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단기출가기 1 / 삭발, 이 머리칼을 자르면 무명이 사라질까
미얀마단기출가기 2 / 탁발, 밥을 얻어 먹으러 맨발로 걸어가다
미얀마단기출가기 3 / 가사, 마법이 걸린 옷, 가볍지만 무겁더라
미얀마단기출가기 4 / 보시, 그대들은 내게 가난의 바닥까지 긁어 바치는데...
미얀마단기출가기 5 / 공양, 중생은 먹음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미얀마단기출가기 6 / 시간, 2000년 전 퓨왕국에서 오신 스님 삐냐저따, 당신을 따르리라
미얀마단기출가기 7 / 미얀마에서는 개와 고양이도 도를 닦는구나
미얀마단기출가기 8 / 그대들이 수자타라면 나는 태이자가 되리라
- 미얀마가 자랑하는 최고의 불교유적 쉐다곤 파고다
삭발하자마자 마하미얀 즉 대정글사원 선임 비구가 우리에게 가사(kasaya)세 벌을 주면서 입혀준다. 붓다가 가사는 세 벌만 가지라고 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원래 가사는 버려진 옷을 구해다 바느질해 만들어 입어야 하는데, 지금은 보시를 받아 입는다. 붓다 시절에는 버려진 옷만으로 직접 바느질해 입었기 때문에 가사를 보시하려는 사람은 비구나 지나가는 길에 일부러 내다버렸다고 한다. 버려진 옷은 비구가 가져가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사는 직사각형의 검붉은색 천 두 조각이다. 원래 시체를 장례할 때 감쌌던 천이나 아이를 출산할 때 쓰고 버린 천을 구해다 조각조각 기워만들었다는데, 지금은 조각을 이어붙이는 방식은 같은데 어엿한 공장에서 생산된다. 실밥이 있어 불을 붙여보니 후르르 타버린다. 뭔지 알겠다. 비쌀 이유가 없으니 더 반갑다.
더구나 더러 비단을 보시받아도 그 가치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조각조각 잘라 다시 이어붙였다는 말이 있다.
- 가사 중 위에 입는 승가리다. '입는다'는 표현은 사실 부적절하다. 걸치는 게 맞다.
나는 이 승가리를 머리까지 끌어올린 다음 오른쪽끝을 잡아당기며 둘둘 말아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를 지나 왼쪽어깨로 넘기고, 왼쪽에 늘어진 것을 끌어당겨 왼쪽 어깨 뒤로 넘기는 것으로 가사 착용을 끝낸다. 그래서 경전에 보면 '가사를 수하다'라고 하지 가사를 입는다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아랫도리는 가로길이가 짧고 윗도리인 승가리는 매우 길다.
아랫도리는 둘둘 말아 돌리고 접으면 그만인데 승가리라고 불리는 윗도리는 몇 번을 연습해도 잘 안된다. 사흘 동안 진짜 비구들이 따라다니며 어설픈 우리 가사를 고쳐 입히곤 했다.
- 미얀마 수도 내피도의 황금탑을 참배 중인데 가사가 다 벗겨져 상반신 오른쪽이 다 노출되었다.
이러면 절대로 안되는데 가사를 날렵하게 입는 법을 끝내 익히지 못했다. 나중에 덕산 스님이 발견하고 고쳐주었다.
우리 단기출가자 셋 중 나는 감기 후유증이 떨어지지 않아(어깨 드러낸 채 가사만 입으니까 추워서) 가사 입는 법을 잘 지키지 못하고 눈치껏 목을 감고, 쿠타라는 교통사고 후유증이 남아 있어 오래 걷지 못하고 평형 감각이 흩어져 바루를 자주 떨어뜨리기도 해서 하는 수없이 붉은색 옷을 속에 입었다. 비구는 원래 팬티만 허용될 뿐 가사 외 다른 것을 걸치면 안된다.
- 쿠타라는 작년 늦가을에 교통사고를 당한 뒤 평형감각을 잃었다. 세로글씨를 잘 못쓸 정도다. 이번에도 바루를 세 번이나 떨어뜨려 바닥이 찌그러졌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탁발 때 4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가는 중에 몸이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였다. 큰스님 걱정하실까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쿠타라 진철문" 그래서 가사 속에 두터운 붉은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월에 대학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한 아사라만 홀로 건강해서 늘 우견편단 법칙대로 오른쪽 어깨를 다 드러낸 채 휘젓고 다녔는데, 그러다보니 비구 경력이 제법 되는 고승처럼 보였다. 가사도 늘 반듯했다. 하지만 나중에 비밀이 밝혀졌는데 옷핀을 사용하고 있었다. 비구는 가사에 아무것도 붙이거나 쓸 수 없는데, 머리 좋은 미국 박사 아사라는 용케 옷핀으로 가사를 고정시키는 놀라운 꾀를 쓰고 있었다. 그걸 어디서 구했는지, 처음부터 준비한 건지, 이렇든 저렇든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적을 받은 뒤 아사라는 옷핀을 더 사용하지 않았다. 잔꾀를 쓴 벌인지 중간에 배탈이 나 오는 날까지 고생하였다.
우리가 입은 가사 색깔은 적갈색인데, 홍적색도 있고, 황적색도 있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입는 장삼은 붓다가 보지 못한 옷이다.
색깔이 이렇게 된 것은, 붓다 시대에 돈이 안드는 소똥이나 황토로 염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색이 너무 안나와서 나중에는 나무뿌리, 나무줄기, 나뭇잎, 꽃, 열매 등을 이용해 염색을 했다. 그러다가 염료가 고정되고, 그것도 찬물에 하다가 나중에는 끓여서 했다고 한다.
- 붓다 시절의 전통을 가장 잘 지킨다는 남방불교의 가사도 나라별로 색깔이 다르다. 맨왼쪽은 스리랑카, 가운데는 미얀마, 오른쪽은 태국이다. 미얀마의 경우 이 사진의 태국 비구 색깔을 입는 비구들이 더 많다. 홍적색을 입은 비구도 있는데 많아 보이지 않았다.
북방 불교에서는 가사가 완전히 변한다. 남방처럼 가사만 입고 지낼 수 없을만큼 춥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뜻한 일본은 가사라고 할 수도 없는 완전한 변형을 이룬다. 머리도 기르고, 결혼도 하고, 복식은 알아볼 수 없을만큼 다르다.(공부만 열심히 하면 가사야 무슨 상관이랴만 아들딸 청첩장은 보내지 말기 바란다.)
- 일본 승려가 입는 가사. 붓다의 시대와 비교하면 거사불교라고 보는 게 맞다. 머리 기르는 것은 물론 결혼은 당연히 한다.
어쨌든 가사 입는 법은 그리 까다롭지는 않다. 너무나 단순하게 걸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자꾸 입어봐야 한다. 옷을 벗을 때가 돼서야 겨우 익숙해지는 듯했는데, 지금도 다시 입을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하더라' 걱정이 된다.
- 아랫도리는 양쪽끝을 잡아 오른쪽으로 쭉 내밀었다가 허리 넓이로 접고 또 접어 아래쪽으로 말아내리는 방식인데 매우 쉽다.
오른쪽은 전통방식대로 입은 것이고, 왼쪽은 허리띠를 쓴 경우인데, 우리는 허리띠를 썼다. 걷다가 벗겨질까봐 허리띠는 허용되었다.
- 가운데가 전통 방식인데, 어른들은 대개 맨왼쪽처럼 입는다. 목을 감싸는 방식으로, 삐냐저따 큰스님은 항상 이렇게 입었다. 나는 감기 때문에 며칠간 이렇게 입다가 나중에는 더워서 오른쪽어깨를 드러내는 전통방식대로 입었다. 맨오른쪽 방식으로 입는 분은 보지 못했는데, 나는 감기 때문에 늘 숄을 저렇게 얹었다. 비구에게는 숄과 얇은 방석용 천이 지급되는데, 숄은 밤중에 아나파나하기 위해 보온용을 쓰고, 방석용 천 니사단(팔리어 니티다나)은 아무 데나 앉아서는 안된다는 계율에 따라 비구는 반드시 이 니사단을 깐 다음 그 자리에 앉는다. 가사는 붓다의 옷이기 때문에 절대로 아무 데나 앉을 수 없어서 그런다. 삐냐저따 큰스님은 어디에 앉든 반드시 니사단을 깔았다. 나도 그랬다.
- 맨왼쪽은 초기불상으로 헬레니즘 양식인데, 가운데의 삐냐저따 스님 양식과 같다. 맨오른쪽은 석굴암 석가모니상인데 여기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전통 방식이다. 그런데 오른쪽 젖가슴이 다 드러나 있다. 우리 중에는 김상국 아사라가 자주 젖가슴을 드러내어 전법심한테 여러 번 지적받았다. 석굴암 불상이 그렇다는 걸 알았다면 아사라가 당당히 버텼을 텐데 미처 몰랐다. 사실 쿠타라는 석굴암을 실측하여 공식 모형을 만든 국내 유일의 조각가인데 왜 그 말을 안해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매우 복잡하고 2600년의 전통이 있는 가사를 마침내 입었다.
가사를 입자마자 여러 가지 대우가 달라졌다. 우선 비구들이 앉는 자리에 앉아야만 한다. 그러니 늘 맨앞에 앉아야 한다. 공양을 받을 때도 따로 앉는다.
- 가사 입고 비구 전용 자리에 앉았는데 우리 삭발 가사한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전법심, 진여성 두 보살이 멀뚱거리길래 김상국 아사라의 조종을 받은 내가 어서 합장하라고 다그치는 장면이다. 가운데 사진에서 마침내 세 보살이 합장하고, 오른쪽 사진에서 밥상을 공양 올리는 의식을 한다. 이 날 중으로 우리는 맞먹던 보살들한테서 깎듯한 삼배를 받았다. 특히 김상국 아사라는 '천적' 전법심의 삼배를 받고 매우 흡족히 여겼다. 보살들이 당황하는 표정을 보려면 사진을 클릭하면 된다. 원본사진 보기를 설정했다.
만달레이에 갔을 때는 매일 아침 붓다의 얼굴을 씻고 닦아주는 세안식이라는 유명한 행사가 있는데, 일반인은 멀리서 바라봐야만 하는데 우리는 바로 아래까지 가서 앉아 예배를 할 수 있었다.
4시 30분부터 전단향 물로 얼굴을 씻기고 금박을 입힌다. 금박 두께는 15센티, 황금무게는 12톤으로 추정된다.
세안식이 끝난 다음에 마하무니 붓다에게 직접 다가가 예배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적어도 가사를 입지 않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체험이다.(마하무니 불상은 미얀마의 3대 불교유적이다)
- 마하무니 붓다에게 가까이 다가가 공양물을 올리고 있다. 끝에 덕산스님, 그 옆이 쿠타라, 내 머리 뒤로 아사라.
오른쪽 사진은 마하무니 불상 뒤쪽에서 황금으로 붓다의 머리칼을 나타낸 대형 불두에 다가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사를 입은 공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입기 전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막상 입고나니 남녀노소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넙죽넙죽 엎드려 내게 절을 올렸다. 처음에는 그게 얼마나 불편했는지 크게 당황했다.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이 가사가 바로 붓다가 입던 그 옷이라고 상상했다. 실제로 비구계 받을 때 큰스님은 승니단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비구는 아무 데나 앉아서는 안된다. 붓다의 옷인 이 가사를 입은 몸으로 더러운 곳에 앉지 말고, 더러운 것을 묻히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비구계를 받기 전부터, 삐냐저따 큰스님이 예배를 할 때면 반드시 승니단을 까는 걸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나도 계를 받으면 저래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하미얀에서 가사를 입은 뒤로는 어디에 앉든, 그 자리가 흙바닥이든 의자든 황금탑이나 오래 된 불탑이라도 반드시 승니단을 깐 다음에 그 위에 앉았다.
- 왼쪽은 삐냐저따 스님이 승니단을 깔고 앉아 있는 장면이다. 건너편에나를 바라보고 계시다. 오른쪽은 동시에 내 뒤에서 Zaw가 찍어준 사진인데, 의자에 이미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데도 승니단을 또 깔고 거기에 앉아 있다. 내 등에 난 붉은색 천은 진철문 쿠타라 비구가 준비해온 메는 가방이다. 가사 속 왼쪽어깨에 걸쳐 잘 보이지 않도록 했는데 가사가 늘어지면서 그만 드러났다. 가사는 끊임없이 고쳐 입어야 하는데 자동차를 타면 금세 흐트러진다. 단순하게 걸친 것이기 때문이다.
가사의 위의가 얼마나 큰지는 마하미얀 대정글에서도 겪었다. 나는 보지 못했는데 내가 아나파나를 하느라고 큰 나무 아래 앉아 호흡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앞을 지나가던 싱가포르 여성 신도들이 일제히 엎드려 내가 3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는 걸 근처에서 아나파나하던 쿠타라가 재빨리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겼다.
이 사진을 보며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가사를 함부로 입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탁발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진짜 비구라면 신도들이 두려워서라도 게을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단기출가 기간이나마 우리는 새벽 3시부터 열심히 아나파나를 하여 우리에게 절하고 보시하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기로 했다.
- 삐냐저따 큰스님께서는 절이나 숙소에서 아나파나를 하는 것보다 정글의 나무 아래에 가서 하는 게 좋다고 말씀하셔서 우리는 큰 나무를 찾아 그 아래에서 아나파나를 하였다. 그런 중에 말레이시아에서 온 여성 신도들이 지나가다가 '아나파나를 하는 비구'를 발견하고는 얼른 양산 던지고 신발 벗고는 3배를 올린 뒤 자기들의 소원을 내게 빌고 있는 장면이다. 다행이 나는 이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우리 세 비구는 대오각성하여 가사를 입고 있는 한 실제 비구보다 더 열심히 수행하자고 결의하였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6년 고행 끝에 지치고 마르고 배고픈 몸으로 핍팔라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근처 마을에 살던 수자타란 소녀가 그를 보고는 우유죽을 공양한 적이 있다. 이제 그 이야기가 실감이 난다.
이들이 곧 그 수자타 소녀나 다름없다. 이 여성들이 우유를 공양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나와 우리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핍팔라나무 아래 지친 몸을 놓고 숨쉬기에 들어간 고타마 싯다르타를 상상한다.
-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기에, 팔과 다리와 가슴은 울퉁불퉁한 뼈마디로 이루어진, 껍질만 남은 곤충 같다. 엉덩이는 물소 발굽 같고, 등뼈는 공을 한 줄로 꿴듯 튀어나오고, 갈비뼈는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다. 눈동자는 우물 바닥에서 반짝이는 물처럼 눈구멍 깊숙이 가라앉았다. 머리가죽은 덜 익은 채 버려진 조롱박이 태양과 바람에 오그라든 것처럼 되었다. 뱃가죽은 등뼈까지 붙었고, 대소변을 보기 위해 일어나면 즉시 그 자리에 엎어졌다. 사지를 만지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
내게 가사를 입혀 고타마 싯다르타의 그때 그 날 핍팔라나무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이 가능하게 해준 삐냐저따 스님, 무거운 업보인 우리 세 덩어리를 이끌고 멀고 먼 미얀마 마하미얀까지 이끌어준 덕산 스님에게 감사하며, 나의 도반이 돼준 김상국 아사라, 진철문 쿠타라 두 분에게도 감사드린다.
귀국하기 전 삐냐저따 큰스님 앞에 꿇어앉아 비구계를 반납할 때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서운했고, 이튿날 비행기에 타기 위해 가사라도 걸칠 수 있는 사미계마저 호수 스님에게 반납한 뒤 가사 벗어 여행용 가방에 넣고는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내게 가사는 모두 세 벌이나 있다. 하지만 스승의 허락없이는 함부로 입을 수가 없다. 언제고 삐나저따 큰스님이 오시면 계시는 동안이라도 다시 계를 받아 입거나, 미얀마에 가면 그 날로 계를 받아 다시 입는 수밖에 없다. 집에 돌아온 뒤 가사를 세탁해 말리고는, 승가리를 거실과 내 서재에 집게로 물려 펼쳐 놓았다. 가사를 바라보면서 계율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공부에 대한 의무를 깨닫기 위해서다.
- 마하미얀에 가기 전 들른 바간(만불만탑의 고대 불교 도시)에서 찍은 기념사진, 윗줄 맨가운데가 삐냐저따 스님, 그 오른쪽이 덕산 스님, 맨왼쪽은 통역 Zaw Moe Aung이다. 아랫줄은 맨오른쪽부터 전법심, 진여성으로 한국에서 갔고, 그 옆 세분은 룰루, 탄탄에, 마지막은 만달레이와 몽유아에서 큰 호텔과 리조트를 운영하는 보살이다. 이밖에 찌찌에라는 키큰 보살이 있는데 이 사진에는 안나왔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우리 세 사람의 비구 체험에 동참해주었다. 당연히 물심양면이었다. 받은 은혜 생각해서라도 공부 열심히 하겠다.
*** 이 글을 다 읽으셨으면 인연의 실을 이끌어 여기에 묶기 바랍니다.
아사라, 쿠타라, 태이자가 있습니다.
<황금탑을 세우는 용인 보문정사>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 11
문의 / 031-332-0670 1899-3239
안내/유승민 yuchunni@hanmail.net
*** 붓다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스승이 없습니다.
그가 붓다이고, 그가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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