이라는 고수동굴이며 산꼭대기 절 무암사, 죽순봉, 지지 않고 가신다.
어제 저녁에는 새벽 두 시까지 타짜급 동서들하고 화투를 치셨다. 그러고도 아침에 거뜬히 일어나 구경에 빠지지 않으셨다.
단양 고수동굴에 다녀오는데, 벼스 안에서 형수가 말한다.
내가 추임새를 넣어주니 옛날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형수는 아직도 내게 반말을 하지 않으신다. 꼭 도련님이라고 하면서 하오체를 쓰신다. 글은 피차 반말체로 쓴다.)
- 에효, 단양 오니 옛날 생각난다.
형이 처음 교사발령 받은 곳이 단양이야. 시아버지(나도 함께 산 당숙)랑 둘이 아침에 떠나 저녁 어스름녘에 단양역에 내렸는데, 지금처럼 버스가 있나 택시가 있나. 걸어서 사택까지 가니 칸칸이 선생들이 들어가 사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야. 이튿날 아버님은 청양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남아서 곤로 사고, 그릇 몇 개 사서 살림을 시작했지. 그렇게 5년을 사는데 이사를 다섯 번이나 했지. 전근 때마다 사택을 옮겨다닌 거지.
- 그게 몇년이우? 1961년쯤?
- 그렇지.
- 근데 왜 은정이(큰딸)를 62년에 낳았지? 뭐 했길래?
- 아이 참, 형 고2 때 내가 결혼했다구. 당숙이 급해 가지고 얼른 장가부터 들인 거지.
- 형수가 세 살 많잖아요?
- 그래서 형 다닌 학교에서 '쟤는 누나 치마 폭에서 컸다"는 소문이 났다더라구. 형이 먹성이 좋아. 한밤중에라도 밤을 더 먹고 자야 잠을 자지 안먹으면 안자. 단양에 살 때 밤에다가 얼음짱같은 김치만 갖고도 맛있게 먹어야 잠이 들 정도였다니까. 그러니 살 찌고, 그래서 병들어 죽었지.
- 뭘 병들어 죽어요? 먹을 거 실컷 먹고, 담배 피우고도 80까지 사셨다고 해야지.
- 아 참, 은정이가 늦은 거? 은정이가 처음은 아니고, 하여튼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아이들을 자꾸 실패했지. 낳는대로 성공했으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가 두어 명 태어났을 것이다.
- 하여튼 그러다가 5년 살고 보니 살 수가 있어야지. 준행이까지 생기길래 형만 단양에 남겨 놓고 나는 청양으로 가버렸어. 가서 농사일도 책임지고, 장사도 하고 돈을 벌었어. 선생 월급으로는 아무거도 할 수 없었어. 농사 짓는 일꾼이 한 명 있기는 있었는데, 50 먹은 늙은인데, 일주일도 못버티고 나가. 또 들이면 또 나가. 일이 힘드니까. 그럴 때마다 난 죽어도 이 집 못나가니 난 일해야 한다, 그러고서 일꾼들 데리고 다녔지.
- 이때 작은 형수(이 형수의 아랫동서. 79세. 나 중1 때 이 형수가 밤이면 나를 데리고 나가 무슨 종교단체에 갔다. 몇 번 가다가 형이 못다니게 해서 안간 것같다.)가 "그때 우리 수행이 아빠도 오일륙 때 중앙청 접수했다고 경찰이든 뭐든 다 하라고 했는데, 경찰 월급이 보리 한 가마였대. 그래서 안했지."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교사 월급이 얼마나 시원찮았겠느냐는 뜻이다.
- 형은 오지 근무를 딴 다음에 청양으로 발령이 났어.
- 이때 작은형수가 보충한다. 수행이 애비가 장영순 의원(청양의 전설적인 국회의원. 내가 누이로 부르는, 지금 국민의당 장정숙 의원 아버님이시다) 선거운동 도왔는데, 그때 장 의원님이 힘을 보태주셨다. 그때 장 의원이 비서로 오라 했는데 돈 벌어야 한다고 안갔어.(작은형은 천안에서 여행사업으로 돈을 벌었지만 안타깝게 일찍 돌아가셨다)
- 내가 콩나물 길러 팔고, 닥치는대로 장사를 해서 읍내에 상가를 분양받아 1층을 지어 애들 데리고 나왔어. 그런 다음에는 더 일해서 2층을 올리고, 농사 다 치워버리자고 하여 어머님 아버님도 모시고 나왔지.
- 이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이 2층에서 살았다. 형수의 간난신고 위에서 나는 숟가락 들고 들어간 셈이다. 그때 큰조카가 국민학교 3학년, 나머지는 입학 전이었다. 둘째가 커서 지금 필리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데, 귀국하기만 하면 여러 교회에서 설교 초청이 밀려든단다.
- 이 시절, 형수가 2층집을 마련하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허약해서 30리길을 걸어다니다 지쳐 귀신 보고, 오줌 쌀 때였다. 그때 형수가 "우리도 살기 힘든데 뭔 당질까지 데리고 있으란 말이냐." 이렇게 버텼으면 나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숙이 나를 데려오라 하여 형수는 묵묵히 나를 거두었다.
- 지금 생각하니, 그때 한정식 수준으로 밥을 먹은 기억이 나는데, 그게 다 식성 풍부한 형님 덕분이었다는 걸 알겠다. 난 교사 월급이 많아 잘 차리는 줄 알았는데, 형수 얘기 들어보니 형수가 장사해서 번 돈으로 그렇게 먹고살았단다.
- 형수는 지금도 내 페이스북 들여다보고, 때때로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온다. 형이 가고 없으니 형수라도 오래도록 사시면서 인생을 즐겼으면 좋겠다. 큰아들이 유명한 목사, 훌륭한 목사가 되는 게 꿈이다. 이 조카는어려서부터 말주변이 좋았는데 설교를 아주 잘한단다. 우리 집안에서도 큰 목사 한 명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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