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이 시작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을 추진한 일제 점령기 지사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비극이다.
108명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오랜 기간 노력한 이 사전은 결국 해방될 때까지 인쇄되지 못했다.
200만 인구 중에 우리말이 소중하다는 걸 인식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분들이 목숨 걸고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동안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인으로 살면서 일본어를 말하고 쓰기만 했다.
그나마 이들이 만든 원고는 일제에게 압수당해 해방이 될 때까지 출간되지 못했다. 일제 36동안 우리말 사전 하나 없이 독립운동을 한 셈이니 이 독립운동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우리말 사전이 없는 나라에 무슨 정체성이 있겠는가.
일제 강점기에 빼앗긴 원고 뭉치는 해방 후 우연히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다 1947년에 1권을 내고 1957년에야 우리말큰사전으로 완간되었다. 세상에, 가장 중요한 우리말 사전이 1957년에야 나온 것이다. 이승만 정부조차 우리말의 가치를 제대로 모른 것이다.
(그 사이 1권 편집에 참여했던 김병제가 월북하여 1962년에 조선말대사전을 편찬했다.)
이 우리말큰사전의 혈통이 오늘날 국립국어원의 우리말큰사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사전도 그리 좋은 사전은 아니다.
일제 때 사전 편찬에 참여하신 분들의 뜻은 웅대했으나 그들은 한자 한문, 그리고 일본어에 중독이 된 분들이었다.
최소한, 알게 모르게 30년 이상 일본어에 익숙해진 분들이었다.
결국 우리말큰사전조차 좋은 사전이 되지 못한 것이다. 아래 기사 보면 그 까닭을 알게 된다.
<한겨레신문 / 우리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이 미쳤어요>
영화는 우리말의 역사 중 짧은 기간의 작은 이미지만 보여준다.
우리말 표기는 세종 이도 때 만들어진 훈민정음으로 가능해졌지만, 우리말 자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우리말 사전의 역사는... 내가 말하기 부끄럽다.
최초의 우리말 사전은 송나라 사람 손목(孫穆)이 엮은 계림유사(鷄林類事)』(1103년)다.
두번째 사전은 조선 사람 최세진이 엮은 '우리말 어린이 사전'쯤 되는 훈몽자회(訓蒙字會)』(1542년)다.
사전은 아니지만 통역 예문집인 노걸대(중국어-조선어)와 박통사(중국어-고려어)란 책이 있어
우리말의 자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 존 로스 목사가 성경 번역을 위해 만든 한영회화집이 1874년에 나왔다.
1887년 우리말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존 로스 목사와 그의 처남 매킨타이어가 마침내 <예수성교전서>가 인쇄되어 나왔다.
130만 자가 넘는 긴 분량의 한글 도서가 처음으로 발간되어 우리땅에 퍼졌다. 그야말로 대사건이다.
이후 성경은 쪽복음 형식으로 거듭 출간되어 야학에 공급되고, 한글 교재로 널리 이용되었다.
이런 끝에 주시경 선생이 우리말에 눈을 떠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그는 훈민정음을 한글로 바꿔 부르면서 큰 혼란을 불러왔다.
오늘날에도 한글이 우리글을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 건 순전히 주시경 선생의 실수다.
한글이 '우리글의 알파벳'인 줄 모르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뜻이다.
게다가 주시경 선생은 말년에 이르러 극단적인 우리말 풀어쓰기로 더 큰 혼란을 불렀다.
자신의 호를 한힌샘, 한힌메, 두루때글이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말연구회를 배달말글몯음으로 바꾸고, 우리말 강습원을 한글배곧, 우리말 사전을 말모이라고 할만큼 극단적인 순우리말 창작에 나서서 국민의 공감을 사지 못했다.
그의 문법책은 지금도 읽기가 매우 어렵다.
훈민정음 창제 뒤 우리말 편지와 책이 더러 나오지만 어휘량이 많지 않았는데,
결국 나라를 왜적에게 빼앗기도록 우리 민족은 우리말 사전을 갖지 못하였다.
주시경 선생이 말모이라는 명칭의 사전을 준비했지만 일제가 망하던 1945년까지 갖은 노력에도 편찬하지 못했다.
다만 일제총독부가 일본어사전을 들여와 우리말로 번역해 1920년에 내놓은 <조선어사전>이 있어 우리말 역사에 종양이 되고 말았다. 일본어 사전을 우리말로 단순 번역한 이 사전이 널리 쓰이면서 우리말 어휘는 일본어로 뒤덮이게 되었다.
이후 나온 모든 우리말 사전이 표제어 늘리기 경쟁에 빠져 이 일본어 사전을 베껴대기 시작하여,
그 잔재가 국립국어원의 우리말큰사전에 배어들고 말았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1994년 처음으로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500가지>를 펴내면서 오늘까지 우리말 사전 편찬을 해오고 있다. 열다섯 권을 만들었지만 표제어가 1만 개를 넘지 못한다.
아직 걸음마 단계다.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앞으로 백년을 더 만든다 해도 우리말에 스며든 한자와 일본어의 독기를 다 빼내지는 못할 것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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