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의 <우리말의 탄생과 진화>
- 배 타고 들어와 우리말로 귀화한 외국어들 2
거문고를 뜻하는 금슬(琴瑟)은 북방으로 들어온 말이지만 가야금은 남쪽 지방에서 만들어졌거나 남방으로 들어온 말이다. 그래서 거문고는 북방 악기가 되고, 가야금은 남방 악기가 된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남방계와 북방계가 있어 더 다양해졌다.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은 백제, 신라, 가야는 북방의 고구려에 길이 막히면서 배를 이용해 외국과 교류했다. 이런 의미에서 사국, 삼국시대는 배 타고 들어오는 어휘가 많아 우리말이 풍부해진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뒤 신라가 가야, 백제, 고구려 일부를 차례로 병합한 뒤 당나라와 국경이 닿으면서 중국 한자어의 대량 유입이 일어나 우리말은 엄청난 시련을 맞았다.
다행히 30여년만에 나당(羅唐) 국경을 가로막는 발해가 생기고, 이후 후백제와 후고구려, 거란의 요가 건국되면서 우리말이 치명적인 사태에 이르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수백 년 혹은 천 년 정도 지속됐더라면 우리말 어휘는 한자어로 완전히 뒤덮였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말 차원에서 나당 국경이 빨리 닫힌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고, 그뒤 고구려 민족과 가까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고구려 민족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부여족과 가까운 몽골족의 원나라가 차례로 일어나면서 고구려․백제어와 같은 계통의 북방어와 중앙아시아어가 적잖이 들어와 우리말의 생명력이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런 덕분에 한자어로 신음하던 우리말 중 궁중어가 풍부해지고, 민간어휘는 문화 수준을 높일 수 있을만큼 다양해졌다. 우리 민족에게는 시련기였지만 우리말로선 자양분을 넉넉히 흡수할 수 있던 좋은 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자어를 쓰는 명나라가 서면서 한자어의 유입이 또다시 집중되는 위기를 맞았는데 뜻밖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 중국 남방어와 남방문화가 명나라 수군을 따라 들어왔다.
이때 중국 남방과 일본 쪽을 향해 열린 해상길로 감자, 강냉이(옥수수), 고추, 고구마, 담배, 안경 같은 어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던 것이 조선 후기 서구 열강이 거대한 군함이나 상선을 타고 나타나 양(洋) 자로 시작되는 외래어를 비롯하여 새로운 어휘를 마구 뿌려놓기 시작했다.
- 양말 양복 양산 양장 양재기
아마도 신라의 백제 강점으로 일어난 한자어 덮어쓰기 이후 가장 큰 사건이 아닌가 싶다. 고려 중기 이후 여진족, 몽골족 등의 대륙 정복으로 일어난 북방어 유입이나 임진왜란 때 들어온 중국 남방어와 일본어 정도는 매우 작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휘가 들어올 때는 문물이 함께 들어오는 법인데, 특히 명나라, 청나라 시기에는 들어올만한 문물은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청군이나 일본군이 들여온 말 중에 우리말에 꼭 필요한 어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 후기 서양 열강의 상선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한 어휘는 조선인들이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신문물, 신과학, 신학문과 함께 막 태어난 신선한 어휘들이었다. 한번 빗장이 열리면서 이러한 문명이 한창 꽃피던 서양에서 막 새로 태어난 어휘가 머지않아 배를 타고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일본과 정기 뱃길이 열리면서, 마침 유럽과 전면 교류를 시작한 일본을 경유한 새 어휘들이 날이면 날마다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현지에서 생겨난 지 채 10년이 안되는 생생한 어휘가 배를 타고 들어오는 경우도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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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관점에서만 보자면 개항과 조선왕조 멸망, 이 두 사건은 이도(세종)의 오랜 꿈이 실현되는 호기이자 우리말의 빅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재운(소설가․『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대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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