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주항쟁으로 젊은 청년들이 속절없이 총에 맞아 죽어가던 1980년 5월, 휴교령으로 대학에 가지 못하는 기간에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아드반>, 대체 태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무엇을 구하려 출가했을까란 의문을 풀고 싶었다. 당시에는 풀지 못했다.
또 하나는 고타마 싯다르타와 조사들이 선사들이 대체 뭘 깨달았다는 건지 그 실체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문염송을 탐독하고, 선관책진을 읽었다.
당시 애 엄마(나중 일)가 다니던 회사에서 광덕 큰스님이 마침 <선관책진(禪關策進)>을 번역 출간하려는 중이었다. 스물한 살이던 애 엄마가, 막 번역이 끝난 원고를 붙들고 교정을 보길래, 그냥 도와줄 마음으로 교정지를 읽었다. 그러다가 그만 끝까지 다 읽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스물두 살, 스무한 살 어린애였는데, 선관책진(禪關策進)을 교정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용감'한 일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에 들어가고, 이어 뒷산 공산성 기슭에 살던 명초 스님으로부터 숱한 가르침을 받고, 대학에서도 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했지만 진짜 불연(佛緣)은 이 <선관책진(禪關策進)>을 만나면서 강력본드처럼 붙어버린 듯하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감동이지만 그 중에서도 <선관책진(禪關策進)>이 북을 치듯 내 가슴을 두드린 것은 숱한 선사들의 임종(臨終) 자세였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의연하기 어렵다.
그런데 <선관책진(禪關策進)>에 나오는 선사들의 죽음은 놀랍고 아름다웠다.
나는 내친 김에 깨달았다고 주장하거나 인정받거나 소문이 난 조사, 선사 140명 자료를 수집했다. 거의 모든 선 관련 책을 수집하고 자료를 모았다. 일반 유명인들의 죽음 자료도 구했다. 하지만 가치가 낮아 그 자료는 버렸다.
플롯을 두 가지로 잡았다. 오도 중심, 임종 중심이다. 두 가지 조건에 맞는 분들만 골랐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허공잡는 긴 외침 - 오도송 임종게>였다. 나중에 <목불을 태워 사리나 얻어볼까>로 개정하고, 몇 년 전에는 <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로 다시 바꿨다.
난 사실 1990년 바이오코드 연구를 시작하여 오늘에는 Brain Stem을 여는 방법을 알아냈다.
Brain Stem이 열리지 않고는 진실을 보기 어렵다.
선관책진은 그 첫 걸음이다. 내 삶의 조각을 맞추면 하나도 빈 틈없이 톱니바퀴처럼 이어진 듯하다.
초간본 <허공잡는 긴 외침(경서원)>과 개정본 <목불을 태워 사리나 얻어볼까(한강수)>
그때 그 마음으로 Scott Nearing을 들여다 본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죽은>이란 수식어가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내 책 <목불을 태워 사리나 얻어볼까>에 등장하여 갖가지 임종상을 보이는 어떤 선사에 못지 않는 훌륭한 죽음을 맞았으며, 그의 삶도 그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삶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100살이 되자 그는 스스로 굶어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Good!"이었다.
오마이뉴스에 스콧 니어링의 죽음을 알리는 좋은 기사가 있어 우선 옮긴다.
약간 손질하며 내 뜻대로 편집한다.
오마이뉴스 /
죽음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스콧 니어링
- 스콧 니어링은 1883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탄광도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 0735+ 코드다.
꼭 1백 년 뒤인 1983년 8월 24일,
100살 생일을 맞이하고 메인 주 하버사이드에서 페놉스콧 만을 바라보며 스스로 곡기를 끊고 한달이 되던 날 삶을 마감한다.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이 몸에 밴 철저란 채식주의자였다.
그가 곡기를 끊고 한달 간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그의 부인인 헬렌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니어링의 의연한 태도와 이러한 과정을 완성으로 승화시키는 헬렌의 도움은 나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사회과학 교수 스콧 니어링
니어링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산 1백 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의 격동의 세월이다.
격변하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그는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이고, 진정한 자유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소득의 재분배 문제를 전공학문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였다. 이론이나 논리적인 면에서 그는 공산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했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열렬이 지지하였다.
그러나 수백만의 민간인과 병사들이 죽어가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절대적인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1900년대 미국이 참여한 전쟁을 미제국주의의 소수 독재자들의 광기로 간주하고 강하게 비난하고 반발하였다.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 할 때 니어링은 <거대한 광기(The Great Madness)>라는 책을 출판하여 전쟁과 소수 독재자집단의 이해관계를 상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1차 대전의 참전을 위해 제정된 미국의 징집법안을 미국의 전통과 국민의 주권을 침해하는 법으로 규정하고 에에 맞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했다.
1923년에 니어링은 이미 석유와 전쟁 관계를 간파하고 <석유, 전쟁의 씨앗(Oil and Gems of War)>을 출판하여 어리석은 민중을 깨우치려 했지만 민중들은 60년이 지나 발발한 걸프전을 겪고서야 그의 선견지명을 깨닫게 된다
스콧 니어링은 일찍이 1911년 <아동노동문제의 해결책(The Solution of the Child Labor Problem)>을 출간하여 아동노동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니어링에게 돌아온 것은 기득권자들의 보복과 박해였다.
뿐만 아니라, 1912년 <여성과 사회진보(Women and Social Progress)>를 출간하여,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던 시절 여성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 개혁을 촉구했지만 '쇠귀에 경 읽기'이였다.
일찍이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요한 사회·정치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한 문제들이 사회전반에 널리 인식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개인적 자유의 수호자,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문명 전반에 대한 비판을 가한 사회철학자이자, 자연주의, 실천적인 생태론자가 되는 원천적인 힘이 되었다.
1929년 흑인을 니그로 등의 경멸적인 호칭으로 부르던 시기인 당시 흑인들이 당하는 폭력을 생생히 묘사한 <블랙 아메리카(Black America)>, 1933년 파시즘을 제약 없는 자본주의 한 형태로 분류한 세상에 대한 경고 메시지가 담긴 <파시즘(fascism)> 등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관한 많은 책들을 출판하여 세계의 평화를 위한 최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구자적 생각과 단호한 그의 태도는 큰 대가를 치른다.
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주도한 빌미로 니어링은 두 대학에서 쫓겨나고 순회강연 요청도 끊겼다.
생계마저 위협받은 처지인 그는 1916년 스파이활동 혐의로 기소된다.
스파이혐의 기소 중에도 니어링은 민주당 정부가 스파이법 등의 법률을 만들어 헌법에서 보장된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고 부정하는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사회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였다.
사회당 후보인 니어링의 인기에 위협을 받은 민주당과 공화당은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를 연합공천으로 출마시켰다. 이 선거에서 1만 4천 대 6천 2백으로 패한 니어링은 그로부터 석달 후 열린 그의 스파이혐의의 재판에서 당국이 증거로 제출한 <거대한 광기(The Great Madness)>의 내용이 자기 사상과 일치함을 인정하고 최후진술에서 신념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믿음과 철학을 설파하였다.
배심원을 포함하여 재판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일으킨 니어링은 당시 전쟁관련 혐의로 기소되어 무죄 판결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광기(The Great Madness)>를 출판한 랜드스쿨 출판사는 유죄판결을 받아 3천 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
사회로부터 고립 당하고 가족으로부터도 떨어진 니어링은 얼마 되지 않은 연금에 의지하며 메인 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실패한 인생의 전형적인 삶을 살게 된다. 니어링은 마흔다섯 살인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연하인 헬렌 노드(헬렌 니어링)을 만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음악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헬렌은 좋은 가정에서 태아나 좋은 교육을 받은 여자다. 일찍이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 연인으로 그의 사상과 삶에 도취하기도 한 헬렌은 보잘것없는 중년 사내인 니어링에게서 비범한 지혜를 발견하고 서로를 의지하고 보완하는 관계를 맺는다.
헬렌에게도 니어링과 만남은 화려하고 유혹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니어링과 함께 버몬트주 숲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단풍사탕을 만들어 파는,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하고 가난한 생활을 선택하게 되는 생의 일대 변환점이 된다.
- 스콧과 헬렌은 20세 차이다. 스콧이 100세가 되던 1983년, 헬렌은 80세였다.
스콧이 사망한 지 12년이 지난 1995년, 헬렌은 사고로 그의 뒤를 따른다.
니어링은 헬렌과 함께 처음에는 버몬트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서 농사철에는 자급자족 생활을 위한 농사를 지었다.
겨울철에는 여행과 강연에 관한 얘기를 <조화로운 삶(1950. Living the Good Life)>, <단풍사탕 만드는 법(1954. The Maple Sugar BooK)> 등의 책을 통해 소개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맞아떨어져 니어링과 헬렌은 미국 부부의 우상이 된다.
숲에서 살아가는 독특하고 절제된 생활방식으로 1970년 이후 그들은 수많은 미국 젊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다.
이 젊은이들은 수동톱으로 산더미 같은 나뭇가지를 40cm 크기로 잘라 부엌용 난로의 연료를 만들고,
팔꿈치를 몇 번이고 덧댄 기운옷을 입고 유기농장에서 감자밭을 가꾸는 주름지고 구부정정한 작은 노인이
금세기 초 버틀란드 러셀과 클레런스 등의 유명인사들과 우열을 가르기 힘든 명연설과 강연으로 수천 청중을 열광시키고,
1917년 발표한 반전논문으로 인해 1919년 연방법정에 피고로 선 급진보주의자 니어링을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삶의 방식은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극대화 되면 될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바빠지고 황폐해질수록, 그가 평생을 통해 추구한 삶의 방식의 의미가 더욱 강하게 되살아 난다.
-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 미리 계획을 세울 것
- 일관성을 유지할 것
-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은 멀리할 것
-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 있는 만남을 이루어 가고
-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새울 것
-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 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 스콧과 헬렌 부부가 손수 지은 집. 지금은 Good Life Center로 이용된다.
스콧 니어링이 백 세가 되자 죽기로 결심한 뒤 남긴 부탁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라며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니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탁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기를 바란다.
나는 되도록 빨리 조용히 떠나고 싶다.
그래서 주사, 심장박동제, 음식물의 인공섭취,
산소공급, 특히 수혈을 거부한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으니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과 위엄, 이해와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눠 주기 바란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삶의 다른 일들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받아야 한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이 이 일에
끼어들어선 안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속에 넣은 다음 평범한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다른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내 아내가,
만일 아내가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灣이 바라다 보이는 우리땅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런 요청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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