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붓다를 만나다①-붓다는 왜 옆구리로 태어났을까>
* 이 글은 태이자 이재운이 손질한 것입니다. 원문을 보시려면 <여기>를 눌러 해당 번호의 글을 보십시오.
열 사람이 가면 여덟이 죽거나 행방불명된다. 둘만 살아서 돌아온다. 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인도로 간 승려들 이야기다. 산중에는 도적떼가 우글거린다.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쓰러지거나,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에서 실족할 때는 시신조차 건지지 못한다. 인도로 가는 길은 그토록 험했다.
육로만 그런 게 아니다. 뱃길을 택한 이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허름한 목선과 조잡한 항해술로 집채만한 파도에 잡아먹히지 않아야만 인도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의 현장 법사는 땅에서, 신라의 승려 혜초는 바다에서 목숨을 걸었다. 붓다의 법(佛法). 그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동아시아의 수행자들은 목숨을 걸고 인도로 갔을까.
지난 겨울 끝자락에 인도행 비행기를 탔다. 봄으로 들어서면 인도는 뜨거워진다. 기온이 40~50℃를 웃돈다. 숨을 들이마시면 ‘불덩어리’가 코와 입으로 훅훅 밀려온다. 냉방 시설도 기대하기 어렵다. 여행에는 최악의 조건이다. 그래서 순례객이나 여행객들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 인도로 떠난다. 나도 그랬다.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서둘러 인도로 갔다.
인천공항에서 델리까지는 아홉 시간이 걸린다. 인도땅이 가까워지자 비행기 창밖으로 히말라야 설산이 보였다.
구름이 바다처럼 깔려 있다. 그 위로 히말라야 고봉(高峰)이 섬처럼 솟아올라 있다. 장관이다. 비행기 날개와 거의 수평으로 안나푸르나의 정상이 장엄하게 서 있다. ‘2600년 전, 저 히말라야 산맥 남녘땅에서 붓다가 태어났다. 붓다는 거기서 성장했다.’ 붓다의 땅, 붓다의 나라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델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공항 청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인도는 달라지고 있었다. 8년 전 인도를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이 나라는 100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도시 기차역의 화장실도 마음 놓고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저분하고 낙후된 나라였다.
지금은 다르다. 곳곳에서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고, 신도시가 생겨나고, 지난해 11월에는 모디 총리가 불시에 화폐개혁까지 단행했다. 최고액권을 중심으로, 통용되는 화폐의 86%를 종잇장으로 만드는 ‘혁명’에 가까운 조치였다. 물론 탈세와 지하경제를 잡기 위한 대수술이었다. 모디 총리는 당시 TV생방송에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인도인 가이드는 “불가촉천민 출신인 모디 총리에 대한 인도 국민의 지지도는 현재 80%를 웃돈다”고 말한다. 그런 국가 지도자를 가지고 있는 인도가 나는 솔직히 부럽다.
나는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로 갔다.
붓다가 태어난 땅은 카필라 왕국이다. 히말라야 산맥 아래의 북인도다. 지금은 네팔 영토다. 그래서 인도와 네팔은 종종 다툰다. “붓다는 인도 사람”이라는 인도 측 주장과 “아니다, 네팔 사람”이라는 네팔 측 주장이 맞선다.
그런데 인도냐, 네팔이냐 따지는 건 지금의 기준일 뿐이다. 당시에는 그런 국경도 없었다. 붓다는 그저 카필라 왕국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코살라국ㆍ마가다국ㆍ밤사국ㆍ말라국 등 인도에 16개 왕국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카필라 왕국은 아주 작고 약한 나라였다.
버스는 룸비니를 향해 달렸다.
창밖의 풍경은 무척 낯설다. 1950년대나 60년대, 아니면 70년대 한국의 거리 풍경이 저랬을까. 가난한 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붓다의 유적은 유피주와 비하르주에 유독 많다. 인도에서도 북부의 유피주와 비하르주는 궁핍한 오지가 많다. 그래서일까. 붓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내내 가난의 풍경과 마주쳐야 했다.
룸비니로 가려면 인도와 네팔의 국경을 통과해야 한다.
버스는 국경 앞에서 멈추었다. 말이 국경이지 경계선은 허름하다. 작은 검문소와 낡은 바리케이드가 있을 뿐이다. 그래도 총을 든 군인은 더러 보인다.
네팔로 넘어가자 경치는 조금 달라졌다. 뭐랄까, 좀 더 정돈되고 깔끔한 분위기다.
버스는 룸비니에 도착했다.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이다.
버스에서 내렸다.
길에는 먼지가 폴폴 난다. 걸음을 재촉했다.
보고 싶었다. 붓다가 태어난 장소.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그 곳.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읊었다는 그 역사적 현장을 보고 싶다.
룸비니 동산은 깔끔했다. 푸른 나무와 갖가지 꽃들이 여기저기 만발했다.
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검문검색을 한다. 순례객들은 모두 신발을 벗어야 한다.
남방 불교의 전통이다. 스리랑카의 사원에 들어설 때도 맨발이어야 한다.
나는 양말까지 벗었다.
룸비니 동산 안으로 들어서자 햇볕에 데워진 돌바닥이 따스하다.
2600년 전 샤카족은 인도 북부에 살았다.
저 멀리 히말라야의 설산이 보이는 땅이다.
왕의 이름은 숫도다나, 성(姓)은 고타마(Gautama)다. 왕비의 이름은 마야데비(Mayadevi)다. 우리는 흔히 ‘마야 부인’이라 부른다.
팔리어 경전에는 왕비 마야가 ‘대지처럼 의젓하고, 연꽃처럼 아름답다’고 기록돼 있다. 아마도 넉넉한 품성에 미모를 갖춘 여인이 아니었을까.
요즘도 우리는 아이를 낳기 전에 태몽을 살핀다.
붓다 당시의 인도도 그랬다.
하루는 왕비가 꿈을 꾸었다. 흰 코끼리가 왕비의 몸으로 들어오는 꿈이다. 붓다 당시는 고대 힌두교 사회다. 힌두교에는 약 3억에 달하는 신이 있다고 한다. 그 신들은 종종 동물의 모습으로 화현한다.
힌두교에는 인드라 신이 있다. 번개를 움직이는 신이다. 인드라 신은 ‘아이라바타(Airavata)’라는 흰 코끼리를 타고다닌다.
그래서일까. 힌두교에서는 흰 코끼리를 고귀하고 신성한 동물로 여긴다. 불교 국가인 태국은 아예 국가의 수호신을 흰 코끼리로 삼고 있다. 그러니 왕비 마야의 꿈은 길몽이다. 한국으로 치면 봉황이 날아와 품에 안기는 꿈 정도나 됐을까.
나는 마야데비 사원의 입구로 갔다.
왕비 마야가 아들을 낳은 곳이다. 사원 건물의 지붕에는 황금빛의 작은 탑이 하나 있다. 탑에는 그림이 있다. 두 눈 사이에 점이 하나 그려져 있다.
네팔 사람에게 물었다.
“저 점이 뭐죠?”
그의 대답이 흥미롭다.
“저건 왼쪽 눈도, 오른쪽 눈도 아닌 제3의 눈이다. 우리는 그걸 ‘마음의 눈’이라 부른다. 깨달음이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러니 마야데비 사원은 ‘제3의 눈, 마음의 눈’을 뜨게 되는 이의 탄생지다.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꽤 넓다. 땅바닥에서는 유적을 발굴 중이고, 그 위로 다리처럼 나무판을 깔아 걸을 수 있게 했다. 바닥에는 세계 각국의 동전과 지폐가 떨어져 있다. 사람들의 기도가 담긴 동전들이다.
붓다의 탄생 일화에는 수수께끼의 코드가 박혀 있다. 다름 아닌 옆구리 출생이다. 왕비 마야는 붓다를 옆구리로 낳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당시 제왕절개를 한 것도 아니다. 나는 탄생지 둘레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실제 왕자가 옆구리로 태어났을 리는 없다. 그럼 이건 하나의 상징이자 은유이다. 옆구리 탄생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긴 걸까.’
인도 사람들에게 물으니 "계급 때문"이라고 답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는 4성 계급이 있다. 성직자는 브라만, 왕족과 무사는 크샤트리아, 상인은 바이샤, 하층민은 수드라다. 힌두교 신화에는 브라만은 신의 입에서 태어나고, 크샤트리아는 신의 옆구리에서, 바이샤는 신의 다리에서, 수드라는 신의 발바닥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붓다는 왕족이니 크샤트리아 계급이다. 그래서 왕비 마야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풀이다. 다소 평면적인 해석이다.
절집에서 이 대목은 수수께끼처럼 거론되기도 한다. 한마음선원의 대행(1927~2012) 스님은 생전에 “부처님의 옆구리 출생은 ‘중도(中道)’를 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선승인 고우 스님도 “주위에 있는 스님이 나보고 도통 이해가 안 간다고 하더라. 부처님의 옆구리 출생은 ‘중도(中道)’를 뜻한다”고 말했다. 그럼 아기 붓다의 옆구리 출생이 왜 ‘중도(中道)’를 뜻하는 걸까.
사람들은 어디로 태어날까. 엄마의 자궁을 통해 아래로 태어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출생이다. 아버지의 기질과 업장이 자식에게, 다시 그 자식에게 수직으로 내려온다. 과학에서는 그걸 유전자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인과의 윤회라고 부른다.
붓다의 출생은 다르다. 위에서 아래로 계단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1을 딛고 2가 나오고, 2를 딛고 3이 나오는 식이 아니다.
붓다는 옆구리를 뚫고 나왔다.
그럼 옆구리 이전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3 이전의 2, 또는 2 이전의 1이 아니다. 아들 이전의 아버지가 아니다.
붓다는 그런 패러다임을 파괴했다. 그래서 붓다가 뚫고나온 옆구리의 이전은 ‘공(空)’이다. 숫자로 표현하면 ‘0’이다. 그래서 옆구리 출생에 담긴 의미가 심오하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출생, 그 근원과 바탕을 ‘로고스(말씀)’라고 표현한다. 그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는 역사적 사건. 그게 바로 예수의 출생이다.
예수 역시 위에서 아래로 태어나지 않았다.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기는 했지만, 예수는 성령에 의해 잉태됐다.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가 또 누구를 낳는 식의 출생이 아니다.
붓다의 출생도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다. 아기 붓다는 ‘공(空)’의 옆구리를 뚫고 튀어나온 ‘색(色)’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의 출생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상징한다. 그게 ‘중도(中道)’를 관통하는 본래적 의미다.
마야데비 사원을 거닐며 생각했다. 그럼 붓다만 옆구리로 태어났을까. 붓다만 '0'에서 태어났을까.
아니다. 우리는 모두 '0'에서 태어났다. 옆구리를 뚫고 나왔다. 다만 망각할 뿐이다.
옆구리 이전의 나, 태어나기 이전의 나,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주인공. 그걸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래서 붓다가 이 땅에 왔다.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 말이다. ‘너는 어디로 태어났나, 너는 누구인가’.
맨발로 룸비니 동산을 걸었다. 그 물음이 내면의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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