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어 사전 출간을 앞두고....소설가로서 가슴이 아프다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시민들이 전두환 군부정권에 대항해 맨몸으로 궐기한 날, 대학교는 문을 닫어걸었다.
이때 소설을 포함해 두 권을 탈고, 학생 신분으로 문학시리즈에 내 이름을 올렸다.
그로부터 40여년이 돼가는 지금, 내가 쓴 책이 몇 권인지도 모를만큼 열심히 글만 써왔는데 막상 <글>에 자신이 없어진다.
두 가지 걱정이 있다. 하나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이젠 잘 알지만 그렇게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독자가 좋아하는 것의 정체, 뇌과학을 통해 나이 50 넘어 겨우 알았다. 그 정체는 무상 그 자체다.
감성이 뭔지 뇌과학으로 계산해보니 젊을 때 쓴 글이 부끄러워진다.
또 하나는 우리 언어의 역사를 살피다 보니 이 역시 얼마나 무상한지 진저리가 난다.
하필 지식이 폭발하는 시기에 소설가가 되어 숨가쁘게 달려오긴 했는데, 뒤돌아 보니 내가 찍어 놓은 발자국이 어지럽고 늙은 소나무 버국처럼 거칠다.
새 지식은 폭발하고, 옛 지식은 멸절하는 시대 한복판에 내 청춘이 서 있었다.
젊을 때는 밀리언셀러 작가라는 호칭을 은근히 즐겼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내 책이 서너 권이 함께 올라간 적이 있는데, 소식을 들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다 지나간 일이요, 아침이슬처럼 지금은 기억조차 흐릿하다.
한자어 사전을 만든 지 이제 14년이 되었다. 2005년 3월 19일에 초판 1쇄를 찍었는데, 마침 상해 복단(復旦)대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배가 한문서적 만여 권을 들여와 내 서재에 들여놓았다.
8년간 중국에 머물며 자기 아파트를 판 돈으로 실컷 책을 사모은 후배 덕분에 듣도 보도 못하던 좋은 한적을 많이 보았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시법에 쓰이는 한자 자료는 즉시 번역해 나 혼자만 보는 중이고, 그밖에도 나만 보기 위해 몇 권을 더 번역해 숨겨 놓고 본다.
후배가 가져온 책 중에 한자어 자전류가 굉장히 많았는데, 갑골문자로부터 거의 모든 사전류가 다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써온 한자어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알아보니 내가 쓴 한자어 대부분이 일본 총독부에서 만든 <조선어사전> 출신이라는 걸 알았다.
그 사전, 사실은 일본어사전을 통째로 들여와 마구잡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 이후 나온 우리말 사전이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한자어 해설로는 우리 한문 고전을 읽어낼 수가 없다.
내 조상이 쓴 글을 내가 못읽다니, 이건 말이 안된다.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원인은 우리 국어대사전에 있었다.
유학다녀온 지 얼마 안되어 어리둥절한 후배를 꼬드겨 아예 내 서재에 살게 하고, 둘이서 우리 한자어 사전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올해로 14년이 되었다. 이번 증보판에는 거의 새 책 수준으로 많은 어휘를 올렸다.
550쪽이 넘는다니 욕심껏 담은 셈이다.
나는 전업작가를 선언한 1990년 이후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만큼 부지런히 살아왔다.
하루를 3분하여 1은 소설에 쓰고, 1은 바이오코드에 쓰고, 1은 사전 만드는 데 썼다.
내가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데 공을 들이는 것은, 나를 평생 먹여살려준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서다. 내가 만든 사전 열 종이 모두 나가면, 아마도 우리말은 굉장히 또렷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나는 비록 좋은 사전을 들고 글을 쓰지 못했지만, 우리 후배 작가들은 좋은 사전을 넉넉하게 갖고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나는 그러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
* 노마드에서 나온 <~우리말 잡학사전> <~우리말 어원사전> <~ 우리 한자어 사전>은 원래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이란 타이틀을 오래도록 달아왔는데(4권 나란히 놓인 사진이 그 버전의 마지막) 이번에 바뀌었다.
* ~<한자어 사전> 펀딩에 참여해준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정말 열심히 만들었다. <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는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의 손길이 배어 있다. 언젠가는 그들이 이 사전을 다듬고 더 채워 나갈 것이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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