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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아프가니스탄의 이 불상은 어째서 2000년도 못견디셨을까?

불교, 흔히 사캬 고타마 싯다르타가 만든 종교라고 정의한다.

宗은 지혜로서 가장 높은 것, 즉 반야를 가리킨다. 그 가리침을 敎라고 한다. 종교는 불교에서 온 말이다. 다만 영어의 religion은 신앙이다.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끝까지 중요하고, 의심이란 한 올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싯다르타 즉 붓다는 의심하고, 경전도 의심하고, 너 자신마저 의심하라고 가르친다. 철저히 지혜를 구하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불교와 다른 종교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다.


붓다가 열반하자 수밧다라는 비구가 잔소리하는 늙은이가 죽어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캬족 출신의 늦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붓다는 믿어라, 믿으면 부자 되고 구원받는다, 이렇게 쉬운 길을 가르쳐 준 분이 아니다.


수밧다의 말처럼 붓다는 잔소리쟁이였다.

이러지 말라, 저러지 말라, 이건 이 뜻이요, 저건 저 뜻이다, 수행해라, 공부해라,

저녁 먹지 말라, 탁발하되 한 집에서 다 받지 말고 일곱 집을 찾아다니며 골고루 얻어라 등등 자잘한 계가 너무 많다.

붓다께서는 남의 말을 믿지 않는 건 당연하고 "나도 믿지 말고, 너 자신의 생각도 믿지 말라"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모든 걸 의심하라고 가르쳤다. 심지어 자아란 없는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까지 하셨다.

아바타나 매트릭스란 영화는 바로 이러한 붓다의 철학에서 나온 영화다.


이래 놓고도 붓다는 놀란 제자들에게, 아침 먹으면 천 조각(니사단이라고 부름. 우리나라는 승니단) 하나 들고 숲으로 들어가 그걸 깔고 앉아 아나파나 사티라는 참선을 하자고 이끌었다.

그러면 제자들도 할 수 없이 그 옆으로 쭈욱 늘어앉아 아나파나 사티를 했다.

숨만 쉰다.

대체 숨을 쉬어 뭘 어쩌란 말인가.

그러기로 말하면 천년 묵은 용문산 은행나무는 열두 번도 더 깨달았으리라.

하지만 붓다는 요구한다.

끝없이 아나파나를 하라, 번뇌와 잡념을 들숨에 묶어 날숨으로 내던져라,

수행이 괴롭거나 귀찮건 욕망이 솟구칠 때는 너 자신에게 명령하라,

너부터 자비하라, 이런 알쏭달쏭한 말이나 한다.


내가 아나파나 사티를 참선이라고 적는 일이 드문 것은, 뜻은 맞지만

참선이라고 하면 한국인들의 뇌에서는 간화선이라고 반응하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간화선은 붓다가 말한 아나파나 사티가 아니요, 붓다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고 하실 것이다.

간화선은 도교에 물든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수련법이다.

중국인은 누구의 사상이든지 도교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만큼 도교문화가 생활 곳곳에 스며든 사람들이다. 

한국의 경우 굿 문화가 널리 퍼져 목사든 승려든 신부든 귀신하고 노느라고 바쁜 것과 같다.

붓다도 파파이스(파순)라는 마라와 싸웠지만, 한국의 사찰에서 이뤄지는 숱한 행사,

교회와 기도원에서 벌어지는 행사 등에 등장하는 귀신은 이 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파파이스는 천신급(차원이 다른 별세계에 사는 생명체 혹은 더 진화한 영적 존재)이지만

한국의 목사와 전도사, 스님들이 다루는 귀신은 그야말로 잡신들이다.


이런 현상이 왜 중국과 한국에서만 일어나겠는가.

아프가니스탄도 마찬가지요, 지금의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중앙아시아의 '~탄'들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늘어나면서 결국 민주주의가 나왔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유권자가 많아질수록 평균 인지 능력은 떨어지게 돼 있다. 조선 사업이 위기에 빠지거나 자동차 산업, 철강 산업 등이 위기에 빠지면 국고를 털어서라도 지원하지만

지식산업을 하는 출판, 예술, 독서 쪽에는 인구가 많지 않으니 국민이 일년 내내 책 한 권 안읽어도 내버려둔다.

결국은 국민의 집단무지로 인한 경제손실이 엄청나지만

당장 급하지 않으니 떼쓰고 몰려다니는 유권자들 쳐다보기 바쁘다.


즉 힌두교와 이슬람교는 당장의 욕망을 해결해준다고 말한다.

이 신에게 안되면 저 신에게 빌 수도 있다.

힌두교의 경우 붓다조차 자신들의 신으로 받아들여 사원 한 구석에 불상을 세운다.

소원마다 섬겨야 할 신이 다르다. 무당들이 부엌신, 화장실신, 토지신, 나무신 등 다양하게 신을 섬기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 스님들도 산신각에 빌어라, 신중단에 기도해라, 그건 문수전으로 가라, 그건 지장전으로 가라,

이렇게 친절하게 분별해준다.

이슬람 역시 빌면 된다. 이렇게 편한 종교가 어디 있는가.


마치 원효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만 외치면 누구나 다 극락간다고 말한 것과 같다.

붓다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지만 신라 국민들은 '나무아미타불'에 열광하고, 지금도 원효는 한반도에 불교를 전한 '큰새벽(元曉)'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종교의 새벽이 열렸을 뿐이다.

(원효의 가치를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분의 높은 이상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붓다하고는 확실히 거리가 먼 대승불교 이야기고, 대승불교와 붓다의 불교는 유대교와 기독교만큼 다르다)


이 글의 제목은 <아프가니스탄의 불상은 어째서 2000년도 못견디셨을까>다.

이 정도면 답이 나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너무 어렵다.

수행하는 절차나 형식, 가르침은 매우 간단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믿질 않는다.

나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 불교학생회를 다니고 대학 때 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했지만 거의 20여년간 불교를 버리고 살았다.

그러다가 간화선 20년 하던 친구 스님을 만나 격론 끝에 친구 스님께는 내가 해온 세속 공부를 시키고,

나는 스님이 권하는 아나파나 사티를 하게 되었다.

스님은 그 사이 두 개의 학사를 마치고,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나는 아나파나 사티 16년만에 깨달음이 일어나는 두뇌 기전을 알게 되었다.(바이오코드 1급용 10권으로 정리)


나는, 불교가 미얀마 식의 무지막지한 수행으로써만 지켜질 수 있다고 믿는다.

미얀마인들은 붓다에 대한 절대 믿음을 갖고 있다.

다만 이들은 붓다에게 승진 부탁하거나 아들 낳게 해달라거나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

오직 자비경과 보배경 등 붓다의 진설경(붓다가 실제로 말씀하신 경)만 외운다. 그게 기도다.

이들이 바보처럼 지키는 계율 역시 2600년이 지난 오늘에 맞지 않는 것이 더러 있지만, 그래도 지킨다.

그러다보니 60만 승려 중에서 이따금 아라한이 나오고, 이들을 중심으로 미얀마 불교는 시퍼렇게 살아 있다. 

미얀마 기후가 온화하다 보니 이러한 굳센 믿음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중앙아시아나 중국이나 한국은 기후 변화가 심하고, 인간이 살기에 척박한 곳이 많다. 

며칠 아나파나 해보고 소식이 없으면 재빨리 그만둔다. 

겨울이나 여름에는 그마저 수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티벳의 경우 영하 40도까지 이르는데 거기서 어떻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나파나를 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수행하는 '미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인구 200만 밖에 안되는 티벳이 대승불교권을 대표한다.

달라이라마는 중국, 한국, 일본의 모든 대승 불교 승려들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한 리더십을 갖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더 척박한 기후와 땅을 갖고 있어 아차 하면 적의 공격에 노출당하고, 게으르면 굶어죽기 십상이다. 한가하게 아나파나 사티를 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변화무쌍한 외부 문명과 문화가 드나들고, 적들의 침입도 잦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 깨우치기보다 믿고 의지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깨달음은 시간이 필요하고, 믿음은 시간 문제가 아니다.

몽골이나 시베리아의 경우, 혹독한 기후 탓에 샤먼이 발달하였는데, 여기는 '눈에 보이는 믿음'을 원한다.

기독교나 이슬람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신이 아니라 신이 직접 무당을 통해 말하는 굿을 더 좋아한다.

정말 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붓다가 되려면 고도의 지적 능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내 스승 삐냐저따 스님은, 아무도 살지 않는 깊은 정글로 들어가, 문밖에 빈 바루만 내어놓고 100일간 오직 아나파나 사티만 했다. 잠자는 시간, 공양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온종일 아나파나를 한 것이다.

100일간 이렇게 집중수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게임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쓴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이 오직 숨만 쉬라면 그게 가능하겠는가.

죄수가 독방에 갇혀 있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한 시간 동안 숨만 쉬며 앉아 있으라고 하면 잘 견디지 못한다.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라고 하면 견디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오직 들숨과 날숨만 바라보라,

화두 따위도 들지 말라,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면 1시간은 하루보다 더 긴 시간이 된다.


지난 해 여름에 삐냐저따 스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스님, 아나파나 사티 모임을 갖는데 사람이 많이 안모입니다. 오던 사람도 몇 번 오다가 그만둡니다. 어쩌리까?" 여쭈니

"내가 때퓨국제비파사나선원에 불사를 하기 위해 아나파나 용맹 정진을 시작했는데 매일매일 승려들이 줄어들더라.

나중에는 남은 사람이 없어 달아나는 놈을 뒤쫓아가 바랑을 잡으니, 그 바랑을 던져버리고 내빼더라.

매일매일 열 시간씩 앉아 있게만 하니 승려들도 못견디더라.

하지만 나 혼자서 끝까지 아나파나를 하고, 불사도 무사히 마쳤다."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결국 <나> 자신이 아나파나 사티를 하는 게 중요하지 남이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자이나교에서 수행할 때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결국 그 혼자서 뛰쳐나와 아나파나 사티를 하셨다.

싯다르타를 호위해야 할 의무가 있던 다섯 비구조차 붓다가야를 떠나 멀리 가버렸다.


이런즉 아나파나를 요구하는 건 붓다니까 가능했다.

붓다니까 500명의 아라한이 나오도록 아나파나 사티를 제자들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삐냐저따 스님도 제자들을 다 이끌지 못하고, 나도 회원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것처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불교 국가들에서도 기어이 아나파나 사티는 시들해졌다.

수백 년만에 드디어 반기를 든 자들이 일어나 대승불교를 만들어 불경을 마음대로 써제끼더니,

결국 사티를 하는 게 아니라 기도를 하고, 붓다의 말씀이 아니라 그들의 판타지 소설을 읽히기 시작했다. 


붓다와 500아라한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보현보살, 숱한 보사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와 법당을 점령했다.

붓다의 옆자리는 붓다의 제자들이 아니라 족보 없는 상상의 보살, 혹은 힌두교에서 들여온 보살들이 차지해버렸다.

이처럼 의심의 불교가 믿음의 불교로 바뀌는 순간 아나파나 사티는 묵조선이라고 하여 죽이고 도교식의 그럴싸한 간화선이 등장하여 일부러 번뇌와 잡념을 일으키는 이상한 수행법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등 실크로드의 모든 나라들은 이슬람에게 점령되었다.

기왕지사 믿음의 종교라면 믿기만 하면 뭐든지 가능한 이슬람이 한결 나았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의 곡사포 공격에 파괴되는 동영상을 보라.

한때 이들이 세운 석불이 이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다. 인류가 반드시 진화하지는 않는다.


- 6세기에 세워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의 석불. 신라 혜초 스님도 친견한 유명한 석불이다.

2001년 3월 8일, 탈레반 정권이 로켓탄을 발사해 파괴시켰다. 약 1600년된 석불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인간의 무지는 이처럼 무섭다.

현재 UN의 지원 아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이다.


나는 민주주의도 양아치, 잡놈, 사기꾼들이 장악해 나가는 걸 보고 바미안 석불을 생각해 보았다.

진실을 추구하는 붓다는 적어도 대한민국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미안 석불처럼 이미 진실이 파괴되었다.

불교뉴스라고 들리는 건 어떤 스님이 딸이 있다, 쌍둥이가 있다, 룸살롱에 갔다, 도박했다는 비불교적인 것들 뿐이다.

붓다가 알지도 못하는 간화선을 한답시고 앉아 있고, 붓다가 알지도 못하는 경전을 읽고,

붓다가 본 적도 없는 귀신잡기를 하고 있다.


바미안이 아니어도, 원래 붓다의 담마는 2000년을 견디지 못하셨다. 천년이 안돼 위경이 나타나기 시작,

담마를 멋대로 지어내기 시작했다. 가짜 담마에 가짜 승려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불법승 3보라고 해도, 가짜 붓다를 내세우고, 가짜 법을 내세우고, 가짜 승려가 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의심스럽고 복잡하고 이상할 때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는 고향을 찾아가 쉬었다 오곤 했다.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그곳, 눈에 익숙한 고향 땅에 서면 나는 다시 내 좌표를 회복할 수 있었다. 


내게 한국 불교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끝으로 나는 오래도록 불교를 떠나 있었다.

지금도 그런 식의 불교는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돌아간 불교란 2600년 전 그 역사인물 사캬 고타마 싯다르타가 직접 말씀하신 것뿐이다.

하나 더 있다면, 스승에 의지해 아나파나 사티를 하며 얻어내는 나의 깨달음이다. 바이오코드다.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을 떠올리면서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진 참 붓다를

누군가는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괴된 바미안 석불조차 요즘에는 문화유산으로서 다시 복원되고 있다.

탈레반이 물러나면서 변화의 바람이 다시 분다.

한국불교, 위선을 걷어내고 가짜를 깨뜨려 진짜 붓다, 진짜 담마, 진짜 승려라는 3보로 복원되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