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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민병덕의 <옛날에도 일요일이?>

옛날에도 사인(Sign)이 있었다면서요?

옛날에도 사인(Sign)이 있었다면서요?

--- 사인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써 온 것으로 ‘수결’이라 불렀다.

이순신장군이 난중일기에 수결 연습을 한 것이 자료로 남아 있다.

 

→ 텔레비전 사극을 보면 옥새(玉璽)를 전함으로써 왕위가 계승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새가 곧 왕권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옥새를 비롯해 인장(印章)을 사용하게 된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삼국사기》에 ‘신라시대에는 국왕이 바뀔 때마다 국새(國璽)를 전한다’고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개인도 인장을 소지한 것으로 미루어 이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장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인장과 더불어 오늘날의 사인(sign)에 해당하는 수결(手決)도 사용했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만 사용했던 독특한 문화였다.

 

수결은 관직에 있는 사람만이 쓰는 부호로, ‘일심(一心)’ 두 글자를 각자 나름대로 독특하게 고안하도록 되어 있었다. 관리가 어떤 사안을 결재함에 있어서 조금도 사심을 갖지 말고 오직 한 마음으로 임할 것을 강조한 수결이었다.

수결은 사람마다 다르게 두었다. 그러나 수결이 되어 있는 문서라 하더라도 후세 사람이 그 수결의 임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는 어렵다. ‘일(一)’자를 길게 긋고 그 상하에 점이나 원 등의 기호를 더했으므로 서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서(史書)를 뒤져 그 당시 누가 그 직책에 있었는가를 알아보아야 식별이 가능하다.

수결의 자취로는 충무공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수결 연습(오늘날의 사인 연습)을 한 것이 남아 있으며, 선조 때의 재상 이항복(李恒福)과 수결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항복은 업무가 많이 쌓이자 일일이 수결을 하는 것조차 번거로워 하였다. 그러자 그는 ‘一’자 하나만 긋고 그 상하에 아무런 가점(加點)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은 어느 사안에 대해 결재한 문서가 문제가 되었다. 이 때 이항복은 그 사안을 결재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담당관은 그의 수결이 있는 문서를 제시하며 분명 대감의 수결이라고 반박했다. 그 문서를 본 이항복은 “‘一’자 수결은 틀림없으나, 내 것은 아니오”라며 여유있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손수 한 수결과 대조하라고 하였다. 이항복의 진짜 수결에는 ‘一’자 좌우 끝에 바늘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담당관이 제시한 수결에는 좌우에 구멍이 없어 가짜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항복도 이 수결이후에 다른 수결을 만들었다고 한다.