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어제는 원래 큰형의 칠순을 기념하여 가족이 모여 점심을 먹기로 돼 있었다.
그래서 약속된 식당으로 가야 하는데, 두 동생과 함께 길을 바꿔 충남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형이 그만 장이 꼬여 입원하는 바람에 점심 약속은 무기 연기되었다.
장이 꼬인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설사를 하다 보면 그런 일이 종종 생기는가 보다.
병원에 가서 보니 모레 퇴원하니 걱정말란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꼬인 장을 끄집어 내어 정렬시키려고 개복했더니 무슨 용종인가 보여 담당 의사가 살펴보고는, 대장암 전문의를 불러 그 자리에서 용종, 새끼 용종, 비슷한 용종 등 죄다 잘라버렸단다. 다시 수술하기 힘드니 그냥 악성 종양이려니 하고 깨끗이 제거한 모양이다.
그런 지 며칠 안되어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세상에나 대장암 2기였단다.
뭔지도 모르고 수술을 했는데, 재수술은 필요없고, 방사선 치료도 필요없고, 정기 검진이나 받으면 문제가 없단다.
의사가 말하기를, 대장암이나 간암은 자각 증상이 없어 진단되면 대개 말기인데,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 행운이라고 말하더란다.
암만 생각해 보니 형이 누굴 속여 본 적이 없고, 당장 싸우더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자기 감정에 충실해서 다툼은 더러 있어도 말을 감추거나 꼬거나 바꾸는 일이 없었다. 0245코드인 형은 까탈스럽긴 해도 정직하고, 직선적이다.
남을 엄청나게 돕지는 않은 것같지만 해는 끼친 적이 없다보니 아무래도 돌아가신 부모님이, 큰아들이 안타까워 일부러 장을 꼬이게 하신 모양이다. 형은 적선을 많이 하지 않고 공덕을 쌓은 건 내 기억에 별로 없는 것같지만, 부모님은 그렇게 사셨으니 그 음덕을 입은 것같다.
아버지가 젊어서 번 돈은 할아버지를 통해 거의 다 만주 독립군에게 갔으니 그 음덕만 해도 어딘가.
여순반란 사건 진압하기 싫다며 탈영한 둘째동생 대신 아버지가 뒤늦게 군대 가서 4년 고생한 것도 그렇고,
늙은 세째동생이 빚을 지자 문전옥전(덕분에 입에 풀칠이라도 해준 큰 텃밭)을 팔아 갚아준 것도 그렇고,
돌아가시기 전 10여 년간 산재보험 받은 돈으로 청양장마다 나가 동네 사람들 국밥 사준 공덕도 적지 않으시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들 다섯 먹여 살려낸 우리 어머니 공덕은 다 적을 수도 없다.
부모님 공덕도 유산인데, 내가 한 20년 써먹었는데, 이번에 또 긴급으로 큰형 한번 썼으니 그 복전이 얼마나 남아 있을런지 걱정이다.
아무쪼록 우리 형,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다.
- * 병원에서 칠순이 된 형 얼굴 한참 들여다보다 집에 돌아와 가족 사진첩을 뒤져 1923년생인 아버지 회갑, 1950년생인 형 회갑, 나 회갑 때 사진을 꺼내 비교해보았다. 세상이 변하기는 한 것같다. 형은 회갑 잔치하는 세대가 못되어 그때도 형제가 모여 밥만 먹고 말고, 나는 밥도 안먹었다(딸조차 오지는 않고 돈을 보내 저 대신 돈이 인사했다). 아무래도 형 칠순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하여 온가족이 모일 참이었는데, 거 참, 뜻대로 안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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