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단기출가기 1 / 삭발, 이 머리칼을 자르면 무명이 사라질까
미얀마단기출가기 2 / 탁발, 밥을 얻어 먹으러 맨발로 걸어가다
미얀마단기출가기 3 / 가사, 마법이 걸린 옷, 가볍지만 무겁더라
미얀마단기출가기 4 / 보시, 그대들은 내게 가난의 바닥까지 긁어 바치는데...
미얀마단기출가기 5 / 공양, 중생은 먹음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미얀마단기출가기 6 / 시간, 2000년 전 퓨왕국에서 오신 스님 삐냐저따, 당신을 따르리라
미얀마단기출가기 7 / 미얀마에서는 개와 고양이도 도를 닦는구나
미얀마단기출가기 8 / 그대들이 수자타라면 나는 태이자가 되리라
- 아침 6시, 마하미얀의 비구 대행렬, 이 행렬 다음에 사미 108명이 뒤따른다. 공양하러 가는 중이다. 우리 코리아 비구들은 귀빈 식당에서 공양하느라 이 행렬에 서지 않는다.
- 교수님, 우리 삭발할까요?
나와 진철문 박사의 단기출가 일정이 잡힌 가운데 김상국 교수가 차일피일 "난 오후불식(점심 먹고 난 다음에는 굶는) 수행이 힘들어 못한다."고 미뤘다. 미얀마에 가긴 가는데 출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그럴 때마다 나는 점심을 많이 먹어두면 저녁에 안먹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황금탑 불사를 추진하고 있는 보문정사 주지 덕산 스님도 "셋은 돼야지 둘이서만 깎으면 위엄이 덜 난다"며 은근히 기대를 놓지 않았다.나와 진철문 박사는 누가 권유할 것도 없이 즉시 그러자고 합의한 터라 김상국 교수에 대한 설득은 꾸준히 이뤄졌다.
협박과 회유도 있었다.
- 교수님, 머리 안깎으시면 제가 발 씻을 물 가져오라, 수건 가져오라 이렇게 시키면 어쩌실 겁니까? 미얀마에서는 비구가 시키면 뭐든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교수님은 머리 깎자마자 노스님 되는 겁니다. 대우가 아마 각별할 것으로 보입니다.(몇달 전 정년퇴직했으니 나이는 각자 계산하시라. 내 입으로는 말 못한다)- 우리는 가자마자 카탱(연중 가장 큰 집단 보시) 행사에 초대되는데, 셋이서 의젓하게 앉아 공양을 받아야지 둘이선 좀 외롭습니다. 하안거도 안하고 특별 공양을 받을 테니 머리 깎기 전이라도, 미얀마 가기 전이라도 아나파나 열심히 하자구요. 삐냐저따 큰스님 뵈면 여쭐 말씀이 많잖아요? 우리, 놀러가는 거 아니고 공부하러 가는 거 잖아요?- 머리칼 다시 나려면 석 달은 걸린다는 걱정을 하길래 "교수님 머리칼은 힘이 없어서 포마드 발라야 하고, 염색해야 하고 문제가 많아요. 이번에 싹 깎은 다음에 하수오 먹으며 살살 기르자구요. 삭발하면 머리칼이 튼튼해져서 잘 안쓰러진대요. 평생 짓눌려 있던 모근 모낭이 시원하다고 만세할 겁니다. 포마드 없는 세상이 왔다고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게다가 김 교수의 약점, 즉 보살들이 지나가다 어깨라도 부딪히고 옷깃이라도 스치면 "교수님, 삭발하신다면서요?" 이러면서 지나갔다. "아, 아니야. 이재운이 그냥 하는 소리야." 해도 보살들은 못들은 척 지나가버렸다. 그러다보니 여론은 '세 사람이 머리 깎고 비구 된다'는 소문으로 확정되었다. 덕산 스님은 여론을 지켜보면서 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뭔가 따로 확신이 있는 듯했다.
그렇게 말 안듣는 어린애처럼 김 교수와 우리 일행은 미얀마 경제수도 양곤에 도착하고, 이튿날에는 양곤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던, 우리들의 스승 삐냐저따 스님을 친견했다.
- 중앙에 두 발 모으고 두 손 모은 비구가 삐냐저따 큰스님이시다. 스님은 언제 어디서든 항상 다리를 모으고 손을 잡고 있다. 아침 일찍 양곤 공항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셨다. 곧 바간 가는 비행기를 탄다.
그때는 몰랐는데 삐냐저따 큰스님은 우리 셋이 삭발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듣고 계셨다. 아마도 '의도된 허위 정보'였으리라고 판단되는데, 어쨌든 큰스님은 우리 세 사람을 제자로 삼기 위해 거창한 계획을 세워두고 계셨다.
- 덕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바간에 가면 수많은 불탑을 참배할 테니 가는 곳마다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1000원권(미얀마화폐로) 100장씩 두 묶음이다. 1000원은 꽤 가치 있는 돈이다.
이날 우리는 바간으로 날아갔는데, 그곳은 1057년부터 종교와 문화 중심지가 된 도시다. 인근 인도, 스리랑카, 태국, 캄보디아에서 불교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단다. 1057년부터 200년간 바간은 세계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골의 쿠빌라이칸에게 조공을 거부하다가 1287년 왕조가 망할 때까지 200년간 크게 번성했다.그런 탓에 지금도 바간 곳곳에 거대한 불탑이 서 있고, 붓다의 진신사리를 모신 대탑이 굉장히 많다.
- 오래된 탑 앞에 앉아 기도하는 삐냐저따 스님과 우리 일행.
바간은 불탑이 너무 많아 5분 정도 가다 들러 참배하고, 또 5분 가다 들러 참배할만큼 엄청난 불탑의 도시였다.
삐냐저따 스님은 우리가 들러야 할 불탑을 골라 일일이 참배하러 다녔다. 큰스님 자신의 수행 목적도 있겠지만 실은 우리에게 2600년간 이어져온 붓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듯하다. 삭발하기 전에 이 거대한 담마의 세계를 맛보라는 배려였으리라.
그러고도 우리는 몽유아 등 유명 불교 유적 도시를 지나가며 곳곳에서 참배를 했다.
삭발하기 전에 거쳐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어딜 가든 우리는 대략 10분 정도 그 앞에서 아나파나를 했다.
- 불탑 보수 중인 사원의 다이아몬드. 불탑 꼭대기에 이런 다이아몬드를 올린다.
- 아나파나 이미지 컷으로, 내가 찍은 사진이 아니다
이틀 내내 어딘지 이름도 알 수 없는 불탑 유적지(미얀마 문자를 읽지 못하니 어딘지 메모조차 못했다)를 두루 참배한 뒤 우리는 마침내 대정글로 원래 목적지를 잡았다. 7시간 거리의 황톳길을 자동차로 달렸다.
3시간쯤 지나 대정글로 들어가는 관문 비슷한 곳을 지나는데 삐냐저따 큰스님을 태운 자동차가 먼저 앞으로 갔다 뒤로 빠지기를 세 번 했다. 통역 조모아웅이 말하기를, 자동차가 산다무키 여신각에 삼배를 드리는 중이라고 했다. 이어 덕산 스님의 차도 삼배를 하고, 마지막에 우리 차도 삼배를 했다.
- 산다무키 여신각에서 길을 가는 나그네를 위해 준비한 식수 항아리. 물을 걸러 마실 수 있도록 위생문제까지 고려했다. 미얀마는 덥지만 건조한 기후라 물이 쉬 상하지 않는다. 이런 식수 항아리는 미얀마 어디를 가든 길가에 있어서 목 마른 미얀마인들의 목을 적셔준다. 단 관광객은 이 물을 마시면 탈난다.
이날 저녁 때가 돼서야 우리는 마하미얀(대정글이라는 뜻) 사원에 도착했다. 거대한 황금탑이 우리를 반겼다.
일정에 따르면 이 날 저녁 공양을 마친 다음 일단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는다고 했다.
드디어 머리를 깎을 순간이 오니 우리는 모두 긴장했다. 그런데 김상국 교수는 막상 마하미얀에 도착한 뒤로는 별로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 깎을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저녁 공양 후 한 노비구가 우리를 불렀다. 통역이 "따라가세요."라고 말한다. 이제 단기출가가 시작된다는 의미다.
김상국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의심의 여지 없이 삭발할 태세다. 아마도 삐냐저따 큰스님이 직접 우리를 인솔하여 천불천탑을 참배할 때 이미 결심이 선 듯했다.
그래서 김 교수 먼저 들어가라고 하여 곧 삭발이 시작되었다. 하도 빠르게 삭발이 돼서 우리는 긴장할 틈도 갖지 못했다. "그 다음!" 통역 조모아웅이 무심히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빡빡 깎은 김 교수가 삭발세면장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나왔다.
우리는 모두 :와!" 하고 소리질렀다. 긴장을 풀어주려고 "멋있다" "진짜 노스님이다" 아무 말이나 외쳤다.
그 다음에는 내가 들어갔다. 진철문 교수는 교통사고 후유증이 있으니 마지막에 충격당하라는 내 배려였다.
나는 삭발할 때 머리가 뜯길까봐 미리 머리칼에 면도용 젤을 잔뜩 발랐다. 그래서 그런지 칼이 슥슥 잘도 나갔다. 정말이지 눈깜짝할 사이에 내 머리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그렇게 나의 무명과 업보가 떨어져나가면 좋으련만, 시바리 존자는 처음으로 머리 깎을 때 그 사이에 깨달아 아라한이 됐다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무슨 감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웠다. 군대 갈 때 한번 깎아봐서 충격이 덜한 듯했다.
나는 대학원 마치고 군에 갔는데, 논산훈련소에 입대하는 날 형과 함께 이발소에 들러 이발기계로 삭발을 한 적이 있다. 그때의 그 모멸감과 참담함은 지금도 기억이 날만큼 싫다.
그런데 오늘 이 삭발은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쾌감이 느껴졌다. 삭발을 끝내고 머리를 감으니 더 시원했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이 거기 있다. 내가 나를 낯설어 하다니, 대체 내게는 얼마나 많은 왜곡되고 굴절된 자아가 있단 말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가고 진 박사가 들어왔다. 기다리던 보살들이 역시나 "와!" 해주었다. 말하자면 박수를 대신하는 격려다.
- 태어나서 처음으로 삭발을 해본다. 솔직히 매우 긴장되었다. 수염조차 못기르게 하던 아버지가 아시면 뭐라실까, 아내나 딸은 또 뭐랄까 생각하다가 기왕 깎았으니 아나파나의 끝을 보자는 각오를 다졌다. "다 잊자, 다 잊자, 별군이만 빼고."
세 사람 모두 삭발을 끝낸 뒤에는 선임 비구에게 무릎 꿇고 앉아 사미계를 청하고 가사와 발우를 받아야 한다.
- 유치원생처럼 스님이 불러주는대로 팔리어 계율을 낭송한 다음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예비 사미들. 옷을 입어야 사미다. 그러고도 팔리어로 된 정식 불명을 받아야 된다.
이제 가사를 옷을 입은 뒤 정식 계를 받아야 한다. 조모아웅이 찍은 동영상이 있다. 병아리들처럼 입을 딱딱 벌려 팔리어 계를 따라외우는 게...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렇게 사미가 되어 계사 앞에 얌전하게 앉아 있다. 어린이집에 막 입학한 아기들 같다.
- 사미계를 받고 팔리어 법명을 받은 다음 얌전하게 앉은 늙은 사미들.
내 세상에서 김상국 교수는 '최고령 사미'다.
- 나 태이자. 해보자, 이런 각오였다.
- 김상국 아사라. 우린 그를 깎자마자 노스님이라고 불렀다. 물론 아직은 노사미...
- 진철문 쿠타라. 우린 그를 깎자마자 고승이라고 불렀다. 역시 아직은 고사미...
- 맨오른쪽 전범심 보살이 웃다웃다 그치질 않아 웃음을 꾹 참고 겨우 합장하는 장면.
김상국 교수가 삭발 전에 동갑내기인 전법심 보살(사진 맨오른쪽)의 삼배를 받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그간 증거 사진이 없어 못올렸다. 그러던 중 드디어 동영상이 발견되었다. 전법심, 진여성 보살만이 아니라 미얀마 보살들까지 엎드려 절을 올린다.머쓱한 세 사미의 표정도 재미있다.
이제 우리는 사미가 되었다.
사미는 비구가 되기 위한 전단계다. 우리는 속성으로 사미 과정을 마쳐야 하니 다음날 아침까지 치열한 수행을 해야 한다.
우리 셋은 정말이지 이 날 밤만은 잠을 거의 안자고 아나파나를 했다. 양심상 그렇게라도 해야 이튿날 비구가 될 실마리라도 얻을 것같은 기분이었다.
일과가 끝나 숙소로 돌아오니 다들 착잡한 듯했다.
가사는 몸에 맞지 않고, 감기가 거의 떨어졌던 나는 삭발하고, 팬티만 입은 몸으로 가사 입는 연습을 한다고 기거이 또 감기가 도졌다. 저녁 아나파나를 한 뒤 9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힘이 들어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할 수없이 누워서도 계속 아나파나를 했다.
그러던 중 목에서 두뇌로 올라가는 대동맥으로 피가 솟구쳐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찬 물줄기가 흘러가는 듯한 소리였다. 피의 흐름은 대동맥 기준 초당 20Cm~60Cm, 1분 동안 혈액 750Ml가 지나간다. 그 소리가 그토록 생생하게 들려왔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 후 6년간 갖은 수련을 했어도 깨우치지 못하고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앙상하게 마르고, 귀에는 대장간 풀무소리 같은 이명(耳鳴)이 요란했다 한다.
나는 일곱 살이나 여덟 살 무렵, 내 왼손 검지손가락 끝마디를 칼로 베어 피를 보았는데, 그때 디스크처럼 둥글게 생긴 적혈구가 마구 쏟아지는 걸 본 적이 있다. 전에도 피를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런 피는 처음이었다. 빨갛고 둥근 디스크가 마치 도미노 칩이 무너지듯 혈관에서 삐져나왔다. 너무나 놀라서 '엄마'를 소리쳐 부르다가 집으로 뛰어가 헝겊을 구해 재빨리 상처를 싸맸다.
그런데 내 핏줄 속 피가 흐르는 소리가 들리다니, 너무나 충격적인 경험이라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니 멀리 황금탑이 달빛에 젖어 있다.
마루에 승니단을 깔고 앉아 잠시 아나파나를 했다. 그러고는 비파사나로 들어가면서 기도를 올렸다.
나는 <마하파탄경>독송을 들으면서, 어떡하면 2000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2016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시고 위없는 법을 설해줄 수 있을까, 눈물만 흘리며 언젠가 그러기를 소원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태어난 지 이레만에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그 어머니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나이 40이 넘었을 무렵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깊은 선정에 들어가 그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 궁금하여 이 우주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어머니 마야가 도리천에 남성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도리천으로 직접 올라가 그곳 선법당에서 전생의 어머니였던 그 천인을 모셔놓고 설법을 했다. 붓다도 그렇게 한 가닥 한을 풀었다.
우리 어머니는 5형제를 낳아 길렀다. 내 위로 두 형이 있지만 모두 공부의 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악을 써서 나를 처음으로 중학교에 보내고, 내 동생은 나 때문에 또 공부의 연을 잡지 못했다. 막내는, 그 사이 약간 형편이 펴서 중학교에 무사히 진학했다. 이 정도 집안에서 나를 고등학교까지 보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시골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나는 10월 초 학교를 그만두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럴 수는 없다고 어머니께 울면서 따졌다.
내가 세상에 올 때는 농사 지으러 온 것이 아니다, 제발 내게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불가항력의 요구였다. 사실 중학교마저 보낼 여력이 없어 읍내 작은당숙댁에 나를 맡겼는데, 집 떠나 본 적이 없는 내가 한달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25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다가 기어이 귀신을 보고 소리를 색깔로 보는 공감각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번에는 큰집 둘째당숙에게 나를 맡겼다. 그 집 큰형이 내가 다니는 중학교 교사라서 "얘 하나 공부 좀 시키려는데 힘이 없으니 조카가 맡아달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청을 기꺼이 받아 나를 데려갔다. 거기서는 적응을 잘해서 무사히 중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고등학교까지 형에게 신세를 질 수 없었다.
어머니는 한숨만 쉬다가 11월쯤, 공주에 사는 이모를 찾아가 어떡하든 나를 맡아달라고 사정했다.(내가 멀리 다녀올 일이 있을 때 잠시 별군이 좀 맡아달라고 사정하는 그런 마음과는 비교가 안될 것이다) 그런데 주권 없는 이모 대신 이종형이 그러마고 쾌히 허락하여, 그때는 전학도 안되고 새로 시험을 치는 수밖에 없어 나는 공주고 입학시험을 쳐서 1학년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남의 집을 전전하며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은, 중학교도 못들어간 둘째형이 힘든 노동을 해가며 가르쳐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어찌 어머니를 잊을 수 있겠는가. 나를 가르쳐준 육촌형, 이종형, 당숙들, 이모가 다 하늘에 계시다.
언제고 내가 위없는 도리를 알게 되는 날, 온 우주를 뒤져서라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나를 나누어 맡았던 분들을 찾아 위로를 드리고, 나 가르치느라고 우리 부모는 책 한 권 옳게 읽지 못하고, 공부 한번 못한 그 한을 다 갚아드리고 싶다. 그런 목표를 한번도 놓은 적이 없고, 이번 단기 출가에서도 나는 그러기를 소원했다. 한 발만, 한 발만 더 나가자, 이러다가 인연이 미얀마 대정글까지 닿은 것이다.
황금탑은 무심하게 빛난다.
뭔가 좀 팍 소리를 내며 터졌으면 좋으련만 아무 소식이 오지 않았다.
나는 새벽 아나파나를 위해 그만 자리를 걷었다.
어렵게 잠이 들어 아침 3시에 일어났다. 삭발한 첫날이라 긴장했던지 모두 3시에 일어났다. 딱 군대 신병같다.
기왕 머리까지 깎았는데 삐냐저따 스님보다 먼저 가서 아나파나를 하자고 의기투합하여 서둘러 황금탑으로 향했다.
우리의 이 기특한 원력에도 이 날도 삐냐저따 스님보다 먼저 아나파나에 들어가겠다는 다짐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깜깜한 새벽, 삐냐저따 스님은 벌써 나와 선정에 깊이 들어 계셨다. 출가 45년 넘었으면 살살 꾀를 부려도 되련만 삐냐저따 스님은 언제나 빈 틈이 없으시다.
이 날은 삭발, 사미계에 이은 비구계를 받는 날이다.
비구계는 받아야 위엄이 서지 늙은 사미로는 면목이 안선다.
아침 공양-탁발이 끝난 오전 9시경 우리 세 사람에게 비구계를 주기 위한 임시 계단(戒檀)이 마련되었다.
비구계는 비구 25명의 동의를 얻어야 받을 수 있다. 위 사진은 비구 25명이 우리에게 비구계를 줄 것인가 토의하는 장면, 아래는 마침내 팔리어 비구계를 따라 읽으며 하나하나 묻고 답하는 식으로 수계하는 장면.
계사인 삐냐저따 큰스님은 팔리어 경전을 준비해 우리더러 따라 읽으라고 시켰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우리들은 병아리가 빼약거리듯이 어설프게 재잘거렸다. 대신 발음은 어색해도 목청은 우렁차게 외쳤다.
스님은 비구계 하나하나를 설명하면서 우리의 다짐을 요구했다.
우리도 일일이 대답을 하면서 마음을 굳혀나갔다.
"예! 예! 예!" 입을 딱딱 벌려 외쳤다.
= 살생하지 말라
- 예!
= 거짓말하지 말라
- 예!
= 간음하지 말라
- 예!
= 훔치지 말라
- 예!
= 중독되지 말라
- 예!
= 꾸미지 말라
- 예!
= 노래하고 춤추지 말라
- 예!
= 늘 보시를 하라
- 예!
= 점심 이후에는 식사를 하지 말라
- 예!
= 돈 탐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라
- 예!
우리는 팔리어를 모르기 때문에 통역 Zaw Moe Aung이 말해주는대로. 시끄러워 잘 들리지도 않고, Zaw의 발음도 또렷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예! 예! 예!" 외쳤다.(이 계는 11월 10일 비구계와 사미계를 모두 반납할 때까지만 굳게 지켰다. 만달레이에 머물 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진철문 쿠타라가 한밤중에 눈이 어지럽다며 호텔에 준비된 감자칩을 혀에 녹여 먹었다. 음료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씹어먹지 않고 녹여먹은 것이다. 나도 먹으라고 쿠타라가 밀어줬지만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아 그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삐냐저따 큰스님께서 일일이 계첩을 주셨다. 이제야 비구가 되었다.
우리 비구는 이제 붓다와 붓다를 닮은 선지식 외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는다. 특히 미얀마인들이 숭상하는 산다무키 신에게도 절하지 않는다. 산신이고 귀신이고 우린 그런 거 모른다. 비구는 붓다 다음으로 높은 신분이기 때문에 진리 외 그 무엇에도 머리를 굽히지 않아야 한다.
삐냐저따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 비구가 되었으니 먹고 자는 것은 걱정하지 말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붓다께서 마련해줄 것이다. 비구는 오직 공부만 하면 된다. 공부 안하고 보시만 받아먹으면 큰죄를 짓는 것이다. 죽도록 공부하는 것, 그것이 비구의 길이요, 운명이다.
- 먹고 입는 것, 생활하는 것을 다 붓다가 해준다더니 단지 밥은 얻어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 줄 끝에 내가 있다.
*** 이 글을 다 읽으셨으면 인연의 실을 이끌어 여기에 묶기 바랍니다.
아사라, 쿠타라, 태이자가 있습니다.
<황금탑을 세우는 용인 보문정사>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 11문의 / 031-332-0670 1899-3239
안내/유승민
안내/유승민
*** 붓다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스승이 없습니다.
그가 붓다이고, 그가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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