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생 큰할아버지와 1900년생 우리 할아버지는 백 수십 년간 이웃하여 살았다. 두 형제의 자식이 11명이고, 나를 포함한 사촌들까지 30여 명 되는데, 현충일이든 삼일절이든 육이오전쟁 기념일이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점시 굶으며, 저녁 굶으며 살았다.
큰집 할머니가 쥐꼬리만한 무슨 연금을 받는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어려서는 몰랐다. 그러다가 큰할아버지 댁은 본가를 잃고 각지로 흩어져 이제 명절이 아니면 만나기도 어렵다. 집터조차 남의 땅이라 흔적도 없다.
육군 소위 이숙범(사후에 중위), 교전 중 사망, 시신 없는 위패로만 존재한다.
북한 지역 교전 중 전사라 통일 되기 전에는 시신을 찾기 어렵고, 찾더라도 부모형제는 세상에 없이 손자들이 겨우 맞을 것이다.
현재 고모의 유전자가 국방부에 제출되어 있는 상태라 언제고 유해가 발견되기만 하면 손자든, 증손자든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어른들도 무심하시지, 전쟁 내보내 죽여놓고 족보에 이름조차 올려주지 않았다. 총각으로 죽었으니 자식이 없다고. 생년월일 자료, 전사일과 전사지 자료 다 찾은 다음 올릴 예정이다)
1892년생, 1900년생 형제는 집안 재산을 모조리 만주로 보내 독립자금으로 바쳤다. 스무살 무렵, 돈인 줄도 모르고 보따리 들고 만주까지 심부름 다닌 당숙은 돌아가셨다. 누구를 접선했는지 당숙은 끝내 모른 채 돌아가셨다. 증명할 길이 없다. 우리는 그냥 집안의 전설로만 알고 있다.
- 지지리도 못살던 일제 말기, 4형제가 사진을 남겼다. 맨오른쪽이 만주까지 독립자금 몰래 전하던 분이다. 맨앞은 우리 아버지인데, 당숙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려 만주 심부름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맨왼쪽 당숙은, 할아버지들이 재산 모아 독립자금으로 쓰기 바빠 평생 광산에서 일한(향범) 후유증으로 진폐증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도 일제 시기에 광산 다닌 후유증으로 역시 진폐증으로 돌아가셨다.
육이오 때 참전, 인민군과 교전하다 전사한 숙범 당숙은 맨왼쪽 향범의 동생이고, 그 아래 동생 영범의 형인데 1925년~1938년 사이에 출생했다. 향범이 육이오 때 25세, 영범은 12세이므로 그 중간인 20세 무렵일 것으로 추정한다(미혼 상태에서 전사하여 어른들이 족보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3월 1일에야 삼일만세운동 때 고초를 겪은 경찰 기록이 발견되어 100년만에 독립유공자 훈장과 증서가 나왔다. 지금은 보훈청에서 할아버지를 현충원에 이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할아버지는 육이오전쟁이 나자 두 말 없이 동생을 자원입대시켜 치열한 전선으로 등을 떠밀었다. 생각해보라. 육이오전쟁 나자마자 자원입대시켜 몇 달 훈련받고 육군 소위 임관이라면 대략 연말쯤 전선에 투입된 것이고, 그때가 얼마나 치열한 때였는지.
두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공부할 것 없다며 자식들을 무학으로 방치하여 서당 교육만 시키고, 손자들까지 초등학교만 졸업시켰다. 두 집 장손 11명 중 대학졸업자는 나와 내 동생 뿐이다.
덕분에 우리 집안이 병마사, 절도사를 10여 명 이상 배출한 무인 집안이자 인조반정 공신 집안이요, 그러고도 격렬한 당쟁 중 비교적 중도를 지켜온 소론 온건파였다는 사실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뒤늦게 알았다.
무슨 기념일마다 사람들이 애국을 호소하고, 전사자를 기리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일이 끝나고 나면 늘 뒷전에 있던 자들이 단상을 차지하고, 배신자와 부역자들이 질서를 엎어 놓는 역사를 많이 보았다. 크든 작든 늘 그렇다.
어제 대통령 추념사 중 두 군데서 매우 불쾌해 비판 글을 쓸까 하다가 하루 참았다.
내 당숙은 교전 중 전사라는 사실과 위패만 있다. 장교 묘역이든 사병 묘역이든 자취가 없다. 통일되기 전에는 시신 수습조차 불가능하다. 세월호 시신 수습, 헝가리 다뉴브강 시신 수습에 열 올리는 걸 보면서 70년이 지난 육이오 전사자는 북녘에 방치하는 우리 정부에 슬픔을 느낀다.
이 마당에 대통령은, 보수든 진보든이라고 색칠하면서 육이오전쟁 중 북한군과 교전하다 쓰러진 내 당숙의 영혼 앞에서 공산당 김원봉이든 광복군 출신 인민군이든이라는 식으로 뒤섞어 버렸다. 북한군과 교전하다 전사한 육군 소위 이숙범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했는데, 통일이 되지 못해 유해보차 찾지 못하는데 이미 통일이 다 된 것처럼 이제 국군과 인민군이 악수하자? 그렇게는 못한다.
공산 활동을 한 아무개 부친이 독립유공자가 될 때 우리는 알량한 가산까지 털어, 자기 새끼들은 굶기고 안가르치면서 독립운동자금으로 바쳤건만 사실을 증명할만한 기록이 없어 그 공적을 인정받지도 못하는데, 우리 민족 수백 만 명이 죽거나 다친 육이오전쟁조차 우리끼리, 민족끼리 이러면서 덮고 넘어가잔 말인가.
내 사촌들이 잘 먹지 못하고, 공부를 못해 아직도 어렵게 사는 형제가 많은데 이쯤에서 인민군과 국군을 구분하지 말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대통령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일제 말기에 광복군에 잠시 편입된 사실을 거론하며, 이 역량이 마치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다고 거짓말했다.
조선의용대는 인민군의 뿌리가 되고, 조중 동맹의 토대가 되었지 어째서 국군의 뿌리가 되고 한미동맹의 뿌리가 되었는가.
도리어 좌익 계열 독립군과 팔로군 출신 조선인은 북한 인민군이 되었을 뿐이다.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하려면 국군의 뿌리가 된 만주군, 일본군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하고 나서 해야 한다. 육이오전쟁이 나던 말 휴전선 사단장의 대부분이 일본군 출신이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 육이오전쟁은 70년이 지났지만 그 진실이 아직 묻혀 있다. 30년 뒤인 1980년에 일어난 광주항쟁은 오히려 거의 실체가 드러났지만 육이오전쟁에 관한 진실은 절반도 모른다고 나는 확신한다. 김일성의 과오가 있고, 이승만의 욕심과 과오가 있고, 미국의 책임이 있다. 통일되기 전에는 말할 수 없는 진실이 너무 많다.
어영부영 넘어가지 말자.
육이오전쟁에 나가 전사한 분의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가산을 팔아 만주에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 막상 후손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무능한 조상들 때문에 굶고 산 우리 사촌들, 육촌들이 있는 한 역사청산 문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오늘 아침, 72세 장형이 전화를 걸어와 할아버지 현충원 이전 문제를 추진 중인데, 보훈처에서 할아버지 묘소가 맞는지 현장 실사하고 후속 조치를 밟는 중이라고 한다. 장손인 이 형, 초등학교 간신히 나와 택시운전, 버스운전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야말로 이 사회의 루저인 줄 알고 살다가 72세가 되어 그나마 독립유공자, 국가유공자 집안 장손이라는 사실에서 자긍심을 찾았다. 사촌육촌들이 다 늙어버리고, 육이오 때 전사한 당숙은 당시 미혼 상태여서 자녀도 없다. 그래서 국가의 혜택이 뭔지 모르고 두 손 두 발로 먹고 살아왔다.
여기저기서 현충한다고 검은 양복 입고 인증샷 많이 올라오는데, 나라가 급할 때도 꼭 그래주기 바란다. 노무현 대통령 외로울 때는 다 도망가거나 숨어 손가락질하고 욕하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상주 완장차고 빈소 차려 노빠라고 자랑하더라. 그런 게 세상이라는 건 알지만, 난 그런 위선을 아주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