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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사람들/절 많이 다니면 깨달으려나

'하늘이 감춘 절'이라는 이름의 '천장암'에 다녀왔다

난 수덕사의 가풍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경허든 만공이든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몇년 전 방장 설정(총무원장하던 중에 유전자 감식한다며 입 따악 벌린 사진보고 깜짝 놀란)의 면목을 구경하고는 우리 불교에 그림자나 메아리나 신기루가 많다는 걸 다시 느꼈다.

 

그래도 오늘날 한국 불교의 선맥은 경허 스님과 그 제자들인 만공, 수월, 혜월, 한암 스님 등이 일으켜 세운 바가 약간은 있으니 천장암은 그런대로 중요한 불교역사 유적이다.

 

경허 송동욱 스님은, 동학사에서 참선하다 깨달은 것으로 믿고 이 깨달음을 보림하겠다여 이곳 천장암에 18개월 정도 머물렀다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180Cm 키를 가진 경허가 참선하던 방을 들여다보니 한 몸 눕히고 나면 바늘 하나 세울 여유가 없다(1.3m X 2.3m, 참고로 서대문형무소 독방은 가로세로 2m) 오직 참선하는 방일 뿐이다.

그 느낌은, 제주 서귀포의 이중섭 집터에서 네 식구가 부대끼며 살던 작은 방을 보던 그대로다. 이중섭네 작은 방은, 아버지만 보면 새끼 새처럼 입 딱딱 벌리는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 게나 잡아먹이며 네 식구가 부둥켜 안고 살던 슬프고 가난한 집이지만, 경허의 참선 방은 비록 작지만 반듯하고 깨끗하다. 게다가 시자 만공, 수월, 혜월이 수발드는 제법 큰 방이 딸려 있고, 부엌도 근사하다. 때되면 밥 지어 바치고, 차 우려 내미는 시자와 제자들이 있는데 무엇이 아쉬우랴(이때 경허 스님의 나이 31세 ㅋ)

 

1980년 광주항쟁으로 대학문이 닫혀 있을 때 <목불을 태워 사리나 얻어볼까>를 썼는데, 이 중에 경허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있다.

참선 중에 공양미를 싣고 온 처사들이 절마당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중이 보시를 받아먹고도 깨우치지 못하면 보시한 집의 소가 되어 죽도록 일을 하며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지?”

“공부라도 하면 그건 좀 낫지. 공부마저 게을리하며 허송세월한 중은 콧구멍도 없는 소가 되어 그 은혜마저 갚지 못한다네.”

'콧구멍도 없는 소가 된다'는 데서 깨우쳤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경허는 승복과 가사를 벗어던지고 삼수갑산에서 난주란 이름으로 서당 훈장 노릇을 하다가 56세에 사망했다.

 

* 경허 스님이 보림(깨달은 뒤 이를 다지는 수행, 붓다도 반야를 깨우친 뒤 보리수 나무 아래에 더 앉아 있으면서 확인하고 또 했다)하던 선실에 잠시 앉아 아나파나를 하려는데, 방석에 온갖 곤충의 시신이 시커멓게 깔려 있어 기분이 어떤지 잠시만 앉아 보았다. 이 사진은 싣지 않는다.

 

시자 수월이 밥 짓던 부엌에서 솟아나온 굴뚝. 벽돌을 쌓은 다음 통나무로 만든 연통을 세웠다.
경허 선사가 깨달음을 노래한 오도송을 새긴 표지판. 처음에는 멋지게 박혀 사진 좀 찍혔을 테지만 지금은 이렇게 쓰러져 있다. 

 

천장암 가는 길 앞에서 별군이와 맥스와 더불어 인증 사진을 찍다
천장암을 지키는 불상
경허 스님 선방 앞을 지키고 있는 국화.
경허의 3대 제자 중 한 명인 혜월(慧月)과 법명이 같은 서산 약천사 혜월 스님이 수덕사 선풍을 설명하고 있다. 혜월 스님은 동의보감 원작 드라마를 단편으로 쓴 작가(나중에 미니시리즈 쓰고 싶다는 이은성 씨에게 줌)로, 수덕사의 비구니로 유명한 일엽 스님(송춘희, 수덕사의 여승)의 외아들 일당 김태신 화가 겸 스님의 상좌 시절 <라훌라의 사모곡>을 썼다.
이 방이 동학사에서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 듣고 깨달은 것으로 판단한 경허 스님이 1년 반 동안 참선에 용맹정진한 현장이다. 천장암은 경허의 형이 주지로 있던 작은 암자로 당시 어머니도 계셨다.수정 5김윤태, 이지혁, 외 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